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즐거움을 되찾아야 하는 순간
[물공포증인데 스쿠버 다이빙] 가끔 외도는 필요하다
이집트 다합(Dahab)에서 스쿠버다이빙 오픈워터(OpenWater)부터 다이브마스터(DM) 자격증을 취득하기까지의 과정입니다. 물 공포증이 있었던 필자가 2018년 12월 27일부터 2월 19일(55일)까지의 생생한 기록입니다. - 기자말
1. 즐거움의 필요성
아무리 힘들어도 오전 6시 10분이면 숙소를 나서서 달린다. 익숙해진 거리, 인사를 나누게 된 몇 사람들, 나를 반겨주는 개. 조물주가 큰 붓질을 한 것처럼 마티르 강한 새빨간 해무리가 옆으로 펼쳐져 따라오기도, 수묵화 같은 잿빛이 잔잔하게 물들어 가는 하늘과 바다가 그려지기도 한다.
달리다가도 해가 떠오르면 뛰는 것을 멈춘다. 그곳을 향해 양팔을 벌리고는 찬란하고 신선하고 고귀한 기운을 들이마신다. 그 싱싱함에 오늘을 살 기운을 얻어 파닥거린다.
어떤 날은 괜스레 가슴이 뭉클해서 슬쩍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블루투스 이어폰에서 흘러나온 음악이 슬퍼서일까. 힘듦과 서운함 혹은 깊은 회한 같은 것일까.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위로일까. 가슴이 부풀어 올라 되돌아갈 때는 자꾸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해는 구름 속에 가려 있고 해무리만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해를 볼 수가 없었다.
"꼭, 교육생 한 명 더 데리고 가는 것 같아요? 지금 몇 깡이세요?"
그날 오전 다이빙이 끝났을 때 줄리아가 내게 물어왔다. 내가 35깡이라고 하자 "50깡까지는 봐줄게요. 그동안 규 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 하는지 익히셔야 해요."라고 말했다.
언제부터였던가, 다이빙이 커다란 짐 가방처럼 여겨지던 것이. 강사나 교육생들 눈치 보기에 바빴다. 실수 하나라도 하면 어떤 잔소리를 듣게 될지, 내심 고민했다. 조나단과 줄리아는 대체적으로 과묵했다. 나는 나를 자책했다. 주눅 들다 보니 계속 실수만 되풀이했다. 어떻게 해서든 여유를 가져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존감이 바닥을 칠 것 같았다.
나는 이메드와 처음 펀 다이빙을 갔을 때의 행복함을 떠올렸다. 그 순수한 즐거움을 되찾아야 했다.
2. 기회
기회가 우연하게 왔다.
다합에 50개가 넘는 다이브 센터가 있고 1년에 한 번씩 감사를 받는다. 다른 때는 형식적인 반면 금년은 아주 까다롭게 한다면서 줄리아가 뒤에 말해주었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샴엘 셰이크에 있는 어마어마한 부자가 이곳 다이브 센터를 다 집어삼키고 싶어서 로비를 한다고 했다. 탈락한 곳도 몇 군데 있었다.
내가 훈련받는 센터도 바싹 긴장하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서류 정리하느라 정신없어 보였다. 한 가지 새롭게 안 사실은(규는 내가 몰랐던 정보들을 알려주곤 했다) 현지인 가이드를 보호하기 위해서 현지인 강사 고용만 합법이란다. 다합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인 강사들은 불법 고용인 셈이다. 하지만 다이버가 되려는 한국인들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안전 교육을 위해서는 정확한 의사소통이 기본이니깐 말이다.
드디어 감사받는 날이 왔다. 한국인 강사는 감사원들의 눈에 띄지 말아야 했다. 다이빙 교육을 펀 다이빙으로 보여야 했다. 교육할 장소를 앞바다가 아니라 펀 다이빙처럼 20~30분 차를 타고 가야 했다.
감사가 있는 날 규는 펀 다이빙을 가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J는 DMT 훈련기간을 한 달로 잡고 왔다. 셋 중에서 제일 늦게 왔으면서도 제일 일찍 귀국한다. 특별히 조나단이 J에게 훈련을 몰아서 시키고 있었다. J는 조나단 어드밴스 교육생을 따라서 사우스라는 펀 다이빙 포인트로 따라가기로 했다. 하지만 나한테는 하루 쉬어라고 했다(이 말을 들었을 때 배제되고 있다는 생각에 엄청 서운했지만 속내를 말하지는 않았다).
쉬는 날도 어김없이 조깅을 했다. 다른 날과 달리 일찍 센터로 출근할 필요가 없어서 쇼핑 골목으로 들어섰다. 영업 전이라 무덤처럼 조용한 곳을 한 시간 넘게 둘러봤다. 숙소로 귀가하는 내 눈에 오르카 다이브 센터가 들어왔다. 그때 내 머리를 딱, 치는 것이 있었다.
왜 여태 몰랐을까. 나도 여느 여행객처럼 펀 다이빙을 갈 수 있었다. 훈련받는 곳에서는 펀 다이빙이 공짜라지만 보내주지 않았다. 그깟 돈이야 내면 되었다. 정말 오랜만에 사람대접(?)을 받고 싶었다(그 당시 내 메모장에 이런 공식을 적어 놓고 있었다. DMT= 노예, 펀 다이빙 손님 = 주인님의 손님, 조나단과 줄리아 = 주인님).
실은 DMT들은 주말 상관없이 매일 교육 다이빙을 따라다녀야 했다. 빠듯한 훈련 일정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내게 하루 휴가를 허락했다. 청소를 하던 오르카 다이브 센터 직원은 마침 한국인 2명이 펀 다이빙을 간다고 했다. 합류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외도를 하게 된다.
3. 외도
우습게도 배운 게 도둑질이었다. 손님으로 떳떳하게 대접만 받자고 했으면서도 나는 내 장비를 다 세팅한 뒤에 오르카 펀 다이빙 손님에게 장비 세팅을 점검해주고 있었다. 알고 봤더니 그들은 펀 다이빙 손님이 아니라 어드밴스 교육생이었다. 마지막 교육 다이빙 두 번은 펀 다이빙처럼 Canyon과 Bluehole에서 훈련을 한다고 했다(나는 이 교육 프로그램이 앞바다에서만 하는 것보다 낫다고 규에게 말했다.
규는 반론을 제시했다. 아직 제대로 실력도 안 된 교육생이 블루홀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 보기 좋지 않다고. 하지만 내 의견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조나단과는 다른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현지인 강사에게 직접 교육받는 그들은 교육비도 조금 더 싸게 냈다. 하지만 그들이 영어를 유창하게 못해서 그런지 철저한 교육 브리핑은 받지 못한 듯했다. 버디 체크 등을 내가 해주면서 왜 그런지 그들의 질문에 상세하게 설명해주어야 했다.
오랜만에 센터 앞바다를 떠난 그곳은 햇살도 물살도 내 편이었다. 물속에서 어떤 눈치도 볼 필요 없이 다이빙만 즐기면 금상첨화였다.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백(Back)을 서서 그들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여차 하면 곧바로 달려가서 구해줄 것처럼 말이다.
다이빙이 끝난 레스토랑에서도 함부로 돌아다니지 못했다. 내가 훈련 받고 있는 센터 직원에게 들킬 것 같았다. 죄인 아닌 죄인이 되었다.
다음날 센터 출근해서 줄리아가 이끄는 교육생들을 따라 오전 다이빙을 끝냈다. 오랜만에 그녀가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어디서 과외받고 왔어요? 실력이 확, 늘었어요?"
그 순간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나는 움찔했다.
▲ 길거리 개와 교감하고 있는 남자 ⓒ 차노휘
1. 즐거움의 필요성
달리다가도 해가 떠오르면 뛰는 것을 멈춘다. 그곳을 향해 양팔을 벌리고는 찬란하고 신선하고 고귀한 기운을 들이마신다. 그 싱싱함에 오늘을 살 기운을 얻어 파닥거린다.
어떤 날은 괜스레 가슴이 뭉클해서 슬쩍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블루투스 이어폰에서 흘러나온 음악이 슬퍼서일까. 힘듦과 서운함 혹은 깊은 회한 같은 것일까.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위로일까. 가슴이 부풀어 올라 되돌아갈 때는 자꾸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해는 구름 속에 가려 있고 해무리만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해를 볼 수가 없었다.
"꼭, 교육생 한 명 더 데리고 가는 것 같아요? 지금 몇 깡이세요?"
그날 오전 다이빙이 끝났을 때 줄리아가 내게 물어왔다. 내가 35깡이라고 하자 "50깡까지는 봐줄게요. 그동안 규 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 하는지 익히셔야 해요."라고 말했다.
언제부터였던가, 다이빙이 커다란 짐 가방처럼 여겨지던 것이. 강사나 교육생들 눈치 보기에 바빴다. 실수 하나라도 하면 어떤 잔소리를 듣게 될지, 내심 고민했다. 조나단과 줄리아는 대체적으로 과묵했다. 나는 나를 자책했다. 주눅 들다 보니 계속 실수만 되풀이했다. 어떻게 해서든 여유를 가져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존감이 바닥을 칠 것 같았다.
나는 이메드와 처음 펀 다이빙을 갔을 때의 행복함을 떠올렸다. 그 순수한 즐거움을 되찾아야 했다.
2. 기회
▲ 닭고기 크림 스프가 있는 카페 ⓒ 차노휘
기회가 우연하게 왔다.
다합에 50개가 넘는 다이브 센터가 있고 1년에 한 번씩 감사를 받는다. 다른 때는 형식적인 반면 금년은 아주 까다롭게 한다면서 줄리아가 뒤에 말해주었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샴엘 셰이크에 있는 어마어마한 부자가 이곳 다이브 센터를 다 집어삼키고 싶어서 로비를 한다고 했다. 탈락한 곳도 몇 군데 있었다.
내가 훈련받는 센터도 바싹 긴장하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서류 정리하느라 정신없어 보였다. 한 가지 새롭게 안 사실은(규는 내가 몰랐던 정보들을 알려주곤 했다) 현지인 가이드를 보호하기 위해서 현지인 강사 고용만 합법이란다. 다합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인 강사들은 불법 고용인 셈이다. 하지만 다이버가 되려는 한국인들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안전 교육을 위해서는 정확한 의사소통이 기본이니깐 말이다.
드디어 감사받는 날이 왔다. 한국인 강사는 감사원들의 눈에 띄지 말아야 했다. 다이빙 교육을 펀 다이빙으로 보여야 했다. 교육할 장소를 앞바다가 아니라 펀 다이빙처럼 20~30분 차를 타고 가야 했다.
감사가 있는 날 규는 펀 다이빙을 가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J는 DMT 훈련기간을 한 달로 잡고 왔다. 셋 중에서 제일 늦게 왔으면서도 제일 일찍 귀국한다. 특별히 조나단이 J에게 훈련을 몰아서 시키고 있었다. J는 조나단 어드밴스 교육생을 따라서 사우스라는 펀 다이빙 포인트로 따라가기로 했다. 하지만 나한테는 하루 쉬어라고 했다(이 말을 들었을 때 배제되고 있다는 생각에 엄청 서운했지만 속내를 말하지는 않았다).
▲ 오르카 다이브 센터가 있는 거리 ⓒ 차노휘
쉬는 날도 어김없이 조깅을 했다. 다른 날과 달리 일찍 센터로 출근할 필요가 없어서 쇼핑 골목으로 들어섰다. 영업 전이라 무덤처럼 조용한 곳을 한 시간 넘게 둘러봤다. 숙소로 귀가하는 내 눈에 오르카 다이브 센터가 들어왔다. 그때 내 머리를 딱, 치는 것이 있었다.
왜 여태 몰랐을까. 나도 여느 여행객처럼 펀 다이빙을 갈 수 있었다. 훈련받는 곳에서는 펀 다이빙이 공짜라지만 보내주지 않았다. 그깟 돈이야 내면 되었다. 정말 오랜만에 사람대접(?)을 받고 싶었다(그 당시 내 메모장에 이런 공식을 적어 놓고 있었다. DMT= 노예, 펀 다이빙 손님 = 주인님의 손님, 조나단과 줄리아 = 주인님).
실은 DMT들은 주말 상관없이 매일 교육 다이빙을 따라다녀야 했다. 빠듯한 훈련 일정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내게 하루 휴가를 허락했다. 청소를 하던 오르카 다이브 센터 직원은 마침 한국인 2명이 펀 다이빙을 간다고 했다. 합류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외도를 하게 된다.
3. 외도
▲ 오르카 펀 다이빙 ⓒ 차노휘
우습게도 배운 게 도둑질이었다. 손님으로 떳떳하게 대접만 받자고 했으면서도 나는 내 장비를 다 세팅한 뒤에 오르카 펀 다이빙 손님에게 장비 세팅을 점검해주고 있었다. 알고 봤더니 그들은 펀 다이빙 손님이 아니라 어드밴스 교육생이었다. 마지막 교육 다이빙 두 번은 펀 다이빙처럼 Canyon과 Bluehole에서 훈련을 한다고 했다(나는 이 교육 프로그램이 앞바다에서만 하는 것보다 낫다고 규에게 말했다.
규는 반론을 제시했다. 아직 제대로 실력도 안 된 교육생이 블루홀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 보기 좋지 않다고. 하지만 내 의견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조나단과는 다른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현지인 강사에게 직접 교육받는 그들은 교육비도 조금 더 싸게 냈다. 하지만 그들이 영어를 유창하게 못해서 그런지 철저한 교육 브리핑은 받지 못한 듯했다. 버디 체크 등을 내가 해주면서 왜 그런지 그들의 질문에 상세하게 설명해주어야 했다.
▲ Canyon 34m 협곡 아래로 내려가기 ⓒ 차노휘
오랜만에 센터 앞바다를 떠난 그곳은 햇살도 물살도 내 편이었다. 물속에서 어떤 눈치도 볼 필요 없이 다이빙만 즐기면 금상첨화였다.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백(Back)을 서서 그들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여차 하면 곧바로 달려가서 구해줄 것처럼 말이다.
다이빙이 끝난 레스토랑에서도 함부로 돌아다니지 못했다. 내가 훈련 받고 있는 센터 직원에게 들킬 것 같았다. 죄인 아닌 죄인이 되었다.
다음날 센터 출근해서 줄리아가 이끄는 교육생들을 따라 오전 다이빙을 끝냈다. 오랜만에 그녀가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어디서 과외받고 왔어요? 실력이 확, 늘었어요?"
그 순간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나는 움찔했다.
▲ 다합의 아침 ⓒ 차노휘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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