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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 3채와 주점... 판문점의 원래 이름은

[박도 기자의 NARA 앨범 38] 1952년 9~10월 전란 현장

등록|2019.12.03 12:03 수정|2019.12.03 12:22

▲ 하늘에서 내려다본 초기의 판문점 정전회담장 전경(가운데 회담장, 오른쪽 북측 사무실, 왼쪽 유엔군 측 사무실과 기자실)(1952. 9. 18.). ⓒ NARA


판문점의 유래

판문점의 옛 이름은 '널문리'였다. 판문(板門), 널빤지로 이뤄진 문과 판문교(板門橋), 즉 널문다리가 그곳에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피비린내 나는 한국전쟁으로 남북한에서 군인들과 민간인들은 무참히 죽어갔다. 1년이 지나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한다는 것은 양측 모두에게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소망이 유엔군(사실상 미군)과 조선인민군, 중국군 간에 싹이 텄다.

그래서 어렵게 1951년 7월 10일, 개성 내봉장에서 정전회담이 열렸지만 유엔군이 개성 일대를 폭격하자 공산군 측이 정전회담 결렬을 선언했다. 그러자 후끈 달아오른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이 인민군 측에 마당한 회담 장소를 물색해 통보해줄 것을 제의했다. 그러자 인민군은 1951년 10월 7일 "회담장소를 개성 동남쪽 송현리 서북쪽에 있는 널문리로 하자"라고 회답했다. 유엔군은 이에 동의했다.

당시 널문리에는 초가 세 채와 주점이 콩밭 옆에 있었다. 유엔군은 콩밭에다 정전회담장을 지었다. 유엔군, 중국군, 조선인민군이 당사자로 참여하는 이 정전회담의 장소는 영어, 중국어, 한글로 표현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널문리는 중국어로는 도저히 표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세 당사자는 널문리에서 널문, 즉 판문(板門)을 추출하고, 주점(酒店)에서 '점(店)'을 떼어내 '판문점(板門店)'으로 명명키로 했다. 1951년 10월 22일 유엔군과 공산군 측 연락장교들은 회담장 공식명칭을 '판문점'으로 정했다.

이번 회는 1952년 9~10월의 한국전쟁 NARA 소장 사진으로 엮었다.
 

▲ 1952. 9. 2. 개성에 있었던 인삼장으로 북한 측이 유엔군 정전회담 대표 휴게소로 제공했다(1952. 9. 2.). ⓒ NARA

   

▲ 미 공군 비행장 부근에서 풀을 베는 농부(1952. 9. 6. ). ⓒ NARA

         

▲ J. C. Slockbowe 하사가 찍은 사진으로 정전 회담 중인 판문점 외곽의 주차장(1952. 9. 17.). ⓒ NARA

   

▲ 모택동 주석(가운데)이 중국군의 사열을 받고 있다(1952. 10. 1.). ⓒ NARA

   

▲ 인천, 일본군이 버리고 간 낡은 잠수함이 있는 부둣가에서 땅에 떨어진 곡식을 줍는 아낙네(1952.10. 2.). ⓒ NARA

   

▲ 인천, 노동자들이 부두에서 하역을 하고 있다(1952.10. 2.). ⓒ NARA

   

▲ 인천, 바닷물이 빠진 개펄에서 하역하는 부두노동자들(1952.10. 2.). ⓒ NARA

   

▲ 두 해병대 병사가 2년 전의 인천상륙지점을 둘러보고 있다(1952.10. 2.). ⓒ NARA

   

▲ 치열한 고지전으로 초목도 자라지 못한 전투 현장 ⓒ NARA

덧붙이는 글 * [박도 기자의 NARA 앨범]은 45회로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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