모든 시민은 기자다

불법주차 딱지에... 아빠는 뒤집개를 들고 나왔다

[나를 붙잡은 말들] 자식의 성취를 기뻐하는 부모를 위해, 나는 오늘도 시동을 건다

등록|2019.08.29 11:28 수정|2019.08.29 11:33
연재 '나를 붙잡은 말들'은 프리랜스 아나운서 임희정씨가 쓰는 '노동으로 나를 길러내신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나의 첫 번째 차는 2003년식 하얀색 SM3 중고차였다. 나는 그 차를 2012년 겨울에 장만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광주MBC에 합격해 내려가야 했는데, 지방에서 혼자 지내려면 차는 있어야 한다는 주변 선배들의 조언을 듣고 중고차매매단지에 가서 급하게 구매한 차였다. 나온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중고차였지만 보자마자 새 차처럼 좋아 날뛰었다. 연식과 종류에 상관없이 차가 생긴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찻값은 오백오십만 원. 오천오백만 원도 아니고 오백만 원이었지만 수중에 가진 돈이 없었기에 중고차 할부대출을 받았다. 직장인이 되면 대학생 때 받은 학자금 대출을 갚을 줄 알았더니 대출금이 더 늘었다. 결혼하면 주택담보대출을 받게 되겠지, 하고 생각했다. 가진 게 없어 어딘가로부터 자꾸만 무엇인가 빌려야 했던 이십 대였다.

아무렴 어떤가. 나도 '자차운전자'가 되었다. 비록 10년 된 중고차였지만 차를 운전할 때만큼은 이미 갓 출시된 신형 세단을 타는 느낌이 들었다. 넉넉하지 못했던 삶은 때때로 불만족스러웠지만, 이렇게 청춘의 빚은 소유의 만족도 맛보게 해주었다. 월급을 받아 열심히 빚을 갚았고, 액셀을 밟아 열심히 쏘다녔다.

나는 자가용 없는 집에서 자랐다. 유년 시절에는 아빠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엄마와 함께 어딘가를 가는 아이들을 그저 부러워했다. 고등학생 때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면 학교 앞에서 창문을 내리고 얼른 타라며 손짓하는 친구들의 부모님. 주말에 가족과 함께 드라이브를 다녀왔다는 지인들의 말. 다 부러웠다.

차는커녕 운전면허조차 없는 부모님은 마중, 여행, 드라이브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아주 먼 삶을 사셨다. 아직도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니시고, 택시는 돈이 아깝다며 잘 타지 않으려고 하신다. 그런 부모님이 안쓰러웠다. 그저 평생을 열심히 걸었고, 걸음 수 만큼 아꼈고, 늙어갔다. 시간과 체력보다 돈을 아끼고 싶어 하는 아빠와 엄마의 그 마음이 참 속상했다.

그러니 내게 차는 단순히 욕망의 대상이 아니었다. 부모님이 힘을 많이 들이지 않고도 멀리 갈 수 있길 바랐고, 나도 원할 때면 언제든 삶의 범위를 넘어서 어딘가로 훌쩍 떠날 수 있길 바랐다. 차는 나와 우리 가족의 배경을 확장해주는 동력 같았다. 그러니 연식과 종류에 상관없이 처음으로 갖게 된 10년 된 중고차 앞에서도 나는 벅찰 수밖에 없었다.

내가 운전대를 잡고 부모님을 태워 어딘가 갈 때면 엄마 아빠는 굉장히 신나 하셨다. 비록 아빠가 잡은 운전대는 아닐지라도, 날씨가 좋으면 은근히 어디라도 나가자며 드라이브를 하고 싶어 하셨다. 전화를 끊을 때마다 '항상 운전 조심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으셨다.

자식의 성취는 곧 부모의 성취였다

그렇게 폐차 직전까지 중고차를 탄 후, 드디어 꿈에 그리던 새 차를 타게 됐다. 어찌나 기쁘던지, 집 앞 슈퍼도 차를 끌고 가고 싶었고, 10분에 천 원씩 받는 비싼 유료주차장도 문제없었다. 이 기쁨을 부모님과도 나누고 싶었다.

새 차를 끌고 부모님 댁에 갔다. 엄마 아빠는 내가 도착하기 한참 전부터 주차장에 나와 나를, 아니 나의 두 번째 자가용을 기다리고 계셨다. 반짝반짝 빛나는 새 차 앞에서 부모님은 나만큼이나 기뻐하며 만지고 닦고 흐뭇해하셨다.
 

아빠는 휴대폰을 꺼내 찰칵찰칵 계속 나를, 아니 새 차를 찍었다. 사진첩을 보니 딸 사진보다 차 사진이 훨씬 많다. 드라이브를 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엄마는 베란다 아래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진 내 차를 내려다보며 '저 차가 네 차냐'며 좋아하셨다.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고 집을 나섰다. 그런데 차 앞 유리에 불법 주차 딱지가 붙어있었다. 아, 나는 따로 나와 살고 있지. 이제 부모님 집은 '내 집'이 아니었는데도, 아파트 입구에서 방문증 발급받는 걸 깜빡했다. 지금이라도 관리사무소에 가서 방문증을 받아야겠다며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갑자기 엄마 아빠가 허겁지겁 집으로 다시 올라가는 게 아닌가.

얼마 후에 두 분이 서둘러 내려왔다. 한 손에는 뜨거운 물이 담긴 세숫대야를, 다른 한 손에는 프라이팬 뒤집개를 들고서. 엄마 아빠는 물을 뿌리고 스티커를 긁어냈다. 행여나 자국이라도 남을까 조심조심하며 순식간에 앞 유리에 붙은 스티커를 말끔하게 제거했다. 마치 처음부터 안 붙어 있었던 것처럼 깨끗하게 떼어내고 나서야 부모님은 안심하셨다.

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내내 생각했다. 내가 새 차를 모는 일은 곧 엄마 아빠가 새 차를 타는 일이었다. 아빠는 살아오면서 딸이 무언가를 새로 장만하고 이루는 모습을 보며 마치 자기가 이룩한 것처럼 기뻐하셨고, 엄마도 그런 나를 기특해하셨다.

자신들이 해주지 못한 것을 자식이 스스로 해내는 일은 부모에게도 큰 동기와 성취가 된다. 부모님은 내가 대학교에 합격했을 때도, 취업했을 때도, 아나운서가 됐을 때도,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려 나를 와락 껴안고 기뻐하셨다. 엄마 아빠가 기뻐하셔서 나도 기쁘다. 뿌듯하고 행복하다.

주말이 오면 부모님을 모시고 저 멀리 드라이브를 다녀와야겠다. 사실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온다 해도 크게 좋아하실 부모님이다. 이제 엄마 아빠는 어딘가를 갈 때 걸어서가 아닌 딸내미 차를 타고 가고 싶어 하신다. 택시비 몇천 원도 아까워 하시는데, 몇만 원 하는 기름을 넣어 주겠다며 나가자고 하신다. 차가 아니라, 차를 운전하는 딸을 좋아하시는 거다. 차를 타고 딸과 함께 어디라도 가는 것을 행복해하시는 것이다.

그 마음을 알기에, 나는 기쁘게 시동을 건다. 부모님께 달려간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필자의 브런치(www.brunch.co.kr/hjl0520)에도 실립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