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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때 맥아더의 '졸전'이 있었다

[박도 기자의 NARA 앨범 16] 1950년 10월의 전란 현장 Ⅲ - 원산상륙작전

등록|2019.09.16 17:23 수정|2019.09.16 18:35

▲ 1950. 10. 26, 유엔군 상륙함정들이 원산 해안으로 상륙하고 있다. ⓒ NARA


원산상륙작전

맥아더는 미 제8군이 평양을 점령하면 동시에 미 제10군단을 원산에 기습 상륙시킨다는 작전을 짰다. 하지만 이 계획이 공개되자 인천상륙작전 때처럼 반대의견이 쏟아졌다. 그 가장 큰 이유로 인천에서 기습을 허용한 인민군이 원산 해안에 대규모 기뢰를 설치해놨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이었다. 또 목표지점까지 작전 거리가 짧기 때문에 지상군의 진격속도보다 늦게 상륙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이유로 꼽혔다.

이러한 반대에도 맥아더는 인천상륙 때처럼 이 작전을 밀어부쳤다. 하지만 우려했던 일들이 현실로 다가왔다. 상륙함대가 원산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한국군 제1군단이 원산을 장악한 뒤였다. 또한 인민군은 원산 앞바다에 3000여 개의 기뢰를 설치해 두고 있었기에 함정 3척이 크게 파손되는 피해를 입었다. 그러자 유엔군 측은 상륙에 앞서 기뢰 제거 작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50년 10월 19일, 원산 해역에 도착한 미 제1해병사단은 기뢰제거 작업 등으로 일주일이 지난 10월 26일에야 원산에 상륙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원산상륙작전은 군사적으로 별 의미없는, 맥아더에게 커다란 오점을 남긴 셈이었다. 그에게 한국전쟁에서 두 번의 행운은 없었다.

이번 회는 1950년 10월 하순 원산 상륙작전과 그 시기 한국전쟁 NARA 소장 사진으로 엮었다.
 

▲ 1950. 10. 25. 미 해병대는 인민군의 별 저항 없이 원산 해안으로 상륙했다. ⓒ NARA

▲ 1950. 10. 25. 유엔군들이 소형함정을 타고 원산해안으로 상륙하고 있다. ⓒ NARA

▲ 1950. 10. 27. 서울시민들이 “미 해병대 고맙습니다”라는 플래카드 아래에서 행진을 하고 있다. ⓒ NARA

▲ 1950. 10. 27. 서울, 전화를 용케 피한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 NARA

▲ 1950. 10. 27. 서울시민과 학생들이 광화문에서 평화 행진을 하고 있다. ⓒ NARA

▲ 1950. 10. 30. 주먹밥을 배식받는 포로들. ⓒ NARA

▲ 1950. 10. 강원도 화천, 유엔군 병사가 초가집을 수색하고 있다. ⓒ NARA

▲ 1950. 10. 유엔군 병사들이 원산에 상륙코자 전투준비를 하고 있다. ⓒ NARA

▲ 1950. 10. 원산 앞바다를 뒤덮은 유엔군 함정들. ⓒ NARA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정영복 지음 <6.25전쟁사>를 참고하여 썼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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