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덕에 한국남자 '특별한 존재' 됐다? 경제학자의 궤변
[반일 종족주의 12] 군대가 '한국인 차별' 해소했다는 <반일 종족주의>
▲ 이승만 TV에 출연한 정안기 전 서울대 경제연구소 연구원 ⓒ 이승만 TV 유튜브 캡처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만 막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강제징병 문제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 그들의 논리가 이 책 제8장 '육군특별지원병, 이들은 누구인가?', 제9장 '학도지원병, 기억과 망각의 정치사'에 나타난다.
이 부분을 담당한 정안기 전 서울대 경제연구소 연구원은 교토대학에서 일본경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일본학술진흥재단 특별연구원과 고려대 경제연구소 연구교수 등을 지냈다. 국내 학계에서 쓴 논문은 주로 일제강점기 산업 문제와 강제징병 등에 관한 것이다.
고대 강의에서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부정한 것처럼, 정안기 연구원은 <반일 종족주의>에서 일본군 징병의 강제성 역시 부정한다. 일반 청년들이 동원된 육군특별지원병 제도와, 전문학생·대학생들이 동원된 학도지원병 제도는 모두 다 자발적인 입대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자발적 지원 통해 특별한 존재가 되는 조선인?
▲ "친일 망언 정안기 교수 해임하라"고려대 총학생회와 정경대학생회는 2015년 9월 22일 오전 안암동 고려대 학생회관앞 민주광장에서 '위안부는 노예가 아니다' '그 시대엔 우리 모두가 친일파였다' 등 강의 도중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독립운동가를 모욕하고 친일파를 옹호한 정안기 교수의 공식 사죄 및 해임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권우성
그는 육군특별지원병이 말 그대로 '특별한 존재'였다고 말한다. 제8장에서 그는 "육군특별지원병은 일본 병역법에서 규정하는 만 17세 이상, 만 20세 미만의 일본인을 대상으로 지원병역을 부여하는 '육군현역지원병'과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였습니다"라고 서술한다. 강제적 징병이 아니라 자발적 지원에 의해 그 같은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조선인의 지원 병역은 본인의 자발적 의지에 따른 병역 부담으로 징병제의 의무병역과 명확히 구별되었습니다"라고 주장한다.
학도지원병에 관해서도 같은 말을 한다. "종래 알려진 것처럼 무조건 강제된 것이 아니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육군특별지원병이든지 학도지원병이든지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입대했다는 것이다.
위안부 강제동원 역시 외형상으로는 자원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인 1993년 8월 4일 고노담화에 언급된 것처럼 "감언·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모집된 사례가 많았"지만, 적어도 공식상으로는 본인 지원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도 <반일 종족주의>는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위안부는 강제동원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런 식으로 정안기 연구원은 육군특별지원병과 학도지원병 역시 절대로 강제동원된 게 아니라고 말한다. 입신출세의 특혜를 바라고 스스로 자원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그는 흥미로운 서술을 남겼다. 학도지원병 입대가 본인 의사에 따른 것이었음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이렇게 밝힌다.
"실제로 경성제국대학생으로서 학도지원을 했다가 적성검사를 거부한 서명원은 '1차 신체검사를 한 뒤 2차에 빠졌기 때문에 마감일을 넘길 수 있었다. 마감일을 넘기고 징용을 가면 그만이었다'고 회고하였습니다. 당시는 전시기였으며, 젊은이들은 군대에 가든 공장에 가든 강요받는 분위기였습니다. 서명원은 어느 쪽이든 선택은 자기의 몫이었음을 회고하였던 것입니다."
정안기 연구원은 경성제국대학생 서명원이 신체검사 다음 단계인 적성검사를 거부한 점을 들어 학도지원병 입대의 자발성을 강조했다. 본인 판단에 따라 적성검사를 거부할 수도 있었으니 강제징병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서명원은 징병에 응하지 않으면 징용으로 가야 했다. '마감일을 넘기고 징용을 가면 그만이었다'고 서명원은 말했다. 이는 식민지 한국인들이 어느 쪽으로든 전쟁에 동원되지 않을 수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A나 B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자유는 있었지만,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을 자유는 없었던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강제동원만큼은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정안기 연구원이 제시한 위 사례는, 강제징병이든 강제징용이든 한국인들의 희생이 강압적 분위기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이 사례는 한국인들의 자발적 지원을 입증하는 증거가 절대로 될 수 없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강제징병 문제는 정안기 연구원의 전문 분야 중 하나다. 이 분야를 전문적으로 파고든 그가 제시한 게 고작 이 정도 사례라면, 그가 입증의 어려움을 얼마나 절실히 느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는 한국인들을 전쟁에 동원하고자 무수한 선전전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저명한 지식인과 예술인들이 선전·선동에 대거 동원돼 훗날 친일파로 낙인 찍히고 말았다. 만약 한국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일본군 입대를 열렬히 지원했다면, 일제강점기 막판에 무수한 친일파가 그처럼 양산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평등한 일본군?
▲ 강제 징병된 이들이 신체검사를 받고 있는 가운데, 신체검사장을 찾은 조선군사령관. ⓒ 임현철
정안기 연구원은 충분한 근거도 없이 일본군 입대의 자발성을 주장하면서도, 한 단계 더 나아가 일본제국주의의 입영 정책을 찬미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제1단계를 제대로 마무리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제2단계로 성급히 나아간 것이다.
그는 일본제국주의가 일본군에 입대하는 일본인과 식민지 한국인을 차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한국인 징병을 위해 거액의 재정 지출까지 감내했다고 말한다. '자발적'으로 입대한 한국인들을 위해 일본이 좋은 일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징병을 하면서 돈을 쓰지 않는 정부가 어디 있을까. 사실 그 돈은 식민지 한국에서 거둔 돈이다. 그런 돈인 줄 알면서도, 정안기 연구원은 일본이 한국인 징병을 위해 거액을 지출한 점까지 굳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일본제국주의가 이렇게까지 해준 것은 일본인과 식민지 한국인 사이의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이 대목이 <반일 종족주의>에 이렇게 서술돼 있다.
"일본이 거액의 재정 지출을 감수하면서까지 육군특별지원병제를 시행하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일본은 육군특별지원병제가 조선인의 황민화를 위한 정신적 기반을 확충하는 동시에 아시아에서 일본의 사명을 이해시키고, 천황제 국가 일본에 대한 충성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크게 유용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육군특별지원병제를 통해서 동화주의 식민통치 이데올로기의 제도적 완성을 추구했습니다."
일본이 강제징병을 실시한 것은 일본 국민들만으로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중국뿐 아니라 동남아와 태평양, 심지어는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도 전쟁을 일으켰다. 군국주의 야망에 불타서 시작한 일이, 어느 순간 감당하기 힘든 세계적 규모의 침략전쟁으로 발전돼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버티는 길은 군인 숫자를 하나라도 더 늘리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식민지 한국인들을 일본군에 편입시켰던 것이다. 일본인과 식민지 한국인 사이의 차별을 없애주기 위해서 그렇게 했던 게 결코 아니다. 그런데도 <반일 종족주의>는 일본제국주의의 의도를 순수하게 포장해주고 있는 것이다.
<반일 종족주의>는 그 같은 일본의 의도가 훌륭한 성과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일본군에 들어간 한국인들이 군대 안에서 평등을 맛보고 근대적 인간이 될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다. "육군특별지원병은 이들에게 향촌 사회의 신분 차별로부터 탈출이나 입신 출세의 지름길이었습니다"라고 정안기 연구원은 말한다. 또 이렇게 강조한다.
"육군병지원자 훈련소는 몸과 마음으로 충군애국을 실천하는 병영 생활의 복사판이자 비(非)국민을 국민으로 포섭·개조하는 국민 만들기의 공장이었습니다."
비국민이었던 식민지 주민들이 일본 육군이 되어 비로소 국민으로 승격됐다는 것이다. 이들을 완전한 자기 국민으로 개조하기 위해 일본이 만든 공장이 바로 군대였다는 것이다.
정안기 연구원은 육군특별지원병과 마찬가지로 학도지원병도 그 같은 차별 해소에 기여했다고 말한다.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 조선인의 학도 지원은 동일한 제국신민에 대한 국민의무의 차별 또는 역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고육지책이기도 했습니다"라고 말한다. 민족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일본이 고육지책으로 어렵사리 내놓은 제도가 학도지원병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지 간에 군대는 여타 분야에 비해 평등한 측면이 많다. 부하와 상관 사이의 위계질서는 엄격하지만, 적어도 같은 계급에서는 분명히 평등이 존재한다. 대단한 고위층 자제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군인들은 학력·재산·지위에 관계없이 무차별적 대우를 받는다. 학력이나 재산 혹은 지위가 낮아도 군대 안에서는 계급에 따라 대우를 받는다.
또 여타 분야에 비해, 군대에서는 실력주의가 강하게 작용한다. 혈통이나 신분도 중요할 때가 있지만, 훈련이나 실전 같은 때는 실력이 가장 강하게 작용한다.
평양성에서 구걸하며 살았던 온달이 고구려 장군으로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은 평강공주가 갖고 간 재산 덕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전국 사냥대회에서 1등을 하고 군대 선봉장이 되어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온달이 역사적 인물로 부각된 데는 군대에서 보여준 실력이 결정적이었다. 가야왕족 출신인 김유신이 신라 사회에서 출세할 수 있었던 것도, 화랑이 되고 군인이 되어 전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비교적 평등하고 실력주의가 작동하는 군대라는 공간이 아니었다면, 온달과 김유신이 그처럼 대단한 인물이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정안기 연구원은 군대 내의 평등이 일본제국주의 안에서만 있었던 것처럼 말한다. 그는 식민지 한국의 향촌사회에 존재했던 소작인 아들과 지주 아들 사이의 차별 같은 것이 일본군 내에서는 없었음을 높이 평가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군대는 원래 다 그런 법인데도, 그는 그게 일본군 안에서만 가능했던 것처럼 말하고 있다.
강제징병은 스펙이다?
▲ 일제 강제징병 피해 유족 대리인 조영훈ㆍ김남기ㆍ심재운 변호사 등이 2019년 8월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민원실에 헌법소원 청구서를 제출하고 있다. 유족 83명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라 한국이 수령한 대일청구권 자금의 보상에 대한 입법부작위 위헌 확인을 위한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 연합뉴스
<반일 종족주의>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일본군 입대가 한국인들에게 평등뿐 아니라 강인한 생존력까지 선사했다고 말한다. 정안기 연구원은 이렇게 말한다.
"육군특별지원병은 일본군 병사와 함께 인간의 접근을 불허하는 열대밀림, 해발 3000~4000m의 고산지대, 광활한 습지대를 누비며 분투했습니다. 이들은 보급마저 끊겨버린 극한의 전장 환경과 생물학적 한계를 돌파하는 생존 투쟁의 와중에서 전문적인 군사 지식과 풍부한 실전 경험을 쌓았습니다."
식민지 한국인들이 일본군에 들어가 강인한 생존력을 얻게 됐다는 것이다. 육군특별지원병이나 학도지원병으로 억지로 끌려간 한국인들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처했는지를 스스로 드러내는 글인 줄도 모르고, 정안기 연구원은 일본군 경험이 한국 청년들을 '강한 남성'으로 만들어주었다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래서 당시 세간에서는 학도지원을 '천재일우의 기회'라고도 했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또 이런 과정을 거쳐 한국인들이 근대적 인간이 되었다고 그는 높이 평가한다. "여기서 이들은 근대사회에 적응하는 시간·신체·언어의 엄격한 규율화와 함께 이른바 '군대적 평등성'을 자기화했습니다"라고 말한다. 일본군 체험을 통해 한국인들이 미개한 인간에서 근대적 인간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반일 종족주의>는 이런 경험이 해방 이후의 대한민국을 지키는 원동력이 됐다고까지 찬미한다. 일본군 경험을 쌓은 이들이 없었다면 해방 이후의 한국이 무사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해방 이후 이들은 군사영어학교 등의 군사학교를 거쳐 한국군 장교로 변신했습니다"라면서 "6·25 전쟁기 이들은 최일선 부대장으로 화력과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국제 공산세력의 남침 기도를 저지·분쇄하는 데 발군의 역량을 발휘했습니다"라고 말한다.
병무청 모병 담당자도 아니면서, 이처럼 입에 침이 마르도록 군대를 예찬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식민지 군대가 아닌 자기 민족의 군대도 결코 즐거운 곳이 아니다. 자기 민족의 군대일지라도, 군대를 두 번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자기 민족의 군대도 아닌 일본 침략자의 군대를 대체 왜 이렇게 찬미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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