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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강에 모인 피란민들... '이 강을 건너야 하는데'

[박도 기자의 NARA 앨범 28] 1951년 4월의 전란 현장 Ⅰ

등록|2019.10.29 11:52 수정|2019.10.29 15:03

▲ 홍천, 유엔군이 북상하고 있다(1951. 4. 1.). ⓒ NARA


트루먼, 맥아더를 해임하다

1951년 3월 15일 유엔군은 서울을 재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부터 유엔군에겐 다시 38도선을 돌파하는 문제가 현안이 됐다. 하지만 유엔군은 1950년 10월의 북진처럼 무작정 밀고 올라가지 않았다.

유엔군은 38도선 북쪽의 임진강 - 연천 - 화천 저수지 - 양양으로 이어지는 '켄사스선(Kansas Line)'을 방어 지역으로 선정한 뒤, 더 이상 북진하지 않았다. 미국은 대한민국 정부의 북진 의지를 무시한 채 이 선을 넘으러 하지 않았다. 미국의 처지에서는 한국전쟁의 장기전에 휘말려 들지 않고 현 전선에서 정전을 원했던 것이다.

1951년 4월 11일 미 트루먼 대통령은 줄곧 확전을 종용하는 맥아더를 전격 해임시키고, 그 후임에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를 임명했다. 또한 새로운 미 제8군사령관에는 밴 플리트 중장을 임명했다. 이러한 조치는 더 이상 확전치 않고, 현 전선에서 정전하겠다는 미국의 강력한 의지 표명이었다.

이번 회는 1951년 4월 한국전쟁 NARA 소장 사진들로 엮어봤다.
 

▲ 영국군이 인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자 열차 선로에 폭파장치를 하고 있다(1951. 4. 10.). ⓒ NARA

   

▲ 영국군이 터널을 폭파하고자 터널 속에 숨어 있는 피란민들을 밖으로 대피시키고 있다(1951. 4. 10.). ⓒ NARA

  

▲ 두 명의 공산군이 유엔군 측으로 귀순하다(1951. 4. 12.) ⓒ NARA

  

▲ 한국의 노무자들이 군수 보급품을 전선으로 나르고 있다(1951. 4. 14.). ⓒ NARA

  

▲ 미 해군 전투기가 ‘원산폭격’을 하고 있다(1951. 4. 20.). ⓒ NARA

  

▲ 중국군 춘계 대공세로 피란길에 나선 사람들(1951. 4. 23.). ⓒ NARA

  

▲ 서울, 피란민들이 한강 백사장에 몰려 있다(1951. 4. 29.). ⓒ NARA

  

▲ 중국군의 춘계 대공세로 세 번째 피란을 떠나는 서울시민들(1951. 4. 29.). ⓒ NARA

  

▲ 피란민들이 한강을 건너기 위해 줄지어 서 있다(1951. 4. 29.).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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