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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국주의 '쇠말뚝' 미스터리

[반일 종족주의 ⑦] 쇠말뚝 논란이 한국인의 저열한 정신문화?

등록|2019.09.15 20:23 수정|2019.09.20 14:56
<반일 종족주의>가 논란입니다. 몇 회에 걸쳐 이 책의 문제점을 짚어봅니다.[편집자말]
 

▲ 북한 개성지구의 송악산, 천마산, 지네산에서 일제강점시기에 일제가 박은 쇠말뚝 6개가 발견됐다고 조선중앙TV가 10일 보도했다.2011.11.11 ⓒ 연합뉴스


일본이 한국의 민족정기를 끊어놓고자 전국 곳곳에 쇠말뚝을 박아놨다는 이야기가 있다. 김영삼 정부 때는 그런 쇠말뚝을 제거하는 작업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동일한 일이 그 후에도 있었다. 일례로, 전남 해남군에서는 2012년 6월 옥매산 정상에서 특수 합금으로 된 철봉이 발견됐고, 그해 8월 15일 그 쇠말뚝을 뽑아내는 지역 행사가 열렸다.

[관련기사] 광복절 해남 옥매산서 일제 '쇠말뚝' 제거

이에 대해 서울대 교수를 지낸 이영훈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사장을 비롯한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정색을 하며 반기를 들고 있다. 일제 식민지 덕분에 한국이 근대화됐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쇠말뚝에 대해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반일 종족주의> 제2장에서 이영훈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1995년 김영삼 정부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청와대까지 나서서 전국의 요처에 박힌 쇠말뚝을 뽑는 소동을 벌였습니다. 일제가 조선의 정기를 끊기 위해 박은 것이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실은 인근 마을이 또는 군부대가 무슨 필요에 의해서 박은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정부는 몇 사람의 풍수가가 지어낸 그 같은 주장에 따라 어처구니없는 소동을 벌였습니다."

쇠말뚝은 인근 마을이나 군부대가 박아 놓은 것이며, 일제가 박아놨다는 것은 풍수가들이 지어낸 거짓말이라는 게 이영훈 교수의 주장이다. 이 말을 하면서 그가 추천한 글이 있다. "이 책에 실린 김용삼의 쇠말뚝 소동에 관한 글에서 그 좋은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라고 그는 추천한다.

이영훈 교수가 추천한 글은 <반일 종족주의> 제14장 '쇠말뚝 신화의 진실' 편이다. 김용삼 전 <조선일보> 및 <월간 조선> 기자가 쓴 소논문이다.

김용삼 전 기자는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기획실장, 경기도 대변인 등을 지낸 뒤 지금은 이승만 학당(대표 이영훈) 교사로 활동 중이다. 2013년과 2015년에는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시장경제대상을 받기도 했다. 경기도 대변인 경력은 김문수 지사 때의 일이다.

김용삼 "일제 쇠말뚝은 모두 거짓말"

김용삼 기자가 담당한 <반일 종족주의> 제14장에는 "일제가 조선 땅에서 인물이 나는 것을 막으려고 전국 명산에 일부러 쇠말뚝을 박아 풍수 침략을 했다는 거 아닙니까?"라는 첫 문장에 뒤이어 아래와 같은 글이 나온다. 아래의 '이런 말'은 첫 문장을 가리킨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는 이런 말이 전설처럼 돌았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모두 거짓말입니다."

1958년 생으로 올해 61세인 김용삼 기자는 37세 때인 1995년경부터 쇠말뚝 취재를 벌였다. 그 당시를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일제가 박았다는 쇠말뚝이 모두 가짜라는 사실은 제가 <월간조선> 1995년 10월호에 썼던 '대한민국의 국교는 풍수도참인가?'라는 기사를 통해 밝혀냈습니다. 이 기사가 보도된 후 독립기념관이 전시하던 쇠말뚝을 치웠는데, 이 내용을 구로다 야스히로 기자가 취재해 <산케이신문> 사회면 톱기사로 보도하였습니다."

여기서 나온 '구로다 야스히로'는 지난 7월 5일 아침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일본이 박정희 정권에게 제공한 경제협력자금 3억 달러 덕분에 한국이 지금처럼 잘살게 됐다'고 주장한 구로다 가쓰히로와 동일인이다. 일제가 쇠말뚝을 박았다는 이야기는 모두 거짓이라는 김용삼 기자의 글을 토대로 일본 우익 기자가 자국에 기사를 발송했던 것이다.

김용삼 기자가 그렇게 확신 있게 말하는 것은 몇몇 증언과 진술이 있기 때문이다. 쇠말뚝 3개가 발견된 충북 단양군 영춘면을 방문한 경험을 토대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전 영춘면장이자 현지 주민인 우계홍 씨는 저에게 '그것은 일제가 박은 게 아니라 해방 후에 주민들이 북벽 아래에 뱃줄을 묶기 위해 박아놓은 것'이라고 증언했습니다."

위와 같이 일부 쇠말뚝이 아예 일본과 무관하다는 점을 보여준 뒤, 김용삼 기자는 쇠말뚝 제거 작업에 참여한 전문가들의 진술도 소개한다. 일제와 무관한 것으로 밝혀진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쇠말뚝에 관해 말하기 위해서다.
 
"쇠말뚝 제거 전문가로 알려진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의 구윤서 회장이나 서길수 교수도 전국에서 발견된 쇠말뚝이 일제의 풍수침략용 쇠말뚝이라는 (점은)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했습니다."

이렇게 '일부 쇠말뚝은 아예 일본과 무관하며, 나머지 쇠말뚝은 일제의 풍수 침략과 무관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낸 뒤 김용삼 기자는 강원도 영월군 남면을 취재한 결과를 소개한다. 그 나머지 쇠말뚝이 얼마나 허술한 과정을 통해 일제의 풍수 침략용으로 알려졌는가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 취재 결과가 <반일 종족주의> 제14장의 소제목 중 하나인 '주민 다수결에 의해 일제가 박은 쇠말뚝으로 결정' 밑에 나온다.
 
"제가 현장에 가서 확인을 해보니, 제거된 쇠말뚝은 길이가 볼펜보다 조금 큰 정도였습니다. 명당의 혈을 자르기 위해 박았다고 보기에는 크기가 너무 작았던 것이죠. 제보자들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박았다는 설과, 일제가 한일합방 후 박았다는 설 등 두 가지가 있었는데, 일제가 박았다는 설이 더 많아 제거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주민들의 다수결에 의해 '일제가 박은 쇠말뚝'으로 결정된 것입니다." 
 

▲ 2006년 9월 5일 서울시 강서구 개화산에서 발견된 쇠말뚝 2개 ⓒ 박정학


그가 이 단락을 넣은 것은 쇠말뚝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념이 허술하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주민 다수결에 의해 일제가 박은 쇠말뚝으로 결정'이란 소제목은 한국인들의 태도를 희화화하려는 의도를 반영한 것일 수 있다. 전문가의 감정도 아니고 주민들의 거수투표 등을 통해 일제 쇠말뚝으로 판정한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하지만 그가 서술한 위 인용문을 읽어보면, 다수결로 결정 한 게 아니라 '일제가 박았다'고 주장하는 의견이 더 많아서 그런 결론이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절대로 희화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김용삼 주장이 간과한 것

김용삼의 주장처럼 '일부 쇠말뚝은 아예 일본과 무관하며 나머지 쇠말뚝은 일제의 풍수 침략과 무관하다'면 풍수 침략과 무관한 쇠말뚝은 누가 왜 박아놓은 것일까?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김용삼 기자는 제14장 후반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 진실을 말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쇠말뚝이 박혀 있다고 제보가 들어온 지역을 조사한 결과, 측량을 위한 기점으로 활용되는 대삼각점, 소삼각점과 주민들이 쇠말뚝을 제보한 지역이 상당부분 일치하다는 사실이 발견됐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일제강점기 때인 1938년 21세 나이로 조선총독부의 토지 측량에 참여한 이봉득씨(강원도 화천군 거주)의 증언을 소개한다. 이봉득씨는 "측량을 위해 산 정상이나 봉우리 정상 등에 설치한 대삼각점을 일제가 혈을 자르기 위해 박은 쇠말뚝으로 오해했다"고 증언했다. 이봉득씨의 증언을 소개하는 방법으로 김용삼 기자는 쇠말뚝이 실은 측량용 삼각점이었다고 말한다.

김용삼 기자는 쇠말뚝이 발견된 곳들이 토지조사사업 때 박아놓은 삼각점의 위치와 상당부분 일치한다고 말했다. 삼각점은 토지측량을 할 때 박아놓는 표식이다. 삼각점이라 하여 삼각형 모양으로 된 표식은 아니다. 삼각 측량을 할 때 박아두는 표식이라 하여 그렇게 부른다.

삼각 측량이란 것은 예를 들면, 정면에 놓인 나무의 높이를 직접 재지 않고 자기 발끝(제1점)과 나무 밑동(제2점)까지의 거리와, 발끝과 나무 꼭대기(제3점)의 각도를 토대로 나무 높이를 간접적으로 재는 것을 말한다. 세 개의 점을 연결하는 삼각이 이 계산에 활용되므로 삼각 측량이라 부른다. 이런 삼각측량을 할 때 사용된다 하여 삼각점이라 부르는 것이다.

김용삼 기자의 말은, 전국적으로 발견되는 쇠말뚝은 일제가 민족정기 말살용이 아니라 토지 측량용으로 박아놓은 삼각점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일본에 의해 박힌 것임을 그 스스로도 인정한 것이다.

이영훈 교수는 김용삼 기자의 글을 읽어보라고 추천하면서 '쇠말뚝은 인근 마을이 또는 군부대가 무슨 필요에 의해서 박은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김용삼 기자의 글에서는 그것들이 토지조사사업 때 박혔음을 인정하는 대목이 나왔다.

일제 헌병대 문서에 '미신에 의한 인위적 훼손'

그런데 쇠말뚝 전문가로 자처하는 김용삼 기자는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결정적 자료는 소개하지 않거나 확인하지 않았다. 토지조사사업으로 사유지가 국유지로 넘어가는 것에 분개한 한국 농민들이 삼각점으로 박힌 쇠말뚝을 몰래 뽑아버리는 등의 방법으로 저항했다는 사실이 그의 글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 일이 실제 있었다는 점은 일본 헌병대의 내부 문서에서도 발견된다. 토지조사사업 중인 1914년 6월 17~21일 열린 헌병대 회의를 토대로 작성된 '삼각점표 및 표석의 보관에 관한 건'도 그런 문서 중 하나다. 운노 후쿠쥬 메이지대학 교수가 2006년 국내 학술지에 기고하고 이진호 지적박물관장이 번역한 '한국 측도사업과 조선 민중의 저항'이란 논문에 그 문서 내용이 소개돼 있다. 내용은 이렇다.
 
"근래 삼각점 점표와 표석을 훼손하는 자가 격증하였다. 즉 <표 1>과 같다. 1913년 중(中) 표석의 발굴 또는 훼손된 것 36개 소, 점표가 파손된 것 126개 소, 계 162개 소나 된다. 기타 심산유곡에 있어 감시자의 보고가 누락된 것을 합계하면, 매우 많은 수량이 웃돌 것 같다. 점표의 훼손은 폭풍·낙뢰 등으로 인한 것은 본디 적지 않지만, 고의 특히 미신에 의한 인위적 훼손으로 인한 것 역시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표석의 훼손 같은 것은 모두 고의로 한 것이 명확하다."
-대한지적사학회가 2006년 발행한 <측량과 지적> 제3호.
 
 

▲ 2006년 9월 5일 서울시 강서구 개화산에서 발견된 쇠말뚝 2개 ⓒ 박정학


한국인들은 토지조사사업을 위해 삼각점을 박아두는 일제에 저항하고자 '일본이 민족정기를 말살하려고 쇠말뚝을 박고 있다'는 소문을 퍼트리며 민족적 단결을 촉진했다. 그래서 심산유곡에까지 몰래 들어가 표식을 훼손하고 뽑아버리고 했던 것이다. 1913년 한 해만 해도 그런 일이 최소 162건이나 있었다.

땅을 지키려는 한국인들의 저항을 일본 헌병대는 '미신'으로만 폄하했던 것이다.

일제가 토지 측량을 위해 삼각점을 박는 걸 보면서 한국인들이 '민족정기를 말살하려고 쇠말뚝을 박고 있다'고 소문을 낸 이유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삶의 터전인 토지를 빼앗기는 상황에서 누구라도 '저놈들이 우리를 말살하려고 저런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토지조사사업은 한 사람의 인생 정도가 아니라 한 민족의 전체 삶이 걸린 중대 문제였다. 그로 인해 땅을 빼앗기고 삶의 터전을 잃게 된 한국 민중이 "토지를 측량하려고 일본인들이 쇠말뚝을 박고 있다"고 정확히 말하지 않고 "우리 혼을 말살하려고 저놈들이 쇠말뚝을 박고 있다"고 말했다고 비난하는 게 과연 타당한지 의문이다.

한민족의 땅을 빼앗기 위해 쇠말뚝을 박는 것(A)과 한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쇠말뚝을 박는 것(B)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중하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한국 농민들은 A와 같이 객관적으로 말하지 않고, B와 같이 주관적으로 말했을 뿐이다. A 역시 중대 범죄이고 B 역시 중대 범죄다. 어느 쪽으로 말하든 간에 일본의 약탈성은 희석되지 않는다.

한민족은 일제 식민지배의 피해자다. 분노와 억울함이 들끓다 보면, 피해자는 자기 체험을 다소 과장되게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런 것을 갖고 피해자를 욕할 수는 없다. 피해자를 그렇게 만든 가해자를 욕하지 않고, 상황을 다소 과장하는 피해자만 비난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김용삼 기자는 '한민족은 저열하다'고 평가한다. 이영훈 교수도 독도에 대한 한국인들의 대응을 비판하면서 "이런 저열한 정신세계로는 독도 문제에 대한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반일 종족주의> 제13장에서 말했다.

이영훈 교수가 쓴 '저열한'이란 표현을 똑같이 써가며 김용삼 기자는 제14장을 아래와 같이 끝맺음한다.
"쇠말뚝 신화는 한국인들의 닫힌 세계관, 비과학성, 미신성이 역사와 함께 오랜 반일감정과 결합하여 빚어낸 저열한 정신문화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 정신문화를 우리는 반일 종족주의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선진국 대열에 속하는 21세기의 한국인이 아직도 그런 종족주의의 세계에 갇혀 있어서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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