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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남쪽이었던 개성은 왜 북쪽으로 넘어갔을까

[박도 기자의 NARA 앨범 34] 1951년 9, 10월의 전란 현장

등록|2019.11.18 11:07 수정|2019.11.18 11:55

▲ 판문점, 정전회담 실무자들이 지도를 보면서 군사분계선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1951. 10. 11.). ⓒ NARA


군사분계선

유엔군 폭격에 항의해 한동안 중단됐던 정전회담은 공산군 측의 제안으로 회담장소가 개성에서 판문점으로 바뀌었다. 군사분계선을 그으면서 개성을 두고 양측은 공방을 벌였다. 남측에서는 개성이 전쟁 이전에 남한에 속해 있었는 데다가 고려의 도읍지라는 역사 상징성, 인삼의 집산지라는 경제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공산군 측은 6.25전쟁에서 결코 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민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최소한 개성만큼은 자기네 판도에 넣고 싶었다.

이 문제로 어렵게 열린 정전회담이 다시 결렬할 듯하자, 유엔군 측은 개성을 양보했다. 그러면서 '현 접촉선을 변경함이 없이 군사분계선으로 한다'는 내용에 합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전협정은 이후 1년 8개월이나 더 끈 뒤에야 체결됐다.

이번 회는 1951년 9, 10월의 NARA 소장 사진으로 엮었다.
 

▲ 경기도 동두천, 국군의 통제 아래 주민들이 남부여대로 힘겹게 피란을 하고 있다(1951. 9. 11.). ⓒ NARA

   

▲ 원주 근교에 있는 한국군 임시 야전병원(1951. 9.). ⓒ NARA

   

▲ 남부여대의 피란민 행렬(1951. 9.). ⓒ NARA

   

▲ 원산 부근 상공을 초계비행하는 미 전투기(1951. 9.). ⓒ NARA

   

▲ 전주의 풍남문 앞을 한 유엔군이 지나고 있다(1951. 10. 4.). ⓒ NARA

   

▲ 대구, 인도의 의료부대원들이 한국인들을 치료하고 있다(1951. 10. 6.). ⓒ NARA

   

▲ 임시 포로수집소에 수용된 포로들(1951. 10. 11.). ⓒ NARA

   

▲ 포로들의 긴 행렬(1951. 10. 20.). ⓒ NARA

   

▲ 군부대가 산재해 있는 원주 근교(1951. 10. 22.). ⓒ NARA

   

▲ 포화에 나무도, 풀도 자라지 못한 802고지(1951. 10. 28.). ⓒ NARA

   

▲ 한국군 장교가 주민에게 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1951. 10. 30.). ⓒ NARA

   

▲ 한국 해군들이 미 군함 Tacoma 호에 승선하고자 부두에서 도열하고 있다(1951. 10.).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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