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영씨, 당신이 버텨낸 삶을 응원합니다
[오늘날의 영화읽기] < 82년생 김지영 >에게 74년생 이창희가
▲ 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 82년생 김지영 >(2019)을 보면서 그녀를 도와주었던 이름모를 수많은 여성들의 연대에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그녀들 중 하나였던 버스의 스카프 여인의 입장에서 김지영에게 편지를 써 보았어요. 우리들 모두, 조금은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연대해 보면 어떨까요? - 기자 말
그동안 잘 지냈어요? 이제 시간도 많이 지났으니, 지영씨는 나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겠어요. 즐겨보는 잡지에서 지영씨가 쓴 것만 같은 글을 읽다가, 불현듯 그날이 떠올랐어요. 지영씨가 작은 아이의 소중한 엄마가 되어있다는 소식에 환하게 행복해 지기도 했구요.
지영씨는 급하게 전화기를 빌려서 아버지께 메시지를 보냈었죠. 그런데, 내리는 정류장에 어른은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고, 지영씨를 따라 내리는 그 아이의 모습에 마음이 급해졌어요. 목청껏 기사 아저씨를 불렀고, 무슨 구실이라도 만들어서 지영씨 옆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그 구실이란 것이 계속 내 목에 두르고 있던 스카프였다니, 지금 다시 생각해도 우습죠?
면접에서 나이 지긋한 임원이 건넨 말
▲ 영화 < 82년생 김지영 > 스틸 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지영씨. 내 얘기를 해도 될까요? 그날도 나는 하루 종일 회사에서 시달리고 퇴근하던 길이었어요. 당시의 나는 나름 좋은 학교에서 박사학위까지 마치고, 처음으로 직장이란 것을 갖게 되어 무척이나 신이 나 있었어요. 그런데 마주한 세상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많이 다르더군요. (아마, 이제는 지영씨도 잘 알겠네요.) 첫 직장이었던 대기업의 연구조직은 200명 정도였는데, 그중 여자 연구원은 한 손에 꼽을 정도였어요. 면접에서 나이 지긋한 임원에게 들었던 말이 아직도 생생해요.
"회사 정책(여성 할당제)이 있으니 너를 뽑기는 해야 하는데, 여자라고 안 봐줄 테니 제대로 해."
그때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챌 수 있었어요.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면 나를 뽑지 않았을 것이라는 협박이잖아요. 그 말은 그 후의 내 삶에도 끊임없이 영향을 미쳤어요. 어떻게든 그들이 원하는 만큼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나의 능력으로 그들을 만족시켜야 한다고 끝없이 나 자신을 다그쳤어요.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오랫동안 그들의 방식으로만 돌아가던 회사라는 거대한 조직은, 나를 선뜻 받아들이지 않더라고요. 그런 느낌 알아요? 같은 제안을 해도 남자 동료가 하면 더 쉽게 받아들여지는 느낌, 말이에요.
그날도 그런 피곤한 논쟁이 밤늦게까지 이어졌던 하루였어요. 벌써 몇 번이나 수정한 보고를 계속 퇴짜 놓는 부장한테 '내일 다시 보고하겠다'는 약속을 한 후에야 빠져나올 수 있었던, 온몸이 젖은 솜뭉치처럼 느껴졌던 날이요. 매번 자료를 고치고 논점을 수도 없이 다듬으면서, 힘들게 만든 기회였지만 남자 동료에게 넘겨주는 게 나을까, 얼마나 고민했었는지 몰라요. 그렇게 하는 편이 나았을까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잘 모르겠어요.
잘 버텨주었어요. 김지영씨, 고마워요
▲ 영화 < 82년생 김지영 > 스틸 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이 책임. 자네는 정말 사회성이 떨어지는 것 같아."
결국은 과제를 중단하는 것으로 결정이 난 후, 자기 자리로 부른 부장이 던진 말이었어요. 나는 저 말이 무슨 뜻인지, 그 후로도 오랫동안 곱씹어야 했답니다. 그때까지,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일하는 것에는 자신이 있다고 믿었는데 말이죠. 지영씨는 나를 잘 알지 못하니, 저 말이 쉽게 다가오지는 않겠군요. 나는 저 말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 자'라는 뜻이라는 걸, 한참이나 더 시달리고서야 알았어요. 바보 같죠?
지영씨, 나는 그 후로도 직장을 몇 번이나 옮겼고, 아직은 버티면서 일을 지키고 있어요. 여전히 그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도 말하지도 않아서, 그들의 세계엔 들어가지 못했지만 말이죠. 이런 내 삶이 크게 자랑스럽지는 않지만, 그날 지영씨를 만난 그 버스의 기억은 꽤나 오랫동안 나를 깨어있게 했어요. 그날의 버스는, 세상의 규칙에 억지로 구겨 넣으려던 나를 깨닫게 했고, 그들의 규칙이 아닌 나의 방식대로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했어요. 하지만, 그동안 우리들이 살아야 하는 세상을 더 좋게 바꾸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네요.
오늘 오랜만에 지영씨의 삶이 느껴지는 글을 읽으면서, 그날의 지영씨를 떠올릴 수 있어서 좋았어요. 지영씨가 힘들게 견뎌내야 했을 그 모든 순간들이 무척이나 대견했고 감사했답니다. 잘 버텨주었어요. 김지영씨, 고마워요.
이 세상은 거대한 빙하 같아서, 우리의 속도로는 미처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천천히 변하는 것만 같아요. 각자의 자리에서 버티는 것만으로 얼마나 빠르게 변화를 이뤄낼 수 있는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그래도 느려지게 하거나 거꾸로 되돌리지는 않을 것이라 믿어요. 지영씨의 아이에겐 좀 더 나은 세상을 넘겨줄 수 있겠죠?
이런! 반가움에 수다가 너무 길었어요. 항상 건강 챙기고요.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