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 대신 나무 위에 그림 그리는 화가
[인터뷰] 그림일기 '화담' 전 기획한 화가 이목을... 갤러리 서촌재에서 26일부터
▲ 화가 이목을우리나라에서 가장 작은 갤러리 갤러리 서촌재에서 '화담' 주제 전시 기획한 화가 이목을이다. ⓒ 김철관
"그림을 잘 그린다는 말이 제일 듣기 싫다. 그림이 좋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어린 시절 가족에게 의지하지 않고 생존권을 해결하며 그림에 애착을 가진 사람, 20여 년간 입산(入山)해 이산저산을 옮겨 다니며 자신의 살 집을 직접 짓고 인생을 성찰한 사람, 한쪽 눈은 실명이고 다른 쪽도 실명위기에 있으나 그림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 캔버스가 아니라 나무(도마) 위에 그림을 그린 사람, 초등학교 미술교과서에 그림을 올린 정도의 저명한 인사, 신문, 방송, 잡지 등 많은 언론에 조명된 작가, 50회 가까운 초대기획 개인전을 연 인물이 이목을(李木乙, 58) 화가이다.
"나에게 작업의 반은 목공이다. 그림 그리지 않고 목공 작업만 한다. 나무라는 것을 하나의 인격체라고 봤기 때문이다. 나무를 하나의 여자로 보는 것이다. 나무는 여자이고 나는 남자이고 이것이 타자와의 관계성이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나무와 조율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완전한 관계성을 맺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한다. 전위를 하고 섹스를 하듯 나무를 잘 다듬으면서 나무와 대화하고, 그리라고 할 때 그린다. '도마 위에 고등어'라는 작품도 그렇게 해 나온 작품이다."
이목을 화가는 오는 26일부터 우리나라 가장 작은 갤러리로 알려진 서울 종로구 옥인동 '서촌재'에서 그림일기 '화담(畵談)' 전시회를 연다. '서촌재'는 13평 남짓한 한옥 갤러리이다.
지난 22일 오후 6시 갤러리 서촌재에서 이목을 화가를 만났다. 그는 자신의 캐릭터를 직접 그려 휴대폰번호를 넣고 명함을 건넸다. 이날 오는 26일부터 오는 10월 27일까지 그림일기인 '화담(畵談)'을 주제로 개인전을 연다고 밝히기도 했다.
▲ 갤러리 서촌재지난 22일 오후 서울 옥인동 인왕산 자락 밑에 갤러리 서촌재에서 이목을 화가의 전시를 위한 작업들이 분주했다. ⓒ 김철관
먼저 이 화가는 이번 전시는 소셜미디어(SNS)에 매일 올린 일상의 그림을 글과 함께 전시를 한다는 말을 꺼냈다.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sns)에 매일 올렸던 그림과 글을 골라 전시를 한다. 매일매일 떠오른 일상의 삶(화담)을 주제로 했다. 그날그날 떠오르는 그림과 더불어 그림에 대한 설명글을 덧붙였다. 굳이 해석하면 그림일기이다. 시화(詩畫)전이라고 부르기는 곤란하고, 정확히 말하면 화시(畫詩)전라고 해야 옳다.
어쨌든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서 가장 위험한 작업을 했다.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작가라서 이런 종류의 전시를 하면 화단이나 문화계에서 비아냥거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질문에 답을 하고자 하는 작품들이기에, 어쩔 수 없이 운명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렇지 않으면 그림 그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과거 극사실주의 작품들로 유명세를 탔다. 15미터 길이의 대형작품인 '스마일(미소)'를 주제로 한 전시회도 했고, 나무상자를 짜 과일을 그리기도 했다. '안개'를 주제로 한 기획전시는 한번으로 끝냈다. 이는 더 진행하기 싫어서였다. 이 화가는 과거나 지금이나 '예술은 수단'이라는 전했다.
"나는 예술을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을 한 사람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제일 싫어할 것이다. 과거 20여 년 산에 머물면서 성찰을 해보니 그림 그리는 재주는 분명히 있었다. 지난 2000년도 산에서 내려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일단 나의 브랜드가 없는 상황에서는 절대로 나의 존재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림을 열심히 그렸다. 존재의 힘이 없는 상황에서 내가 아무리 좋은 생각과 좋은 뜻을 가져도 누가 들어줄 사람도 없고, 내가 아무리 주고자 해도 줄 수가 없다. 그런 부분에서 '이목을'이라는 이름 하나로 뭔가를 만들어야 되겠다고 생각해 작업을 했다."
▲ 전시작품이목을 화가가 나무 위에 그린 대표 작품 '고요-자반'이란 작품이다. ⓒ 김철관
그는 어떤 의도성을 가지고 그림을 그린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의 그릇을 볼 줄 모르면 자위만 하고 있는 꼴과 진배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자와의 '관계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동양 사람들은 작품을 보면서도 그냥 느껴버리지 질문이나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 서양 사람들은 뭔가 느끼면 풀리지 않은 숙제가 풀릴 때까지 '왜'라는 질문을 계속 던진다. 양파껍질 벗기듯이 서양철학이 그렇다. 하지만 동양철학은 다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지구라는 테두리에 존재해 사는데 동서양도 함께 라는 부분으로 봤을 때 관계성이다.
이번 전시작품들도 관계성과 연관된 사람의 얘기이지 그 이상은 없다. 나는 동양과 서양, 사람과 사람, 음과 양 등 다양한 관계성에 주목하고 있다. 그래서 타자가 어떻게 작품을 보느냐는 중요치 않다. 예를 들어 전시 작품인 '라면예찬'은 누구나 좋아하는 라면과 나와의 관계성을 표현한 작품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한쪽 눈이 실명이었다. 그래서 한쪽 눈으로 작업을 해왔다. 이제는 다른 한쪽도 실명 위기에 있다. 그가 항상 끼고 있는 검은 안경은 폼으로 끼는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도 밝히지 못한 이런 사연들을 몇 년 전부터 밝혀왔다고도 했다.
"그림을 그리고 유명세를 타고 있을 때인 2010년 마지막 전시를 했다. 그리고 한 호텔에서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는 기자회견을 했다. 한 눈은 실명이었고 그나마 지탱할 수 있는 한 쪽 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눈이 다 보이지 않으니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판단에서 마지막 졸업 작품을 하게 됐다. 그리는 것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해 마지막 전시를 하고 막상 기자회견을 끝내니 내 인생이 끝나는 것 같았다.
열심히 그려왔던 그림을 여기서 끝낸다고 생각하니 절망감이 들었다. 그 이전에도 정신분열증, 반쪽 마비 등으로 몸과 마음이 다 망가져 그림을 그리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극복해 그림을 다시 그린 전력을 생각했다. 또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 멍 때리기이번 전시 대표 작품인 멍 때리기 그림과 글이다. ⓒ 김철관
그럼 그가 이를 어떻게 이를 극복하면서 다시 그림을 그렸을까.
"위기 속에 기회가 있다는 말이 있다. 이런 절명의 위기에도 그림을 그리겠다는 끈을 놓지 않았다. 눈이 투영되지 않으니 사실은 답이 없었다.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여기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그림 순례를 한다든가, 책을 가지고 탐독을 한다든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언뜻 '고통은 하나의 나의 보약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제로(zero)로부터 시작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 휴대폰을 사 이모티콘에 웃는 갈매기를 보고 깨달은 그림이 '스마일'이란 작품이다. ⓒ 이목을
교보문고에 매일 출근해 글씨가 잘 보이지 않으니 한두 살짜리 아가들이 공부하는 그림책 교과서를 펼쳐, 도형을 보니 그 정도는 눈에 투영이 됐다. 그리고 매일 서점으로 출근해 여러 도형들을 즐겁게 그렸다. 그리고 휴대폰을 사 이모티콘에 웃는 갈매기를 보고 깨달은 그림이 '스마일'이란 작품이다. 스마일 그림은 남들에게는 웃기게 보일지 모르지만, 당시 나에게는 정말 대단한 작업이었다.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그렸기 때문이다."
그가 눈이 나빠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선언한 지 1년 만(2011년)에 스마일 작품을 선보였다. 당시 기자회견을 했을 때 그는 '내가 다시 운이 닿아 그림을 다시 그리게 되면 봉이 김선달이 돼 나오겠다'고 했었다는 것이다.
"눈썹 두 개와 입이 하나인 세 줄을 그으니 스마일 작품이 나왔다. 진짜 봉이 김선달이 돼 나왔다. 그래서 스마일 작품으로 전시를 했다. '화가 이목을이 쇼했다', '이것도 그림이냐', '발가락에 끼어서도 이런 그림 그린다', '저것도 그림이라고, 누가 사겠나' 등 모든 사람들이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그런 말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내 자신하고의 문제였으니까. 기적이 일어났다. 모든 스마일 작품이 비싸게 다 팔렸다. 이후 스마일이라는 의제로 강연도 다니고, 방송도 출연을 하고 퍼포먼스도 하고 많은 사람들과 스마일(미소) 운동도 전개했다."
경기도 양평에 있는 그의 작업실 벽에는 '고통은 하나의 나의 보약이다'라는 글 밑에 한 줄을 더 새겼다. '웃음은 하늘이 나에게 준 선물이다'이라고. 그의 작업실은 얼마 전까지도 '이목을이가 그림으로 공부하는 곳'이라고 써 놓았다. 왜냐하면 아직도 화가가 꿈일 뿐이라는 이유에서이다. 남들은 자신을 화가라고 부르지만 자신이 느끼는 진정한 화가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매일매일 그림이 다르고 매일매일 생각이 다른 자유로운 그림이 탄생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화가의 상, 그 꿈을 이루었다. 그래서 최근 작업실에 '화자성지(畵自成地)'라고 크게 써 놓았다. '내 스스로 화가가 됐고, 화가가 된 터'라는 의미이다.
"부모에게 태어나 한 푼도 받지 않고 살아왔다. 지금까지도 누구의 도움을 받는 적이 없다. 그냥 혼자 인생을 살아왔다. 세상 도움을 받아보겠다고 생각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 소셜미디어(SNS)에 올려 세상과 소통을 했다. 매일 그려 글과 함께 하루 한 점씩 올린다는 게 힘든 작업이지만 너무너무 행복했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내 자신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어갔다.
작품이 올라오는 것을 기다리는 사람들 때문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기를 쓰듯이 계속하게 됐다. 역설적이지만 기다리는 사람들, 즉 남(세상)의 도움을 받는 사람이 됐다. 그래서 요즘 너무 행복하다. 내 자신에게 선물을 주고 있는 느낌이라는 생각에서이다. 드디어 화가가 됐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꿈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행복한가. 태어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드디어 꿈을 이루었는데 얼마나 행복하겠나."
그런데 이상한 일이 또 일어났다는 것이다. 여기저기 사람들한테 연락이 오고, 책을 내자고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이런 현상 또한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고.
▲ 명함화가 이목을이 직접 건넨 명함이다. ⓒ 김철관
그의 전시 작품은 오는 26일부터 서울시 종로구 옥인동 갤러리 서촌재에서 매일매일 그린 그림과 글, 26점이 전시된다.
화가 이목을((李木乙)은 경북영천에서 태어나 영남대 미술대학을 졸업했다. 지금까지 기획초대개인전 47회와 43회에 걸친 국·내외아트페어전에 작품을 출품했다. 그의 작품은 초등학교(금성사), 중학교(미진사), 고등학교(교학사) 등 미술교과서에 수록됐다.
그와 그의 작품은 신문과 방송, 잡지 등에 다양하게 소개됐다. 저서로 <청춘만담>이 있다. 나무 위에 앉아 있던 새가 갑자기 자신의 가슴으로 투영되는 경험 때문에 지은 이름이 목을(木乙)이다. '나무위의 새'라는 뜻이고 일명 '솟대'를 지칭한다.
한편 갤러리 서촌재(관장 김남진)는 서울 종로구 서촌 인왕산 수성동계곡 아래 담벼락에 붙은 13평 남짓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작은 한옥 갤러리이다. 소박하고 독특한 작품을 고집한 작가들을 찾아 전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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