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대통령이 시정연설 전에 봤어야 할, 학생들의 일침
[아이들은 나의 스승 174] 세 명의 대학생이 말하는 '대학입시제도'의 대안
▲ 지난 15일 오전 강원 춘천고등학교에서 고교 3학년 수험생들이 전국연합학력평가 응시를 준비하고 있다. 이번 시험은 대입 수능을 한달여 앞두고 마지막으로 치러지는 학력평가다. ⓒ 연합뉴스
"제도의 개선 아닌,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교육부가 학교생활기록부종합전형(학종) 개선안 마련에 착수했다는 소식에 아이들은 이구동성 이렇게 말했다. 학벌 구조가 온존한 상태에서는 그 어떤 대학 입시도 공정할 수 없다며, 애먼 학종만 탓할 게 아니라고 덧붙였다. 누군가 구성원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공정한 대학입시를 창안해낸다면 단연 노벨상감이라고도 했다.
지난 주말 저녁, 올해 갓 대학에 입학한 세 명의 제자들과 만났다. 그들은 서둘러 군대에 다녀오겠노라 작별 인사를 하러 부러 옛 담임교사를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졸업 후 오래간만에 만난 자리인데도 아이들끼리 서로 안부를 묻기는커녕 약속이라도 한 듯이 '철 지난' 이야기를 꺼냈다. 단연 화제는 '조국'을 지나 대학입시로 모아졌다.
셋 중 윤서(이하 모두 가명)는 정시로, 나머지 진우와 혁민이는 수시로 대학에 진학했다. 공교롭게도 진우는 학교생활기록부교과전형(교과전형), 혁민이는 학종을 통해 합격했다. 다행히 재수하지 않고 모두 대학 진학에 성공은 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통과한 대학입시 전형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다음은 그들과 나눈 대화를 간추린 것이다.
정시: "학교는 출석만 하는 곳"
우선, 정시는 학교 교육과 병행할 수 없는 입시 전형이라고 잘라 말했다. 학교 수업은 인터넷 강의를 따라하는 방식으로 획일화할 것이고, 학교는 대학입시에 특화된 사교육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교과서는 기출 문제집으로 대체되고, 모든 교과가 문제 풀이 수업 방식으로 진행될 거라는 지적이다. 윤서는 이를 '학교의 학원화'라고 이름 붙였다.
수능 대비 모의고사만으로도 학교 교육은 엉망이 된다면서, 그의 고3 시절 경험을 들려주었다. 1, 2학년 때만 해도 전국연합모의고사가 1년에 두세 차례에 불과했지만, 고3이 되면 그것 말고도 매월 모의고사와 씨름해야 할 만큼 학교생활의 가장 중요한 일과라며 혀를 내둘렀다. 고3들 사이에서는 모의고사를 치르기 위해 학교에 다닌다는 우스갯소리마저 있단다.
하긴 전국연합모의고사는 학교별 성적 비교가 오랜 관행이어서 일선 교사들에게도 적지 않은 부담이 된다. 모의고사를 앞두고 성적 향상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라는 압박이 가해지고, 성적에 대한 부담은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전이된다. 실제로 일부 교육청에서는 학교별 모의고사 성적 자료를 대학교육협의회와 공유하고 언론 등에 공개하면서 경쟁을 부추기고 있다.
▲ 201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지는 2018년 11월 15일 오전 서울 중구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에서 수험생들이 긴장된 모습으로 고사장에 시험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 이희훈
"남자라면 정시지!"
일찌감치 수시를 포기한 아이들이 친구들 앞에서 떠벌리고 다니는, 이른바 '정신 승리법'이다. 1, 2학년 때 내신 성적이 좋지 않을 경우, 3학년 1학기 즈음이면 고3 교실마다 흔히 듣는 이야기다. 요즘 들어서는 아예 2학년 1학기만 돼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데, 정시는 그들을 위한 마지막 동아줄인 셈이다. 그들은 오늘도 '수능 대박'만을 되뇌며 등교를 한다.
윤서는 '정시파'의 학교생활은 등교와 출석이 사실상 전부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 어떤 교육활동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어차피 정시는 수능을 100% 반영하는 전형이니, 내신 성적과 학교생활기록부에 연연할 필요가 없는 탓이다. 심지어 정규수업 시간에 따로 인터넷 강의를 볼 수 있게 해달라며 황당한 요구를 늘어놓는 아이들도 있다.
모둠학습이나 프로젝트 수업은 시작부터 삐걱거리기 일쑤다. '정시파' 아이들로 인해 학급별로 모둠 편성 자체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수시를 준비하는 아이들끼리 모둠을 꾸리자는 주장부터, 그럴 거면 아예 학년 초 반을 편성할 때부터 수시반과 정시반을 나누어 수업을 진행하자는 이야기까지 거침없이 나오고 있다.
그들에겐 수행평가는 말할 것도 없고, 동아리활동도, 봉사활동도 관심 밖이다. 그 시간에 수능 대비를 위해 기출 문제 하나라도 더 풀어보는 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시로 진학하는 비율이 낮다고 해도, 교과전형이나 학종에 견줘 이것저것 눈치 볼 일도, 신경 쓸 일도 없으니 차라리 공부하기 편하다고 말한다.
수시 교과전형: "단 한 순간도 소홀할 수 없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진우도 교과전형에 대해 할 말이 많다고 했다. 수능은 '한 방'인데 반해 교과전형은 '여러 방'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모든 교과가 상대평가인 탓에 내신 등급에 대한 스트레스를 3년 내내 안고 가야 한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험 전 날엔 잠도 제대로 못 잔다며 하소연했다.
수능 응시 과목뿐만 아니라 3년 동안 교육과정 내 모든 교과를 단 한 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어, 내심 '정시파'가 부러울 때가 많단다. 대개 학기 말 한꺼번에 부과되는 교과별 수행평가를 해내느라 허덕일 때면, 당장 정시로 갈아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고 말했다. 참고로, 교과전형은 오로지 3년 동안의 교과 내신 성적만을 기준으로 하는 입시 전형이다.
무엇보다도 교과전형의 가장 큰 폐해는 '짝꿍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라는 점이다. 상대평가에서는 자신의 내신 등급을 올리려면, 어떻든 친구의 등급이 내려가야 하는 법이다. 동점자가 많아도 안 된다. 동점자가 여럿이면 규정상 아래 등급으로 매겨진다. 예컨대, 1등급은 4% 이내인데, 동점자 수가 4%를 넘으면 모두 2등급으로 처리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정작 자신의 성적보다 친구의 성적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명문대 진학을 위해서는 친구를 밟고 올라서야 한다는 건, 결국 3년 동안 교실이 1, 2점에 희비가 엇갈리는 살벌한 전쟁터라는 걸 의미한다. 교과전형에서는 100점보다는 1등이 중요하고, 내신 1등급만 될 수 있다면 점수가 몇 점이든 상관이 없다. 진우는 '수능에선 적이 멀리 떨어져 있는데, 교과전형에선 적이 바로 가까이에 있어 고통스럽다'고 말했다.
학종: "성적은 기본... 분업화된 입시전형?"
▲ 학종은 신경 쓸 부분이 많다. ⓒ 픽사베이
혁민이는 진우 앞에서 '굼벵이 앞에서 주름 잡는 격'이라며 놀려댔다. 교과전형은 오로지 내신 성적만 신경 쓰면 되지만, 학종에서 내신 성적은 '기본'일 뿐이라는 거다. 주지하다시피, 학종은 계량화된 숫자로 표현되는 교과별 내신 성적과 함께, 자율활동, 동아리활동, 봉사활동, 진로탐색활동 등 다양한 비교과 활동을 모두 반영하는 입시 전형이다.
학종은 내신 성적이 받쳐주지 않으면 애초 지원이 불가능한 전형인 셈이다. 중간, 기말 시험과 교과별 수행평가, 하다못해 영어듣기 평가까지도 꼼꼼히 챙겨야 하는 건 교과전형을 준비하는 친구들과 큰 차이가 없다. 거기에 진로와 연관된 봉사활동과 동아리활동도 결코 소홀할 수 없다. 또 수상실적도 무시할 수 없으니 교내 대회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참가해야 한다.
학종은 학교생활기록부(생기부)에 한 글자라도 더 기록하기 위한 전쟁이다. 학교마다 온갖 편법이 난무하면서 생기부에 기재할 수 없는 항목이 늘어나곤 있지만, 그럼에도 '생기부 꾸미기 경쟁'은 좀체 식을 줄 모른다. 숫자로 표기되는 내신 성적과는 달리, 정성평가 방식인 비교과 활동은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탓인지, 친구들과 비교하며 끊임없이 불안해한다.
여전히 '잘 나가는' 부모의 도움을 받아 봉사활동을 해결하고, 알짜배기 진로탐색활동을 벌인다. 또 학교마다 오로지 대학입시를 위한 '한 해 살이' 동아리가 명멸한다. 혁민이는 학종을 두고 '내신은 자녀가 준비하고, 비교과 활동은 부모가 챙기는' 분업화된 입시 전형이라고 비아냥거렸다. 이는 아무리 학종을 개선한다고 해도 결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고 잘라 말했다.
"학벌에 따른 차별을 없애는 게 정답인데..."
▲ “경쟁과 차별을 멈추자”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2018년 11월 1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 앞에서 ‘대학입시 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 소속 회원과 대학입시거부를 선언한 청년,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촛불청소년이권법제정연대 회원들이 입시경쟁과 학벌사회를 비판하며 다양한 삶이 보장될 수 있는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 유성호
세 명 모두 자신이 선택한 입시 전형을 두고 최선은커녕 차선도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각자의 여건에 맞춰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한 것일 뿐이라고 했다. 대학입시가 교육과정을 좌지우지하는, 곧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현실에서는 그 어떤 입시 전형이 도입된다고 해도 공정성 논쟁은 피할 수 없으며 끝내 학교교육을 파행으로 몰고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나아가 애초 '공정한' 시험이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수능도 단순한 정량평가 방식이기에 공정해 보일 뿐이라고 말했다. 누군가 그러한 수능 식의 공정함에 동의한다면, 교육과정이 무력화되고 학교교육이 만신창이가 되어도 좋다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덧붙였다. 애먼 시험을 공정하게 한답시고 호들갑떨 게 아니라, 사회를 공정하게 할 궁리를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화가 끝날 무렵, 혁민이는 '차별 금지법'을 제정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대안이라고 말했다. 내내 대학입시에 대해서 갑론을박 해놓고선 '차별 금지법'을 말하는 게 순간 생뚱맞게 들렸지만, 셋 모두 묘안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학벌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하고 일벌백계하는 것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돼버린 우리 교육을 정상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차별 금지법'을 통해 해묵은 학연과 지연을 끊어낼 수 있다면, 온 국민이 죽기 살기로 대학입시에 '올인' 하는 현실을 크게 완화시킬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윤서는 친구들 중에 진정 공부하기 위해 대학에 진학한 경우는 단 한 명도 없었다면서, 제도 개선 운운하는 교육부의 안이함을 질타했다. 제일 처음에 밝혔듯이, 제도 개선이 아니라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