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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라니아의 피스 헬멧, 그리고 KBS

등록|2019.10.01 16:19 수정|2019.10.11 16:11
일본이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욱일기 반입을 금지하지 않겠다고 밝히자, 우리 국민들의 반발이 거세다. 과거 수십 년 동안 일본의 식민 지배를 경험한 우리로서는 욱일기 문양이 티셔츠나 음료수병 등에 아무렇게나 붙을 수 있는 단순한 디자인이 아니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이나 다름 없기 때문에,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이런 국민적 반감 때문인지 욱일기 문양을 아무렇게나 사용하는 외국의 기업이나 스포츠 구단, 심지어 해외 유명 연예인들을 상대로 과거 일본의 아시아 침략과 욱일기가 어떤 연관을 갖는지, 독일 나치의 십자 깃발(하켄크로이츠)과 어떻게 비슷한 의미를 갖는지 문제를 제기하고 사용 금지를 촉구하는 국내의 단체나 누리꾼들도 있다.

나는 이런 노력을 다룬 기사를 볼 때마다 일본의 과거 만행과 반성하지 않는 태도를 국제적으로 공론화하기 위해 애쓰는 개인이나 단체의 노력에 고마움을 느낀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여전히 서구 유럽이나 미국 중심의 국제 질서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과 그 피해국인 한국의 고통스러운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져줄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영향력 있는 국가들 다수가 일본처럼 식민 침략의 가해 국가라는 점, 그리고 여전히 국제 무대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이러한 메시지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달될지 모르겠다.
 

피스 헬멧을 쓴 멜라니아 트럼프2018년 10월 5일, 피스 헬멧을 쓴 멜라니아 트럼프카 케냐의 나이로비 국립공원을 방문하고 있다. KBS 글로벌 24시 화면 갈무리 ⓒ 신재명


그런데 나는 최근에 KBS1 TV의 한 프로그램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처럼 식민지 침략의 상처를 안고 있는 다른 피해 국가들의 아픔에 대해 얼마나 진지한 존중의 자세를 갖고 있는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매주 저녁 5시 30분에 KBS1 TV는 '전국을 달린다'라는 10분 내외 분량의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전국의 KBS 지역 방송국들이 제작한 방송들을 볼 수 있는데, 매주 목요일에는 KBS 전주 총국에서 제작한 '골목 여행'이 방영된다. 그런데 이 방송의 리포터가 쓰고 나오는 모자가 의문을 갖게 만들었다.

이 방송에서 리포터는 매번 피스 헬멧(pith helmet)이라는 모자를 쓰고 나온다. 사파리 모자라고도 하는 이 모자는 아마 전라북도 여러 지역을 탐방하는 이 프로그램의 성격상 제작진이 의도적으로 채택한 의상의 일부로 보인다.

그런데 모자는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과거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초에 유럽 제국주의 침략 국가들이 아프리카, 중동, 동남아시아 등 한창 해외 식민지 침략에 열을 올릴 때 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식민지 지역의 뜨거운 기후에 적응하기 위해 애용했던 것이다. 식민지 행정관과 주둔 군인들, 식민지 경영에 참여했던 백인 민간인들이 주로 썼기에 서구 백인 식민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런 사실 때문인지 2018년 10월, 아프리카 4개국을 순방 중이던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부인 멜라니아 트럼프가 케냐 나이로비 국립 공원을 방문할 때 이 모자를 써서 CNN, 뉴욕 타임스, 가디언 등 해외 주요 언론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우리의 경우와 비교하면 아마 욱일기보다는 일본이 태평양 전쟁 중 동남아시아를 침략할 때 정글에서 썼던 일본 관동군 모자가 더 적절한 비교 대상일 것 같다.
모자 하나 가지고 너무 경직되게 접근하는 게 아닌지(욱일기 문양이나 나치 문양에 대한 반응과 비교하면 그렇게 과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게다가 이 모자는 실용성을 갖춘 생활용품으로 현재에도 여전히 판매되는 모자라서 내 문제 제기가 과도한 게 아닌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또 개인적인 착용에 대해서는 내 생각을 강요할 의도가 없다.

하지만 피스 헬멧에 대해 식민주의의 상징이라고 여기는 견해가 있는 이상 욱일기 논란의 문제 제기 당사국인 한국의 공영 방송에서 이 모자를 의상 도구의 하나로 채용하는 게 바람직한지 의문이 든다. 아마 유럽 열강의 식민 지배의 고통스러운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국가의 국민들은 KBS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한국은 자기들 식민 지배의 상처는 온 인류의 고통이고, 다른 나라들 상처는 '그건 모르겠고'라고 여기는 것 같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런 식의 자가당착적 행태를 보이면 아마 욱일기 논란은 세계 시민들의 상식에 호소하는 보편적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인들만의 '욱일기 타령'이 되지 않을까? 필자는 8월 초쯤 KBS에 이러한 문제를 제기했다. KBS 누리집의 시청자 민원 전화번호로 상담원과 통화했는데, 상담원은 지역 방송국에서 제작한 프로그램이라 지역 방송국에 직접 문제 제기를 해야 한다고 했다.

강원도에 거주하는 필자는 KBS 춘천 총국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직원이 해당 내용을 담당자에게 전해주겠다고 하여 통화를 마쳤다. 그러나 그 후에도 리포터가 계속 피스 헬멧을 쓰고 나왔다. 몇 주 후 다시 KBS 춘천 총국에 전화를 거니, 전에 전화를 받았던 직원은 담당자에게 전달만 했을 뿐 그 후 결과에 대해서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담당자의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고 하여 스태프와 통화했지만, 해당 방송은 KBS 춘천 총국에서 제작한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국에서 제작한 것으로 춘천 총국은 송출만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방송 마지막에 방송을 제작한 지역 방송국의 로고가 나오니 그곳에 문의를 해보라는 설명이었다.

필자가 민원 제기 과정의 지난함에 대해 항의하자, 담당자는 직접 연락해보겠다고 말했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답변이 없다. 그래서 직접 <오마이뉴스>에 글을 송고하게 되었다. 국민들이 내는 수신료로 운영되는 공영 방송 KBS에서 필자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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