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와 백두산까지 건드린... 이영훈 교수의 위험한 사고
[반일 종족주의 13] <반일 종족주의>에 나타난 어설픈 논리
<반일 종족주의>가 논란입니다. 몇 회에 걸쳐 이 책의 문제점을 짚어봅니다.[편집자말]
▲ 이승만TV에서 <독도, 반일 종족주의의 최고 상징>이란 제목으로 반일종족주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는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 이승만 TV 유튜브 캡처
이영훈 교수의 목표는 한국 민족주의, 아니 종족주의의 타파다. 그는 한국 민족주의를 민족주의로 쳐주지 않는다. <반일 종족주의> 프롤로그에서 그는 "한국의 민족주의는 서양에서 발흥한 민족주의와 구분"된다며 "차라리 종족이라 함이 옳습니다"라고 주장했다.
<반일 종족주의> 제13장에서 그는 한국인들의 정신세계를 "저열한 정신세계"로 저평가했다. 한국인들의 정신세계를 이처럼 낮게 평가하고 있으니 한국 민족주의도 종족주의 수준으로 폄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종족주의에 불과한 한국 민족주의를 허구의 존재, 상상의 존재, 환상의 존재로 인식한다. 그리고 그것의 해체를 추구한다.
이 교수의 접근법
그런데 그는 독도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독도보다 파괴력이 훨씬 더 큰 상징적 공간이 있다는 생각에서다. 제13장에서 그는 "남북한을 통틀어 민족주의의 최고 상징을 들자면 아무래도 백두산"이라고 말한다.
그는 '독도는 원래부터 한국 땅이 아니었기에, 한국인들의 머릿속에 독도가 자리잡은 것도 얼마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독도에 대한 애착이 강한 현대 한국인들과 달리, 대한제국 이전만 해도 독도에 대한 한국인들의 애착이 강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그것을 독도는 한국 땅이 아니라는 정황 증거 중 하나로 제시한다.
한국인들이 독도에 주목하는 것은 일본이 이곳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옛날 한국인들이 독도에 주목하지 않은 것은 그곳이 우리 땅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그때는 일본이 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반도에는 447개의 유인도와 3천여 개의 무인도가 있다. 우리가 주목하는 섬은 그중 몇몇에 불과하다. 이영훈 교수의 논리대로라면, 주목을 받는 몇몇 섬 외에는 모두 다 일본령이나 중국령이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 31일 하늘에서 본 독도. ⓒ 국회사진취재단
이영훈 교수는 동일한 논법을 백두산에도 적용한다. 백두산이 한국인들의 머릿속에 자리를 잡은 게 그리 오래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백두산에 대한 애착이 생긴 게 오래전이 아니므로 백두산을 중심으로 민족주의를 형성하는 것은 역사적 근거가 별로 없다는 메시지를 던지고자 하는 것이다.
백두산에 관한 그의 이야기는, 13년 전인 2006년 2월 기무라 미쓰히코 아오야마가쿠인대학 교수 등 26명과 함께 쓴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에도 등장한다. 그는 이 책 맨 앞에 백두산 이야기를 배치했다. 그만큼 비중 있게 취급한 것이다. 이때 쓴 글을 최근 상황에 맞춰 <반일 종족주의> 제12장 '백두산 신화의 내막'에 편입시켰다.
<반일 종족주의>에서 이영훈 교수는 '백두산이 민족의 영산'이라는 관념은 20세기에 와서야 형성됐다면서, 조선시대까지는 백두산을 신성시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백두산이 민족의 영산으로 바뀌는 것은 식민지기의 일입니다"라는 것이다.
그가 제시한 근거 중 하나는 조선 후기 문신인 서명응(1716~1787년)의 이야기다. 1700년대의 저명한 지식인인 서명응의 글에 나오는 백두산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백두산'이 아니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백두산을 바라보는 옛날 사람들의 인식이 오늘날과 달랐음을 강조하고자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반일 종족주의>에서 이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조선왕조 1776년의 일입니다.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서명응이 백두산에 올랐습니다. 그는 한동안 정상의 경관에 취해 있다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직 이 하늘 아래의 큰 연못에 이름이 없는 것은 나로 하여금 이름을 짓게 하고자 함이 아닌가' 그러고선 태일택(太一澤)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태(太)는 태극을, 일(一)은 '삼라만상은 하나'라는 뜻입니다. 서명응은 당대의 최고 성리학자답게 뻥 뚫린 화산의 분화구와 그에 담긴 물을 보고 만물이 태극에서 솟았다는 성리학의 원리를 연상하였습니다."
서명응이 오늘날의 천지에 대해 태일택이라는 성리학적 명칭을 부여한 점을 근거로, 이영훈 교수는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백두산은 성리학적 관념이 투영된 대상이었을 뿐, 민족의 영산으로 신성시되는 대상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당시의 백두산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백두산과 전혀 다른 의미를 띠고 있었다는 것이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뭉쳐지는 '종족주의'를 높이 평가할 필요가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이다.
일제와 상호작용 과정에서 백두산이 민족의 영산으로 부각?
하지만 서명응은 백두산을 성리학적 관점으로만 인식하지 않았다. 그 역시 백두산을 신성시했다. 그 증거가 서명응 문집 <보만재집>에 담긴 '유(遊)백두산기'에 분명히 나타난다.
태일택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하루 전날, 서명응은 동행한 관료 및 군인들과 함께 백두산에 제사를 올렸다. 백두산을 무사히 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는 제사였다.
산에 제를 올리는 것은 성리학적 자세가 아니다. 이런 산신 숭배는 우리 민족의 전통 신앙이다. 이것부터가 서명응이 백두산을 성리학 관점으로만 바라본 게 아님을 증명한다.
제사를 지내기 전, 갑산부사가 제문을 준비했다. '백두산 유람기'로 번역되는 <유백두산기> 속의 그 제문을 읽어보면, 당시 사람들이 백두산을 어떻게 봤는지 알 수 있다. 제문 첫머리에 이런 말이 있다.
"우뚝 솟은 백두산이 우리 땅에 계시니, 땅 아래 사람들이 우러러보며 그 전모를 보고자 합니다. 이번에 온 것은 참으로 하늘이 편의를 베풀어주신 덕입니다. 풍찬노숙한 것이 거의 삼천리나 됩니다. 산에 신령이 계시니, 저희의 성의를 살펴주실 것입니다. 구름과 안개를 거두시고 장엄한 모습을 보여주시옵소서."
▲ <유백두산기>의 앞부분. ⓒ 서명응
당신의 전모를 보여 달라며 백두산에 기도하는 모습은, 어느 정도라도 이 산을 신성시하지 않고는 생길 수 없다. 삼수부사가 준비한 두 번째 제문에서도 비슷한 정서가 배어 나온다. <유백두산기>에 담긴 삼수부사의 제문 중 일부는 이렇다.
"우리나라 백두산은 중국의 곤륜산과 같으니, 해동의 한쪽 땅에 사는 사람들이 한번쯤 백두산에 올라 저 웅대한 경관을 보지 못한다면, 그 한스러움이 어떠하겠습니까?"
중국 명산인 곤륜산(쿤룬산)은 신선의 산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곤륜산에 백두산을 빗댄 것은 조선시대 사람들이 백두산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보여준다.
그런데 삼수부사가 백두산과 곤륜산을 연계시킨 것을 근거로, 이영훈 교수는 엉뚱한 결론을 이끌어낸다. 서명응보다 10년 먼저 백두산을 답사한 박종이란 선비의 <백두산유록>에 "백두산이 곤륜산의 적장자"라는 표현이 있다는 점을 근거로, 이영훈 교수는 "그의 백두산 인식은 '조선의 소중화'라는 역사의식과 궤를 같이"한다고 <반일 종족주의>에서 말했다.
조선을 중화의 아류로 자처하는 소중화의식이 조선시대 선비들의 글에서 드러난다고 이영훈 교수는 주장한다. 백두산을 신성시하는 인식을 그들한테서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박종이 중화문명을 신성시하는 마음에서 '백두산이 곤륜산의 적장자'라고 말했으므로 삼수부사도 동일한 마음으로 '백두산이 곤륜산과 같다'고 말했으리라는 게 이영훈 교수의 판단이다.
하지만 <백두산유록>을 읽어보면, 박종이 그런 뜻으로 말하지 않았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곤륜산 아래로는, 중국의 산천이라도 규모가 백두산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했다. 곤륜산을 제외하면 중국의 어느 산도 백두산을 능가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백두산이 곤륜산의 적장자라고 말했던 것이다.
물론 백두산을 중국 명산에 비유하는 것은 사대의식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백두산을 중국 명산에 빗대었다고 해서 백두산을 신성시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명산과 비교한 것 자체가 백두산을 남달리 인식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영훈 교수는 '선비들한테서 백두산을 신성시하는 인식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백두산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은 비교적 최근에 생긴 것'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또한 서명응·박종의 글을 편파적으로 해석해 백두산과 한국을 단절하고 나아가 한국 민족주의의 상징적 공간적 하나를 지우고자 했다. 한국인들의 머릿속에서 백두산을 지워버림으로써 한민족 통합의 구심점 하나를 없애려 했던 것이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논리
▲ 백두산 천지. ⓒ 김종성
그런데 이영훈 교수가 백두산에 대해 그 같은 인식을 갖게 된 동기가 흥미롭다. <반일 종족주의>에서 그는 자신이 백두산을 재인식하게 된 사연을 소개했다.
"1991년 저는 백두산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이때는 그가 도요타재단의 지원을 받아 식민지 근대화론을 합리화하는 <근대 조선의 경제구조>를 펴낸 지 2년 뒤이고, <근대조선 수리조합 연구>를 펴내기 1년 전이었다. 한국 민족주의의 해체를 위해 그 어느 때보다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 시기에 백두산에 오른 그에게 인식의 변화가 생겼다. 위 문장에 이어서 나오는 대목은 이렇다.
"그런데 바로 그날부터 저는 회의하기 시작했습니다. 백두산을 중국에서는 장백산이라고 부릅니다. 하산하는 길에 장백산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을 자세히 읽으니, 15세기까지도 화산 활동을 했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아주 오래전의 백두산 천지 그곳은 화산의 분화구였습니다. 용암이 벌겋게 끓어오르는 분화구였습니다. '그런 곳에 하늘에서 단군이 내려오셨다니 그것 이상한데'라는 회의였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무슨 자료를 읽다가 백두산 이야기가 나오면 유심히 메모해두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선 알게 되었습니다. '아, 백두산이 민족의 영산으로 된 것은 20세기의 일이구나'라고 말입니다."
백두산 중국 측 안내판에 적힌 '15세기까지도 화산 활동을 했다'는 문구가 자신의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15세기까지도 화산 활동을 했다면 고조선 건국 이전에도 그랬을 텐데, 단군의 아버지인 환웅이 어떻게 이런 곳에 강림해 나라를 세웠다는 건가?' 하는 의문이 생겼던 모양이다.
<삼국유사> 단군신화 편에 나오는 '환웅의 태백산(백두산 비정) 강림'이 환웅 세력의 이 지역 진출을 상징적으로 서술한 것이라는 점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실제의 환웅이 용암 벌겋게 끓는 백두산 천지에 강림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 이영훈 교수는 '백두산이 화산 활동을 하는 것'과 '백두산 및 인근 지역에서 인류가 활동하는 것'이 얼마든지 양립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 같다.
또 이영훈 교수는 서명응과 박종이 다녀갈 당시에도 백두산이 화산 활동을 했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았다. 2004년 한국암석학회 학술발표회 때 나온 윤성효·원종관·이문원의 공동 발표문 '백두산의 화산 활동과 형성 과정'에 따르면, 백두산 천지에서는 15세기 이후에도 분화 활동이 계속 있었다. 이영훈 교수가 봤다는 안내판 내용과 달리 15세기 이후에도 화산 활동이 계속 있었던 것이다.
공동 발표문에 따르면, 1668년에도 있었고, 1702년에도 있었고, 1903년에도 있었다. 이 시기에도 백두산 주변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화산 활동이 있었다고 해서, 그 주변에서 인류가 활동할 수 없는 것은 아닌 것이다.
환웅의 백두산 강림 이야기는 고려시대 이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다. 단군 신화를 소개한 <삼국유사>가 고려시대에 편찬된 사실이 그 증거다.
단군 신화는 우리 민족이 백두산을 각별하게 생각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단군 신화를 거론하면서 한민족과 백두산의 연계를 부정하려 한 이영훈 교수의 접근법은 그래서 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백두산을 한민족의 머릿속에서 삭제함으로써 한국 민족주의 아니 '종족주의'를 타파하려 한 그의 작전은 애초부터 성공 가능성이 낮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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