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교과서로 한글을 배우고, 표지판에 한글을 쓰는 외국
[백두산여행기1] 연길에서 이도백하까지 이동하며 만난 풍경들
얼른 남과 북의 관계가 개선되어, 세워놓은 계획이 꼭 실현되었으면 좋겠다. 그때까지는 백두산에 가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여름휴가로 백두산에 다녀오신 선배의 말 한 마디에 마음이 요동을 친다.
"연사랑에서 같이 갈까요, 백두산?"
연사랑은 내가 속한 우리 회사 등산 동아리인데, 역사상 첫 해외 원정 산행으로 백두산을 선택한다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당시 회의실에 모인 멤버들 몇몇이 동조하는 의사를 표했고, 마음이 급해져서 동아리 회장님과 급하게 상의를 했다.
마침 포항에서 출발하는 여행사가 있었고, 10월 초로 날짜를 정한 후 같이 여행할 동료들을 모집했다. 부부가 함께 하신다는 분들과 아들과 함께 가신다는 분들을 포함하여, 모두 열다섯 명의 여행 동지가 모였다. 운이 좋게도 여행사에서는 우리 일행으로만 여행을 진행해 주신다고 하셔서, 계획은 훨씬 수월해졌다.
여행은 10월 6일 일요일에 출국해서 이틀 동안 백두산의 서쪽 등산로와 북쪽 등산로를 따라 천지에 오르고, 한글날인 9일에 귀국하는 일정이었다. 출발 바로 전에 한반도를 흔들고 지나간 태풍 미탁이 걱정이었으나, 다행스럽게도 여행에는 지장이 없었다. 회사 주차장에서 처음 만난 동료의 가족들과는 아직 서먹했지만, 비행기를 타기도 전에 금세 친해졌다.
▲ 연길 공항에서 나를 제일 먼저 반긴 것은, 한글이었어요!연길 공항이다. 나는 분명 2시간 반이나 날아왔는데, 저렇게 한글이 쓰여진 공항에 도착했다. 연길의 첫인상은 놀라움이었다. ⓒ 이창희
두 시간 반쯤 날아서 도착한 연길 공항에서 나를 반긴 것은 '연길'이라는 한글 표지판이었다. 분명히 시차도 한 시간이나 나는 것을 보니 중국인 것은 확실한데, 여기저기에 한글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연길이 속한 이곳이 '연변 조선족 자치주'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한국'을 드러내는 곳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여행을 도와줄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니, 이곳에 살고 있는 재중동포들은 북한의 교과서로 한글을 배우는 것은 물론이고 지역의 모든 안내 표지판에는 한글을 제일 먼저 써넣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 민족이 자치권을 갖고 있는 연변에 대해, 그동안 갖고 있었던 수많은 편견이 떠올라서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일행을 태운 여행 버스가 처음으로 향한 목적지는 북한과의 국경인 두만강이 보이는 도문이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강가로 향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두만강은 생각보다 얕았고 좁았다.
강 하류로 내려가다 보니 퇴적물이 강 중간에 쌓여 있는 곳에서는, 맨발로도 건널 수 있을 정도였다. 강 건너의 북한은 맨눈으로도 선명하게 보였고, 두 명의 선대 지도자의 사진이 붙어 있는 남양역은 그동안 김정은 위원장의 열차 여행에서 종종 보이던 곳이었다.
▲ 두만강 너머로 남양역이 선명하다. 망원경으로 바라본 국경 너머에는 선대의 지도자 두 명의 사진이 붙어있는 국경의 남양역이 제일 먼저 보인다. 일터에서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북의 노동자들마저 반가웠다. ⓒ 이창희
남양역 앞의 건물 옥상에서 열심히 지붕을 올리는 북한 노동자들의 움직임은 생생했다. 큰 목소리로 인사라도 하면 대답해줄 것만 같았다. 이렇게나 가까운데 우리에겐 절대 허락되지 않는 그곳을 직접 본다는 것은, 안타까움과 슬픔을 넘어서는 감정을 남겼다.
게다가 여행 셋째 날, 예정에는 없었지만 연길의 북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푸짐한 식사도 무척이나 반가웠지만, 그곳의 동포들과 같이 손을 잡고 부르는 '고향의 봄'은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너무 늦지 않은 언젠가, 우리의 형제들과 함께 소주 한 잔할 수 있으면 좋겠다.
▲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어르신이 흥겹게 춤을 추신다. 평생을 우리 말과 우리 문화를 지키면서 중국의 땅에서 살아오셨을 어르신의 움직임이, 쓸쓸하고도 아름다웠다. 다른 나라 안에서 우리의 문화를 지키고 살아간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었을까? 지금까지 그들에게 품었던 편견이 미안하다. ⓒ 이창희
▲ 윤동주 시인이 태어나신 용정에 들렀다. 용정이라는 지명은 바로 이 '용두레 우물'에서 기인했다고 한다. 이 물은 일제시대의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마셨던 물이었을 것이고, 윤동주 시인이 친구들과 함께 뛰었던 공원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왜 이 곳을 잊은 채 살았던 것일까? 미안한 마음이 떠나지 않는다. ⓒ 이창희
첫째 날의 목적지는 백두산 산행의 관문인 이도백하였다. 도중에 바라본 들판은 누렇게 마르고 있는 옥수수밭과 가을걷이를 기다리는 논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어딘가 황금빛으로 펼쳐진 우리 땅의 모습처럼 보였고, 들판 사이사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들도 우리네 풍경과 닮아 있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을 외면했던 대립의 역사가 안쓰럽고, 연변의 조선족 동포에 대해 쌓여 있는 편견이 무척이나 미안한 여정이었다.
▲ 너른 벌판엔 수확을 기다리는 논이 가득 펼쳐져 있다. 풍요로운 평원은 부지런한 조선의 민족들에게는 최적의 터전이었다. 우리 민족 역사의 한 가운데, 두만강 저편의 조상들은 이 땅을 부지런히 일궈내며 우리의 터전으로 만들었다. 펼쳐진 논과 마을들은 우리의 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 이창희
'강원도 반점'이라는 간판이 반가운 강원도 출신 주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푸짐하게 저녁을 먹고 숙소에 짐을 풀었다. 내일은 서쪽 등산로를 따라 천지를 보러 떠나는 날이다. 쉽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천지의 신에게 꼭 만나고 싶다는 기원을 던지며, 잠을 청했다.
'천지의 산신령님. 내일 꼭 만나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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