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시 본래의 순간성으로 회귀
[디카시로 여는 세상 시즌3 - 고향에 사는 즐거움 39] 권수진 디카시 '빨래집게'
▲ 권수진 ⓒ 이상옥
건물과 건물 사이
전깃줄에 일렬횡대로 사뿐히 내려앉은
빨래집게들, 바람에 날리지 않게
내 마음 여기 걸어 두었으니
꽉 붙잡고 있으렴
- 권수진 디카시 <빨래집게>
2019 이병주국제문학제 제5회 디카시공모전 시상식이 29일 오전 10시 이병주문학관에서 있었다. 최근에는 디카시공모전이 여러 문학제에서 시행되고 있지만, 권위 있는 문학제의 디카시공모전 첫 출발은 이병주하동국제문학제에서부터이다.
역대 이병주하동국제문학제 디카시공모전 대상 작품들은 디카시의 정체성을 모두 잘 드러내고 있다. 올해의 대상작 역시 그렇다. 디카시는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감흥을 포착하고 스마트폰 내장 디카로 찍고 그 느낌이 날아가기 전에 짧게 언술하여 SNS를 통해 실시간 쌍방향 소통을 지향한다. 그런 측면에서도 디카시는 극순간 멀티 언어 예술이다.
디카시의 영상과 문자는 문자 자체로는 완결된 시로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영상도 그 자체로는 사진예술이 아닌 영상기호에 불과한 것이다. 이 둘이 한 덩어리가 되어 시가 되는 것이 디카시다. 2019 이병주국제문학제 제5회 디카시공모전 대상작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디카시에서 건물 사이 빨랫줄에 앉은 제비가 마치 빨래집게 모양으로 줄지어 앉아 있다. 시인은 그 광경에서 시적 감흥을 느꼈다. 건물 사이를 지나가는 전깃줄은 빨랫줄로 인식된다. 아마 그 순간 우중충한 시인의 마음을 꺼내 걸고 싶지 않았겠는가. 우울한 마음을 햇살에 말려서 환해지고 싶었을 것이다.
"건물과 건물 사이/ 전깃줄에 일렬횡대로 사뿐히 내려앉은/ 빨래집게들, 바람에 날리지 않게/ 내 마음 여기 걸어 두었으니/ 꽉 붙잡고 있으렴"이라고 순간 언술한다. 이 언술에는 제비 얘기는 한 마디도 없다. 그건 영상이 말하기 때문이다. 영상을 메타포하여 빨래집게라고 말한 뿐이다. 이로써 영상과 문자는 한 몸, 하나의 텍스트가 된다. 이 둘은 분리될 수가 없다.
이 디카시에서 문자 자체만으로는 시적 완결성을 지닐 수가 없다. 영상과 문자가 한 덩어리가 되어야 시가 되는 구조다. 이것이 디카시의 본질로 사진에 어울리는 시를 엮는 포토포엠과는 다른 양식임을 알 수 있다. 이 디카시는 문자시의 미의식과도 다르다. 극순간의 단일 이미지가 지배적이다. 건물 사이 전깃줄에 앉은 제비를 보며, 순간 엉클어진 혹은 우울한 마음을 걸어두고 싶다는 지배적 이미지가 섬광처럼 반짝이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자아와 세계의 순간적 동일성의 정서 표출로 그친다. 시가 순간 예술이라는 본질에 닿는 것만으로 족하다고 보는 것이 디카시다. 오늘의 시가 복잡다기한 현실을 담아야 하기에 길어지고 산문화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인지 모른다. 디카시는 오늘의 시가 놓치고 있는 서정시 본래의 순간성으로 회귀하는 것만으로도 존재 의의가 있다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디카시는 필자가 2004년 처음 사용한 신조어로, 디지털카메라로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형상을 포착하여 찍은 영상과 함께 문자를 한 덩어리의 시로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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