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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이 보낸 돈뭉치, 한도 없는 골드카드... 이들의 대처법

[인터뷰] 삼성 해고노동자 김용희·이재용, 우리가 몰랐던 그들의 이야기

등록|2019.10.03 20:23 수정|2019.10.08 10:02
삼성에서 노조를 결성하려다 김용희는 1997년에, 이재용은 1999년에 해고됐다. 9월 17일은 김용희가 서울 강남역 사거리 20여 미터 CCTV 철탑 위에서 고공농성을 시작한 지 100일을 맞은 날이다.(10월 2일 기준 114일째 고공농성 중). 이재용은 강남역 8번 출구에 천막 거점을 세워놓고 김용희를 지원하고 있다. 두 사람은 각각 다른 사업장에서 일했다. 그런데 삼성에서 노조를 결성하려는 노동자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거의 똑같았다. 납치, 테러, 간첩 누명, 성폭행 누명 등이다.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고 왜 20년이 넘게 삼성과 싸우고 있는지 들여다본다. 두 사람과의 인터뷰는 농성 100일째를 맞은 9월 17일 진행됐다. - 기자말
 

▲ 고공농성을 하다가 찍은 셀카. 사진 제공- 김용희 ⓒ 김용희


폭행, 감금 그리고... 삼성 해고자 김용희


"어릴 땐 잘살았어요. 할아버지가 한의사였거든요. 고향인 무안에서는 꽤 부자였죠. 아버지는 경찰 간부였어요."
 

김용희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목포로 이사를 했다. 당시 정부는 영산강 하구를 막아 농경지를 만들었다. 김용희의 아버지는 10년 동안 경작을 하는 조건으로 논 2만 평을 분양받았고, 남은 돈으로 지하수개발 회사를 차렸다. 그때만 해도 그의 집안은 풍족했다.

김용희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박정희 독재정권의 실체를 알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학생운동을 했다. 그는 삼대독자라 군대 면제 대상자였지만 데모하다 잡혀 강제로 군대에 끌려갔다. 얼마 안 있어 5·18 광주항쟁이 일어났다.

"진압 작전이 완료되자 곧바로 의가사 제대했어요. 아마 삼대독자였기 때문일 거예요."
  

김용희는 1982년 3월에 한국교육개발원에 들어갔다. 강북 빈민촌과 강남 부자 동네를 오가며 유아교육 실태를 조사하는 일이었다. 석 달 다니고 있는데 1982년 6월에 삼성전자에서 근무하고 있는 친구가 놀러 오라고 했다.

"점심때 만났어요. 갔더니 너무 멋진 거라. 정문에서 안을 들여다보니까 나무들이 많고 잔디 위에서 책도 읽고 나무 그늘 밑에서 이야기 나누는 모습들이 부러웠어요."
 

김용희는 한국교육개발원을 그만두고 그해 12월, 창원공단에 있는 삼성항공에 입사한다. 꿈의 직장은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는 관리자로 입사해 품질 교육을 맡았다. 입사한 지 며칠 되지 않은 어느 날 비상계획부에서 오라고 했다.

"갔더니 계획부장이라는 사람이 욕부터 해요. '야, 이 새끼야. 왜 직장예비군 편성 카드를 제출 안 해?' 하는 거예요. 황당하잖아요."
 

김용희는 "아, 왜 욕부터 해?" 하고 항의를 하다가 직원에게 끌려나갔다. 알고 보니 계획부장이 당시 국방부 장관인지 하는 사람의 동생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회사에 밉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음 해 또 회사에 항의할 일이 생겼다. 1983년 설날에 회사에서는 통근 버스로 직원들을 고향으로 보낸다.

"통근 버스가 36대 있었어요. 그런데 경상도 웬만한 데는 통근버스를 다 보내 주는데 전라도는 한 대도 없더라고. 너무 기가 막힌 거라."
 

김용희는 회사에 가서 따졌다.

"'경상도나 서울은 다 귀향 버스 주면서 전라도는 왜 한 대도 없냐' 그랬더니 인사부장이 열 받았는지 3600명 인사 카드를 저한테 집어 던지는 거예요. '전라도 한번 찾아봐라'하면서."

김용희는 오기가 나서 인사 기록 카드를 뒤졌다.

"아홉 명인가 나오더라고. 3600명 중에 아홉 명. 인사부장한테 그랬죠. '9명 가지고 버스 배차해 달라는 건 염치없는 짓이다. 하지만 버스표 정도는 구해 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했죠."

결국 회사는 전라도 쪽에 사는 노동자들에게는 귀향 버스 대신 표를 끊어줬다. 김용희는 그때부터 노동조합을 생각했다. 당시 삼성은 노조가 없고 노사협의회만 있었다. 노사협의회 위원은 간접선거로 30명 이상의 동의를 받아서 제출하면 된다. 어렵게 동의를 받고 노사협의회 위원이 됐다.

"그때부터 회사가 노골적으로 괴롭히는 거라. 인사과 애들 시켜서 싸움 붙이고 '전라도 새끼' 어쩌고저쩌고하면서. 화장실에서 싸움도 많이 했어요. 더 다니고 싶지 않더라고요."
 

김용희는 1984년부터 아내한테 죽어도 회사 다니기 싫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다. 아내는 반대했다. '월급과 보너스가 많고 사원아파트 등 복지가 잘 돼 있는데 왜 그만두려고 하느냐'는 거였다. 김용희는 참다 참다 자살을 기도했다.

"제초제를 먹었는데 3일 만에 깨어났대요."
 

김용희는 치료를 받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참 바보다. 다시 살았으니까 뭔가 해야 되겠구나. 이 직장 문화를, 잘못된 구조를 바꿔 나가야 되겠다. 나 자신과 약속한 거죠. 그때부터 노사협의회 활동을 열심히 했죠."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났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끌어냈던 6월항쟁 이후 노동자들은 봇물 터지듯 노조를 설립했다. 울산에서 시작된 태풍은 마산과 창원으로 이어졌다. 부산·울산·경남지역 첫 노동자 조직인 마창노련(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이 탄생했다.(이는 나중에 민주노총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안 된다'는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의 유지에서 비롯된 삼성의 무노조 경영 기조는 굳건했다.

"1987년도부터 우리가 노조 만들려고 했는데 노조 설립 신고서를 가지고 시청에 가면 벌써 가짜노조를 다 만들어 놓았더라고요. 삼성 직원들이 아예 각 관공서에 상주를 해요."
 

김용희는 마창노련에 가입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단위사업장 노동조합으로 못 만드니까 삼성그룹 경남지역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했다. 이때 김용희는 추진본부장으로 추대를 받았다.

"그게 1990년 6월인데, 7월에 각목 테러당하고 12월에 과장, 부장한테 15일간 납치당했어요. 그리고 1991년 3월 1일에 조이라는 여자애가..."


너무 많은 사건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먼저 각목 테러 사건은 이렇다. 노조 활동에 관심 있는 직원들하고 술 한잔한 뒤 헤어졌는데 서른 중반쯤 되는 남자 다섯 명이 다가왔다. 이후 "이 개자식!" 하는 소리와 함께 정신을 잃었다.

"다음 날 눈뜨니까 창원동서병원 중환자실이었어요. 집사람이 옆에 있었고 머리가 깨질 듯 아팠어요. 누군가 풀숲에 소변보러 갔다가 쓰러져 있는 걸 보고 신고했대요. 20일 입원했었어요."
 

다시 회사로 나온 뒤 노조 설립 활동을 계속하자 어느 날 염 부장과 하 과장이 김용희를 차에 태워 대구에 있는 호텔 방으로 데려갔다. 그들은 김용희에게 노조 설립을 포기하라고 회유하고 협박했다. 그러나 그는 넘어가지 않았다.

"그다음 대흥사로 갔죠. 해남 대흥사. 거기서 하룻밤 자고 다시 광주로 갔어요. 광주에서도 모텔에서 숙박하며 지속해서 노조 설립 포기하라고 회유를 했어요. 안 되니까 목포로 데리고 가더라고요. '광주에다가 시계 대리점을 차려 주고 전셋집을 얻어주겠다. 보증금은 당연히 회사가 준다'고 제안을 해요."
 

김용희는 겨우 빠져나와 그다음 날 회사로 출근해 생산부 직원들에게 그동안의 납치 회유 사실을 폭로한다.

노동조합 총회날
 

▲ 2019년 9월 17일,고공농성 100일째 김용희 씨. 사진- 안건모 ⓒ 안건모


수많은 난관을 뚫고 노동조합 설립 준비를 마쳤다. 1991년 3월 28일 노동조합 총회를 하는 날이었다. 노사협의회 사무실에 사복경찰 두 명이 들이닥쳐 김용희를 경찰차에 태워 창원시 공정선거감시센터에 가둔다. 노조 설립과 관련된 몇몇 사람이 미국으로 발령 나면서 노조 설립은 실패한다. 그리고 회사는 그날 오후 김용희에게 해고 통보를 하고 회사를 못 들어오게 막았다. 해고 사유는 엉뚱하게 '김용희가 여사원을 성폭행했다'는 거였다.

자초지종은 이렇다. 노동조합 총회를 하기 직전인 3월 1일, 현장 여사원이 김용희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그 여사원이 염 부장을 처벌해 달라고 했어요. 염 부장이 조 여사원을 하기 휴양지 사전 답사하는 데 데리고 가서 해인사 주변 모텔에서 성폭행한 거라."

김용희는 다른 노사협의회 위원 한 명하고 그 문제를 의논했다. 그 위원은 염 부장이 엮인 걸 알고는 겁이 나서 회사에 그 사실을 알렸다.

"그러니까 회사에서 여사원한테 협박한 거예요. '오히려 김용희한테 성폭행당했다고 고소를 해라' '좋은 부서로 옮겨 주겠다' 등 제안을 했대요. 회사가 늘 쓰는 수법이에요. 그런데 내가 무고죄로 맞고소했어요. 여사원이 겁이 났죠. 회사에서 다 알아서 한다고 그랬는데 경찰서에서 부르니까 겁이 난 거예요. 그래서 고소 취하하고 제집에 와서 회사가 그렇게 시켰다고 털어놓고, 성폭행당한 게 아니라는 공증서도 쓰고 일주일 동안 숨겨 달라고 해서 아내하고 집에 있었어요."

김용희는 해고 무효소송을 걸고 회사 정문 앞에서 출근 투쟁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삼성은 집요하게 회유하고 협박했어요. 우리 아버지가 사는 목포까지 가서 아들을 설득해 해고자 복직 투쟁을 접으면 광주에 시계 대리점을 내주고 집을 사 주겠다고 회유한 거예요. 아버지가 나한테 찾아와 일주일 동안 밥도 안 잡수고 설득을 했어요. 하지만 저는 동의할 수가 없었어요."

아버지는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유언장 한 장 남겨 두고 집을 나갔다. 김용희는 투쟁을 접고 석 달가량 전국의 모든 기도원과 사찰을 찾아다녔다. 혹시 회사의 짓일까 해서 사측에 아버지만 찾아주면 복직 투쟁을 포기하겠다고 사정했다. 하지만 사측은 외면했다. 김용희는 아버지 찾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창원으로 와서 복직 투쟁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찰이 김용희의 부인을 성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사측 인사과 간부 부인 임아무개씨가 아내한테 만나자는 거예요. 아내가 약속 장소에 나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질 무렵, 임씨가 잘 아는 창원경찰서 기동대 소속 황 순경이 나타나 임씨하고 아내를 집에까지 데려다주겠다며 승용차에 태웠어요. 그리고 중간에 임씨는 내리고 아내를 대방동 야산으로 끌고 가 차 안에서 성폭행을 시도했어요."

때마침 지나가던 성주파출소 소속 순찰 차량에 발견됐다.

"하지만 성주파출소는 황 순경에 대해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합의를 종용하더라고. 더구나 임씨가 황 순경이 아내를 성폭행하려는 계획을 알고 있었다는 거라. 사전 계획된 범행 아니겠어요?"

이 사건은 1992년 5월 25일 자 <부산일보>에 실려 있다.

"경남도청 소속 경찰 간부가 다음 날 합의 보러 왔어요. 천만 원 줄 테니까 무마하자고. 합의에 응하지 않았던 것은 개인적 일탈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죠. '배후에 삼성이 있을 것이다. 삼성이 저지른 건데 나중에 삼성한테 배상 청구하겠다, 당신은 감옥이나 가라' 결국 황 순경은 구속됐어요."

그러나 해고무효확인소송은 2심에서도 졌다. 어찌 된 일인지 해고 사건을 맡은 변호사의 사무장이 김용희가 성폭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힌 조의 공증서를 증거로 제출하지 않았다. 그 공증서는 해고무효확인 재판에 결정적인 증거였다. 2심 선고가 끝나고 나서야 패소했다고 사무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김용희는 대법원에 상고했다.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고 그 공증서를 직접 제출했다.

"1994년 대법원 상고심 '결심공판'을 15일 앞두고 삼성 비서실과 사측(삼성시계) 임원이 찾아왔어요. '상고 취하서를 작성해 주면 계열사에 1년만 근무하다 원직 복직 시켜 주겠다'는 거예요. 복직 합의서를 작성하고 대법원에 상고 포기서를 제출했죠. 그리고 1994년 2월 삼성종합건설로 발령이 나 러시아 스몰렌스키 지부로 갔어요."

하지만 러시아에서도 탄압이 심했다.

"하루는 인사과 김아무개 과장, 고아무개 대리, 나아무개씨가 나를 오랏줄로 묶더라고요. 그리고 내 007가방을 뺏어가 자물쇠를 부수고 그 안에 들어 있던 아버지 유언장과 복직합의서를 다 불 질러 버렸잖아요. 그리고 나를 간첩으로 신고했어요. 장명국의 <한국노동조합 운동론>이라든가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같은 책을 보고 신고한 거죠."

김용희는 7시간을 묶여 있었다고 증언한다.

"바지에 오줌도 쌌어요. 오전 9시쯤 러시아 한국대사관 안기부 직원이 왔어요. 좀 떨렸죠. 하지만 무슨 간첩 혐의입니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같은 책은 서점에 널려 있는데. 결국 풀려났죠."

다행히 복직합의서는 따로 복사해 놓은 게 있었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두 달 때쯤 되니까 현장 노무관리 하라고 그러더라고. 못 하겠다 했더니 청소하는 사람들 다섯 명 관리만 하래요. 나중엔 아파트 공사장 콘크리트 양생이 잘 됐는지 강도 시험하고 별짓 다 했네요. 나중엔 상추씨를 갖다주며 심으래요. 어쩌겠어요. 해고의 빌미는 주고 싶지 않았어요. 풀밭 갈아엎고 도랑 내고 비닐을 씌워 싹이 트기를 기다렸지만 영하의 온도에서 싹이 올라오겠습니까?"

러시아 근무가 끝나갈 무렵 사측은 노조를 만들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지 않으면 한국으로 발령을 내지 않겠다고 했다.

"싱가포르 건설 현장으로 5년간 발령을 내겠대요. 그때부터 단식에 들어갔어요. 단식 9일째 삼성건설 부사장이 한국에서 왔어요. 요구 조건이 뭐냐고. '아무것도 없다. 싱가포르 발령 철회해 달라,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죠."

김용희는 결국 한국으로 돌아왔다. 1995년 5월 말이었다. 김용희는 새로 발령받은 삼성시계로 출근했다. 하지만 사측은 유급휴가 10일 줄 테니 이후 출근하라고 했다. 10일이 지난 뒤 약속한 날짜에 출근했다.

"전략기획실 직원들이 나와서 삼성 관련 모든 활동을 접고 사표를 쓰면 10억을 주겠다고 해요. 거절했어요. 그러면 삼성 테크윈으로 근무지를 변경하겠대요. 그래서 삼성테크윈으로 출근했어요. 그런데 인사 관리 상무가 나와 출근을 가로막고 노조 활동을 안 하겠다는 각서를 쓰기 전에는 함께 근무할 수 없다는 거예요."
   

CCTV탑 고공농성중인 삼성해고자 김용희씨삼성해고자 김용희씨가 강남역 삼성생명 빌딩앞 20여 m 높이의 CCTV 철탑위에서 100일째(9월 17일 기준 )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 권우성


그 뒤부터 김용희는 해고 통보도 받지 못한 해고자가 됐다. 복직 투쟁을 시작했다. 민주노총 해고자복직특별위원회 조직국장을 맡기도 했다. 그동안 김용희는 심한 일들을 겪었다.

1998년 7월, 태평동 삼성그룹 본사에서 단식투쟁 16일째 '공무상비밀표시무효죄'로 2개월 동안 구속됐다. 1999년 10월경 한국기독교회관 6층 인권위원실에서 48일 단식투쟁 중, 민주노총 단병호 위원장이 복직 노력을 해보겠다 하여 단식을 풀고 창원 집에 내려갔다가 다음날 또다시 '공갈죄'로 구속됐다. 가장 오래 했던 단식 투쟁은 2017년 청와대와 국회회관 앞에서 했던 119일이다. 그때 80kg 나가던 몸은 49kg으로 줄었다. 그리고 지금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발도 펼 수 없이 좁은 강남역 CCTV 철탑으로 올라갔다. 이곳에서도 55일 동안 단식했다.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의 기록이 아닐까 한다. 9월 17일 김용희는 농성 100일을 맞았다.

삼성에 맞서 투쟁한 대가로 김용희 집은 풍비박산이 났다. 아버지는 행방불명, 어머니는 김용희가 두 번째 구속됐을 때 뇌경색으로 쓰러져 치료 한번 받지 못하고 5년 뒤에 돌아가셨다. 아내는 천식으로 고생하고 있고, 큰아들은 불안정한 가정환경 탓인지 고등학교 1학년 때 간질 4급을 진단받았다. 둘째 아들은 이혼해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와 살고 있다.

"제가 정년이 올해 7월 10일 지났어요. 계열사에라도 명예 복직해야죠. 밀린 임금 당연히 받아야죠. 정상적으로 출근했을 때의 임금 24년 치 받고, 그 전 것, 2년 동안 밀린 임금. 아버지, 아내에 대한 위자료 받아야죠."

김용희는 이번이 마지막 싸움이라고 말했다.

"뛰어내렸으면 내렸지 절대 안 내려갑니다. 겨울날 채비도 다 마쳤어요."
    
노동교실을 시작으로, 삼성 해고자 이재용

이재용은 김용희와 나이가 같은 1959년생이다. 살아온 삶은 다르지만 당한 일은 김용희와 너무 비슷하다.

"제가 태어난 1959년 부산 영도에는 사라호 태풍이 왔어요. 당시 아버지는 큰 사업을 하고 있었어요. 외항선이 7척이나 있었는데 사라호 때문에 한 척만 남고 다 침몰해 버렸어요. 그러고도 먹고살 만했는데 아버지가 도박에 빠지면서 타락했어요."

아버지는 4년 만에 재산을 다 털어먹고 야반도주하듯이 영도에서 기장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3년 만에 돌아가셨다.

이재용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배를 곯을 정도로 가난했다. 이재용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을 전전하다가 1979년에 군대에 갔다.

"그때는 아무 생각 없었어요. 내가 26사단에 있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폭동 진압 훈련이 일과였어요."
 

▲ 삼성 부회장 이재용을 구속하라고 요구하는 해고노동자 이재용. 2019년 8월 30일. 사진- 안건모 ⓒ 안건모


이재용은 1982년에 제대한다. 다시 공장을 전전하다가 삼성중공업에 입사한다.

"제가 했던 일은 발전소에 들어가는 대형보일러를 제작하는 일이에요."

1987년 연말에 가톨릭 여성회관에서 '노동교실' 프로그램을 연다고 했다. 이재용은 '노동교실'이 궁금해서 한번 찾아갔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회사는 그를 불렀다.

"'왜 네가 그런 데를 가냐'는 거예요. '그건 빨갱이가 받는 교육이다, 교육을 하는 사람들 모두 빨갱이다, 대체 불만이 뭐냐'고 회유를 해요."

이재용은 회사에서 자기가 어디 간 걸 어떻게 아는지, 왜 그런 교육을 못 받게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주일에 두 번 교육을 받는데 교육받는 날만 되면 들들 볶았다.

"술 마시러 가자, 어디 가자, 상사들이 왜 이렇게 심하게 그러는지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까 삼성의 경영 이념이나 무노조 정책이란 걸 알게 됐어요."

이재용은 오기가 생겼다.

"'왜 내가 회사에서 퇴근하고 당신들에게 간섭을 받아야 하나' 이렇게 조금씩 반항을 하기 시작한 거고. 회유하다가 나중에는 안 되니까 탄압이 들어오는 거예요."

이재용은 노동교실에서 세상을 배웠다. 1980년 광주항쟁 비디오를 보고 역사를 알게 됐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도 알았다. 사회를 알게 되면서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이재용은 그때부터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동료들에게도 교육도 받으러 가자고 권유했다. 회사는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삼성동지회'라는 모임을 조직했어요. 그런데 삼성동지회에 가입하면 삼성 저놈들이 얼마나 집요하게 파고드는지 사람이 몇 사람만 모이면 어떻게 회유를 하든 간에 데리고 가버려요. '좋은 부서로 보내주기도 하고 돈으로 회유를 하든지 좋은 조건, 좋은 도시 외국에 보내주겠다. 어떻게 하겠다든지 제시를 하는 거예요. 좌우지간 삼성동지회를 거쳐 간 인원이 그 당시 몇백 명 정도 됐을 겁니다."

테러에 빨갱이 몰기

"회사 통근 버스 내리는 데서 두 명이 선전물을 돌리고 있었는데 경비대 놈들한테 팔이 이렇게 꺾여 가지고 옆구리를 많이 차였어요. 얼굴도 모르는 놈들한테 얻어맞고 경비실에서 아까 때린 놈 나오라고 난동을 부리고 그랬는데."
 

두 사람은 너무 억울해 월차를 내고 지리산 쪽으로 가서 2박 3일 쉬다가 회사를 나왔다. 그런데 나오자마자 창원경찰서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니 지리산 뭐하러 갔다 왔나?' 그래서 '바람 쐬러 갔다 왔다'고 하니까. '이 새끼 어디서 거짓말하노' 하고 한 대 때리는 거야. 옛날 결재판 같은 딱딱한 거로 머리를 한 대 딱. 그래서 '나는 맞아 가면서 말 안 하겠다.' 옆에는 전기 고문 기구도 있더라고요. 들이대지는 않았는데 이 새끼 매운맛을 좀 봐야 한다고 협박을 해요. 40분 동안 입도 안 떼고 있었어요."
 

죄가 없으니 금방 풀려났다. 그런데 다음 날 또 오라고 연락이 왔다.

"안 갔습니다. 그랬더니 그놈들이 현장에 와서 동료들 보는데 끌고 가요. 영장도 없이. 그런데 노조 포기 각서를 쓰고 회사에 시키는 대로 잘하겠다 각서만 쓰고 나가래요. 말이 됩니까. 이틀에 한 번, 열한 번 대공분실로 끌고 가더라고요. 하루에 네 시간 정도 이야기하고 보내 줍니다. 처음엔 그냥 나가라 해서 나왔는데 열 받더라고요. 나중엔 너희가 데리고 왔으면 너희가 데려다 놓으라고 했어요. 나중엔 자기 차로 실어다 주더라고."
 

삼성중공업엔 노동자협의회라고 사원들이 직접 선거로 뽑는 집행부가 있었다. 이재용은 노동조합을 하려면 노동자협의회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노동자협의회 위원장으로 출마를 한다. '노동자협의회 위원장이 되면 노동조합으로 전환하겠다'는 공약만 걸었다.

"표를 굉장히 많이 받았어요. 2차 선거에서 70% 넘게 받았어요. 당선되니까 회사에서 인사 담당자가 한도 없는 기업 골드카드를 가져왔더라고. 하는 말이 '위원장님, 당선되면 알게 모르게 돈도 많이 들 건데 이거 가지고 쓰십시오' 하는 기라. 우리 상근 인원이 열 명이었거든요. 그 사람들 모아 놓고 카드를 내가 부러뜨려 버렸죠."
 

이재용은 노사협의회가 왜 어용이 되는지 알았다. 그런 회사 카드를 쓰면서 노동자들을 위한 조직을 유지하기란 애초 불가능하다. 임금협상 때는 더욱더 심했다.

"임금협상 때가 되니까 진짜 뭉칫돈을 들고 온 거예요. 인사 담당 이사가 집으로 찾아왔어요. 백화점 봉투를 두 개 껴서 밑을 받쳐 들고 왔더라고요. 들어오면서 '위원장님, 내가 빈손으로 오기 뭐해서 애 옷을 한 벌 샀습니다' 그래. 그 사람 간 다음에 옷을 들어보니까 밑엔 전부 만 원권이야. 차곡차곡 싸 놨더라고."
  

이재용은 다음 날 출근할 때 그 돈을 그대로 들고 갔다.

"상근하는 사람들 다 불러놓고 '어제 주 이사가 이런 걸 갖다 놓고 갔다.' 그 자리에서 가져온 사람한테 전화해서 '이거 지금 당장 안 가져가면 전 사원들한테 대자보를 붙이겠다' 했더니 3분도 안 돼 날라왔더라고."
 

삼성에서 노조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당하는 일은 또 있다. 테러다.

"그날 여사원 생일인데 다른 상근 부장들이 아무도 없었어요. 남자친구도 회사에 같이 다니고 있었는데 남자친구도 없었던 거라. 내 차를 공설운동장 부근에 세워 놓고 술 한잔하고 오후 10시경에 나왔어요. 여사원은 택시 타고 가라고 보내고, 나는 길을 건너와서 차에서 쉬다 가야 되겠다 싶어서 의자를 딱 젖히는 순간에 뒷유리창이 와장창 깨지더니만 뭔가 머리를 치는 거예요. 저는 기억에 두 대를 맞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병원에 가니까 세 대를 맞은 거예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그 여사원이 옆 조수석에 쪼그리고 있는 거라. 나중에 알고 보니까 여사원이 택시 잡는다고 서 있는데 누군가 당구봉으로 목덜미를 때리고 여사원이 주저앉으니까 등을 사정없이 때리고, 공포에 질려 거의 기절한 여사원을 끌고 와 내가 탄 차 옆 좌석에 넣고 문을 닫아 버린 거야. 그러니까 얘가 너무 겁이 나니까 일어나도 못하고 있는 거예요. 저는 피를 엄청나게 흘렸어요. 정신을 차렸는데 옆에 여사원이 있는 거라. 일으켜 세워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으로 갔지."
  

다음 날 회사 게시판에 대자보가 붙었다.

"'이재용 위원장이 어제 밤늦게 술을 먹고 차 안에서 여사원을 겁탈하려다가 괴한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다.' 그래 놓고 그 여사원에게 이재용 위원장이 성폭행을 시도했다는 확인서를 좀 써 달라 이렇게 얘기를 한 거죠. 우리 삼성에서 노동조합 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이 당한 수법이거든요. 그 여사원은 회사가 그랬는데 자기는 그걸 거절했다고 나중에 나한테 얘기를 해 주더라고."
 

이재용 위원장 1년 임기가 끝났다. 그런데 부서에서 일을 주지 않았다.

"회사에 돌아오니까 업무를 안 주면서 뭘 시키냐면 청소하는 아줌마 관리하라고. 청소하는 아줌마가 한 분밖에 안 계시는데. 나중엔 담당 부서 과장 옆에다 책상 하나 놔 놓고 거기 앉아 있으라 하는데 그래 안 했지. 또 안 되겠으니까 협력업체를 관리하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걸 한 3년간 했어요. 처음에는 한 5억 원 줄 테니까 어디 다른 삼성 계열사로 가서 그냥 그렇게 살면 안 되겠냐 하더니, 나중에는 현찰 10억 원 줄 테니까 베트남 가서 골프장 관리만 하라고. 나는 안 간다고 했죠."

  

▲ 2019년 8월 30일, 고용노동청 앞에서 현대기아차 불법파견 집회에서 연대 발언하고 있는 삼성 해고자 이재용 씨. 사진_ 안건모 ⓒ 안건모


회사 측은 결국 이재용을 수원 열병합발전소로 발령을 냈다.

"발령 거부했죠. 우리하고는 전혀 안 맞는 열병합발전 설비 설치 현장에 발령을 냈는데 거기에 가지 않고 계속 이쪽으로 출근했어요."

14일째 되는 날 회사 측은 징계위원회를 열어 '발령 거부, 무단결근'했다는 사유로 해고 통보서를 보냈다. 다음 날인 1997년 5월 1일은 전국 노동자대회 날이었다. 이재용은 단상에 올라가서 삼성에서 어제 해고통지서를 받았다고 발언했다. 그리고 삼성에 복직 투쟁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게 22년이 걸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날 이후로 마산 창원에서 제 해고 싸움 때문에 같이 집회를 하다가 7명이나 구속이 됐어요."

이재용은 전국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전해투) 소속 삼성해복투를 만들었다. 몇 년 동안 전국 삼성사업장을 다니면서 집회를 했다. 삼성생명에서 정리해고된 사람들하고도 같이 투쟁했는데 긴 싸움에 지쳐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다. 이재용은 2002년에 창원에서 민주노동당 시의원으로 출마했지만 떨어진다. 2004년 보궐선거에는 70여 표 차이로 새누리당에 졌다. 2006년 선거에서도 떨어진다. 이재용은 시골에 들어가 조용히 살겠다고 경남 고성으로 이사를 했다.

이재용은 2010년에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 신청을 했다. 자료가 있어서 다행히 2013년 1월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을 받았다. 심의위원회는 삼성에 복직 권고도 내렸다.

"삼성에서 답변이 온 게 '회사의 경영 상태가 안 좋고 돌아갈 부서도 없고 그래서 복직을 못 시킨다'는 거예요. 그때부터 또 못 참겠더라고요."

이재용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청와대 앞에서 1인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촛불 정부니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이 정부에서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2018년 8월에 김용희를 만났다.

"강남역 8번 출구에 집회 신고하고 천막 같이 쳤습니다. 서초구청에서 나와 경고장을 붙이고 와서 천막을 뜯는다 그러고 엄청나게 싸웠습니다."

김용희와 이재용은 삼성과 마지막 싸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김용희는 강남역 사거리에 있는 CCTC 철탑에 올라가 농성을 하겠다고 말했다. 이재용은 말렸다.

"'사람만 골병드니까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했는데 기어코 올라가야겠다는 거야. 그러면 조직을 만들어 놓고 가자. 막무가내로 올라가면 안 된다 해도... 의견이 안 맞아서 난 가버렸거든요. 창원으로 내려갔는데 며칠 지나니까 단식을 3일째 하고 있다고 연락을 받았어요. 그래서 그 소리 듣고 또 안 올 수도 없고, 와서 보니까 올라갈 모든 준비를 다 해 놨어요. 가방까지 다 꾸려 놓고 올라가려고 준비를 다 해 놨더라고요. 자긴 일주일 안에 끝내겠다고 올라간 거예요."

지난 6월 3일 시작한 고공농성이 9월 17일로 100일이 됐다. 그사이 단식을 55일 동안 했다. 박근혜 사법농단 대법원판결이 나오기 직전에 또 3일 단식을 했다.

"오늘(9월 17일)이 농성 100일째인데 고공에 올라간 지 몸은 내가 보기에 일어섰다 앉았다 하긴 해도 몸이 망가질 대로 다 망가졌어요. 복식(단식하다가 미음부터 먹고 몸을 추스르는 것)을 밑에서 해도 시원찮은 건데 저 위에서 옳은 복식이 됩니까. 운동이 안 되는데."
   

▲ 2019년 9월 16일, 김용희씨에게 점심 도시락을 올려 주는 이재용씨. ⓒ 안건모


이재용의 희망, 명예 회복

"저는 저놈들이 잘못했다는 진정성 있는 사과라도 해야 그게 의미 있는 명예 회복이거든요. 2013년에 정부에서 복직 권고가 나왔을 때 저놈들이 돈이 없어서 복직을 못 시켜 준 건 아닐 거다, 이 말이에요. 내 이미 올 연말이 정년입니다. 공개적으로 사과를 하면 저는 정말 복직 싸움을 접을 수도 있습니다."

이재용의 삶도 삼성이 망쳐 놨다. 아내는 정교사였다. 이재용이 해고당하는 날 아내는 사표를 썼다. "해고될 줄 알았으면 사표를 안 썼겠죠?" 허탈하게 웃는다. 아내는 그 뒤 비정규직 교사로 20년 동안 학교에서 일했다.

현재 삼성 본사 앞에서 노숙 투쟁하며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7개 팀이다.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그 앞에서 노숙을 하면서 싸우고 있을까.
  

▲ 과천 철거민. ⓒ 안건모

  

▲ 보험금 지급 문제로 집회하는 단체. ⓒ 안건모

  

▲ 삼성중공업 피해협력사 (2019년 8월 28일). ⓒ 안건모

  

▲ 암과 백혈병 피해자- 사진 - 안건모 ⓒ 안건모


"그 사람들 다 만나서 얘기 들어봤어요. 삼성 암 보험 약관을 지키지 않아 보상을 못 받는 분들, 삼성에서 하청을 받아 일하다가 백혈병에 걸려서 한 사람은 돌아가시고 한 사람이 남아 싸우고 있는 분. 삼성중공업 협력업체를 하다가 갑질에 피해를 보고 한 20억 원 전 재산을 다 팔아 종업원들 월급 다 청산하고 여기 와서 싸우고 계신 분들 등 삼성이 이렇게까지 나쁜 회사인 줄을 국민들이 모릅니다. 그래서 해고자 복직 싸움도 복직 싸움이지만 그런 것들을 국민들에게 알려내는 게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삼성은 그동안 김용희, 이재용 같은 수많은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해 왔다.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로 병에 걸리고 죽어갔는데도 삼성은 수십 년간 모르쇠로 일관하며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아 왔다. 양심적인 소수의 시민이 치열하게 싸웠기 때문에 요즘 들어 삼성이 마지못해 몇몇 잘못을 인정하고 있을 뿐이다.
   
박근혜 정권과 삼성의 뇌물 및 정경유착 사건은 이제 대법원 판결로 판명이 났다.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등으로 이재용의 불법 승계를 위한 최대 사기극도 드러나고 있다. 국정농단에 가담했던 이재용은 감옥에서 죗값을 받아야 한다. 가장 먼저 김용희, 이재용 같은 해고자들을 복직과 명예 회복시키고, 삼성 앞에서 집회하는 사람들의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그게 정상적인 기업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그래야 이 나라가 산다. 언제까지 무노조 경영 이념이라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으로 기업을 운영할 것인가.

멀쩡한 젊은이들이 삼성 앞에서 집회하거나 인터뷰하는 사람들을 감시하는 회사는 아마 삼성밖에 없을 것이다.
  

▲ 2019년 8월 28일,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이재용 재구속을 촉구하는 삼성그룹사 노동조합 대표단. 사진- 안건모 ⓒ 안건모

덧붙이는 글 월간 작은책 10월호에 나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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