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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석춘-이영훈에게 절망, 일본사람 '스미에'에게 희망

[작은책이 만난 사람] 쓰즈키 스미에가 만난 '위안부' 이야기 '풀'

등록|2019.11.09 10:45 수정|2019.11.09 10:45
"평범한 사람에게 시집가서 남들처럼 자식 낳고, 평범하게 살고 싶다."  

이옥선 할머니는 열다섯 살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런 삶을 살고 싶었다고 했다. 울산의 한 식당에서 식모살이하던 열다섯 살 '옥선이'는 심부름을 다녀오다가 길 한가운데에서 모르는 남자 두 명에게 붙잡혀 끌려갔다. 1942년 7월 29일. 기나긴 악몽의 시작이었다. 끔찍한 '일본군 위안부' 생활이 시작됐다.

<풀>은 이옥선 할머니의 삶을 담아낸 만화책이다. <지슬>을 그린 작가 김금숙 씨가 만화를 그리고 보리출판사에서 2017년에 출간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일본에서 출판하기 위해 크라우드 펀딩을 해서 마감 기한을 무려 41일이나 앞두고 목표액 145만 엔을 달성한 일본인이 있다. 쓰즈키 스미에 씨다.

이 크라우드 펀딩이 성공하여, 만화 <풀>의 일본어판은 내년 1월 초판 2000권이 나올 예정이다. 일본인이라면 대부분이 일본군 '위안부'를 인정하고 싶지 않고, 그런 추악한 짓을 저질렀다는 걸 감추고 싶을 텐데 대체 스미에 씨는 왜 일본의 추악한 역사를 들춰내는 걸까. 그리고 왜 이 만화를 일본어판으로 출판하고 싶어 할까. 그이가 일본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했다.

쓰즈키 스미에 씨는 요즘 한국에 머물고 있다. 2016년 8월 말에 한국에 들어와 성공회대학교 NGO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석사 학위 논문 제목은 <조선인/일본인 외할머니의 여정>이었다. 지난 10월 3일 일요일 스미에 씨를 <작은책> 사무실에서 만났다.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소통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로 스미에 씨는 한국말을 잘했다. 먼저 책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 물었다.

"도쿄에 한국 친구가 있는데 제가 번역한 것을 그녀가 감수하고 있어요. 예정대로 내년 1월이면 나올 거 같아요."

이 책을 일본어판으로 내게 된 계기는 나중에 밝히기로 하고 먼저 스미에 씨의 삶을 되돌아본다. 그이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조선인/일본인 외할머니의 여정>이라는 논문 제목에서 보이듯이 스미에 씨의 외할머니는 조선인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조선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닌 디아스포라의 삶을 산 듯이 보인다.

스미에 씨의 어린 시절

스미에 씨는 1952년에 일본 오카야마현에서 태어났다. 그이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은 외할머니(1913년생)였다(스미에 씨는 외할머니를 그냥 '할머니'라고 말했다).
 

▲ 쓰즈키 스미에 씨의 어머니가 어렸을 때 오카야마에서 찍은 가족사진. 왼쪽부터 스미에 씨의 어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사진 제공_ 쓰즈키 스미에 ⓒ 쓰즈키 스미에


일제 강점기에 스미에 씨의 외할머니는 충청북도 청풍에서 살고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일본인이었다. 일찍이 조선전력회사 직원으로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인 이나다 히데자네 씨는 외할머니와 1930년대 후반 즈음부터 동거한 걸로 스미에 씨는 짐작한다. 그런데 그때 이미 외할머니는 조선인(행방불명) 남성 사이에 낳은 딸(진숙, 1933년생, 스미에 씨의 어머니)이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1945년 패전 후 일본으로 강제 송환돼 오카야마현(현재 오카야마시)으로 갔다. 조선인 여자와 결혼했다는 이유 때문에 가족들이 반대해 고향으로 가지 못했다. 스미에 씨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조선에 남았다. 하지만 일본인과 결혼한 집안이라며 조선인들에게 멸시를 당했다. 외할머니는 도저히 조선에서 살 수가 없었다. 외할머니는 딸을 데리고 무작정 오카야마로 건너갔다. 그 무렵 전화도 없고 소식을 전할 길 없는 척박한 환경에서 외할아버지와 만난 것은 기적이었다.

돈 한 푼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야 했다. 다행히 외할아버지는 영어를 조금 할 줄 알았다. 전쟁이 끝나고 진주한 외국군한테 통역을 하면서 밀가루 같은 식량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식량으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오카야마 대학병원 앞에 만두를 파는 분식집을 열었다. 가끔 고기를 팔았는데 맛있다고 소문이 났다.

"식당이 잘돼 야키니쿠(구운 고기) 식당을 시작했어요. 진주군한테 밀가루라든가 여러 식량을 받아서 그걸 할머니가 요리를 만들고 팔고 그런 식으로. 외할아버지가 인텔리였기 때문에 대학병원 의사 선생님들과 너무 사이좋게 돼서 인기가 많았어요. 식당 번영하고 손님 많이 오셨어요."

스미에 씨의 어머니 진숙 씨는 그 무렵 고등학교를 다녔다. 군대에서 막 제대한 젊은이가 식당에 밥을 먹으러 왔다가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진숙 씨를 보고는 한눈에 반해서 연애를 했다. 얼마 뒤 진숙 씨가 임신을 하는 바람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이것은 스미에 씨의 추측이다.) 결혼을 하게 됐다. 둘 사이에 쓰즈키 스미에 씨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비행기 가미카제 특공대에 남아 있었던 사람이에요. 두 번이나 비행기가 추락했는데 살아남았대요. 8월 15일 이후에 일본이 전쟁을 계속했으면 우리 아버지도 죽었어요. 그런데 전쟁이 끝나서 살아남았어요. 아버지도 재산이 없었어요. 그래서 우리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1952년에 태어난 쓰즈키 스미에 씨

스미에 씨는 당연히 일본인 국적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일본어로 말하는 일본인이었다. 아주 잘살지는 못했지만 어린 시절은 행복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조선에서 태어난 조선 민족의 뿌리를 가지고 있어서 조금 혼란스러웠다.

"할머니가 한국인이라는 걸 어릴 때부터 알았어요. 우리 할머니는 조선 민족이라는 자긍심이 있었어요. 동포들이 오면 할머니가 조선말로 이야기하셨어요. 할아버지도 할머니의 민족성을 존중하는 그런 가정 분위기였었고."

스미에 씨는 외할머니 덕분에 조선 민족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됐지만 학교에서 가끔 스미에 씨 어머니, 할머니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놀림을 받았다.

"내가 어렸을 때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같이 어울려 놀다가 뭔가 문제가 생겼을 때 조선인이라고 언어 차별을 받았어요. 그것을 집에 와서 할머니한테 얘기를 하면 할머니가 그 아이 집에 가서 조선인이 어디가 나쁘냐?(고 싸우는) 그런 모습을 봤어요."

조선인이라는 사실에 당당했던 할머니와 달리 스미에 어머니는 소극적이었다.

"1세는 당당했어요. 그런데 2, 3세는 너무너무 복잡해요. 내가 그랬었어요. 왜냐면 일본 사회에서 차별이 있었기 때문에 당당할 수 없는 존재였어요."

스미에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0년 4월에 대학교에 입학했다. 스미에 씨는 어릴 때부터 운동을 잘했다. 대학 때는 배구 선수로 활약할 정도로 운동신경이 뛰어났다.

"어머니가 어릴 때부터 나한테 '남녀 차별이 없는 직업이 교사야. 너는 교사가 되는 게 좋을 거야' 하고 말했어요."

스미에 씨도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둘레에 좋은 선생님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선생님이 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스미에 씨는 일본 사회에서 당시 조선 사람한테만 받는 지문 날인이라든가 취직 차별이라든가 결혼 차별 같은 차별을 보면서 성장했다. 외할머니를 자랑스러워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것을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없는 분위기 때문에 함부로 말을 하지 못했다. 복잡한 마음으로 대학생이 됐다. 그런데 대학교 수업에서 교수가 조선인을 무시하는 발언을 했다.

"그 교수님이 '일본에 있는 조선인 중에는 도둑이 많다.'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내 마음이 너무너무 복잡했어요. 한쪽은 화가 나서, '그런 게 아니라고, (그런 말 하면) 안 된다'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한쪽은 왠지 '그렇구나, 역시 그렇구나' 생각하는 마음도 있었고 너무너무 복잡했어요. 그런데 그때 옆에 있었던 친구가, 우리 학교에서 인권 교육을 열심히 하는 그룹 동아리가 있어서 그 친구 중 하나인데, 그녀가 '선생님 지금 발언 이상해요. 차별 발언 같아요.' 그런 것이 계기가 돼서 점점 내 마음 속에 있던 응어리가 폭발했어요. 그런 시기에 남자 친구를 만났어요. 내가 대학교 가기 전에 어머니가 절대 학생운동 하지 마라, 그랬는데 사귀는 남자가 그런 (운동권) 사람이었어요. 하하하!"

인권운동에 뛰어든 스미에 씨
 

▲ 쓰즈키 스미에 씨가 일본어로 번역하고 있는 책, 《풀》(김금숙, 보리출판사, 2017). ⓒ 안건모


스미에 씨는 남자 친구를 만나기 전에는 자신에게 조선인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이 한편으로 부끄럽기도 했고 여느 일본인과 다르다는 의식에 사로잡혀 있기도 했다.

"여름에 만나서 가을에 동거하고 봄에 결혼했어요. 하하하! 3학년 때. 우리 남편 재미있는 사람인데 그때 데이트할 때 학습(만 했어요). 공원 벤치에 둘이 앉아서 '마르크스 레닌이 이런 말 했다, 마오쩌둥이 이런 말 했다.' 남편은 그런 영향 많이 받았던 사람이에요."

남편과 연애할 때 마르크스, 레닌 사상과 사회과학, 시국 이야기만 주고받았다는 말이다.

"내가 조선인 할머니 이야기하면 남편이 '차별이라는 문제는 개인 문제가 아니다, 사회구조 문제'라고 설명해 줬어요. 그래서 '네가 창피해 할 필요가 없다. 당당해라.' 그때부터 내 안에 있던 가치관이 180도 바뀌었어요. 그렇구나, 창피할 필요 없다 깨달았어요."

남편 덕분에 스미에 씨는 열등한 민족은 없다는 가치관을 갖게 된다. 그리고 스미에 씨는 인권과 평화, 환경에 관심을 쏟게 된다. 그 무렵 일본은 환경 문제가 가장 심각했다.

1960년대부터 고도 성장기에 들어선 일본은 1970년대는 대기오염과 공해 문제가 심각했다. 유기(有機) 수은 중독에 의한 만성 신경 질환인 미나마타병, 카드뮴이 뼈에 축적되어 발생하는 공해병 이타이이타이병, 만성 비소 중독증 등 여러 가지 공해병이 발생했다. 자연스레 스미에 씨는 환경운동에 전념했다. 모리나가 비소 중독 피해자와 연대하는 활동도 했다. 후쿠야마시에 새로 건설되는 화력발전소 저지 운동도 치열하게 했다.

"만약 화력발전소가 생기면 발전소에서 온폐수가 바다로 흘러요. 바다 해수 온도가 높아질 거예요. 거기에 그 당시 김 양식이 많이 있었고, 만약 해수 온도가 높아지면 피해가 많다고 해서 어민들과 학생, 노동조합원, 시민들이 같이 단결하고 지방 행정부에 저항 운동 했어요. 전단지를 등사기로 밀고 바닷가까지 한 시간 이상 자전거를 타고 어부들 집에 하나하나 나눠 주는 그런 일도 했어요. 저항하는 사이에 계획이 미뤄지게 되고 경제 상황이 나빠져서 그 건설 계획이 취소됐어요."

스미에 씨는 인권운동에도 뛰어들었다. 가장 먼저 '부라쿠해방운동'에 발벗고 나섰다. '부라쿠'라는 말은 마을이라는 뜻의 '부락'이라는 일본 말이다. 부락은 일본에서 특수 천민이 집단으로 살던 곳을 '부라쿠'라고 한 데서 연유했다. 부락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천한 신분 취급을 받았다. 한마디로 우리나라 조선시대 때 '백정'과 똑같은 존재였다.

"에도시대에 무사 계급이 자기 지배 계급을 안정시키려고 농민 밑에 천민 같은 신분제를 만들어서 농민들이 세금을 많이 빼앗겨도 '더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 가난은 할 수 없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분열 지배하기 위해서 만든 계급이 부라쿠예요. 메이지 시대가 돼도 그런 사람들이 계속 사회적인 차별, 경제적인 차별을 받아서 일본 사회 속에서 희생하는 계급, 그런 존재였어요. 그런 사람들이 인간으로서 차별을 스스로 없애려고 운동 조직을 만들어서 일본 부라쿠해방운동, 그 운동을 수평운동이라고 했는데 1920년대 조선의 형평사와 연대했대요."

*형평사운동(衡平社運動)이란 조선에서 1923년부터 일어난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을 말한다.

1975년 3월 스미에 씨는 대학을 졸업한다. 그리고 부라쿠민들이 사는 마을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부라쿠해방운동을 이어 간다. 부라쿠에 살고 있는 아이들과 함께 놀기도 하고 공부도 가르치면서 시의 차별 정책에 저항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월급은 적었어요. 적었지만 그땐 너무 젊어서 그런 인권운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하겠다, 하겠다. 하하하."

스미에 씨는 4년 동안 부라쿠해방운동을 한다. 그 4년은 자기 인생에서 가장 밀도 있는 기간이었다고 회상한다.

"내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경험 많이 받았어요. 부라쿠 사람들도 일본의 조선 사람들과 같은 경험이 있었고 자기가 부라쿠 사람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이 드물었어요.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과 고향을 숨겨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런데 운동을 계속 하면서 자기 책임이 아니다, 사회구조 문제다, 오히려 그렇게 가난한 상황에서 인간답게 살아오는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 사람이 점점 늘어났어요. 사람들이 갈등 많이 했어요. 내가 한 갈등과 비슷한 갈등. 그래서 내가 거기에서 아이들의 여러 가지 공부 가르쳤는데 학교 공부뿐만 아니라 부라쿠의 역사라든가 그런 것도 가르쳤어요."

대개 부라쿠 어르신들은 차별 때문에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그리고 저학력과 차별 때문에 일반적인 직장에 취직하기가 어려워서 불안정한 직업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악순환이었다. 마차에서 물건을 팔거나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부라쿠해방운동 활동가들은 시에다 이들의 안정적인 직업도 요구했다. 비록 쓰레기 회수하는 일이지만 지방정부 직원이 된 사람도 있을 정도로 어느 정도 효과를 보기도 했다.

스미에 씨는 4년 만에 그 지역에서 나온다.

"계속 일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해방운동 안에서 여러 가지 이론이 대립했어요. 그런 영향 받아서 일단 교육 사업을 중지했어요."

그 무렵 스미에 씨는 아이가 둘 있었다. 아이들을 보육소에 맡기고 통신제 고등학교 임시 교사를 했다.

"집에서 리포트를 하거나 일주일에 한 번,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한 번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제도가 있었어요. 그곳을 다녔을 때도 너무너무 귀중한 시간을 보내고 감동을 받았어요. 그다음에 정규직 교사가 됐어요."

금방 교사가 된 듯 말했지만 교사 자격증을 따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체육교사 시험이었는데 1차는 합격했는데 2차에서 떨어졌다. 두 번이나 떨어졌는데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내 사상 행동이 정부에 들어가 있어서... '해방운동한 사람이야. 안 된다!' 하하하! 세 번째 합격했어요."

당시 일본 사회는 사상 검증이 일상화할 정도로 우익이 판치는 사회였다. 그런데 결국 합격한 이유가 뭘까. 궁금해서 집요하게 물었더니 스미에 씨는 잠깐 망설이다가 주먹을 불끈 쥐면서 "아마 실력이 있었기 때문에?" 하고 호탕하게 웃는다.

스미에 씨는 그 뒤부터 줄곧 체육교사로 일한다. 그러나 체육만 가르친 게 아니었다. 스미에 씨는 늘 인간에 대한 사랑이 관심사였다. 그것은 아마 외할머니, 어머니가 살면서 받았던 차별대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일본 중학교에서는 일주일에 서너 시간 특별한 교육부 커리큘럼이 있어요. 과목 상관없이 사회문제라든가 평화, 인간관계, 그런 것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요즘은 조금 제도가 바뀐 게 있는데 (그때는) 그런 게 시간표에 있었어요."

스미에 씨가 교사로 있던 학교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원폭 피해를 입었던 히로시마에 있었다. 의식 있는 활동가들이 평화 문제에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은 당연했다.

"전쟁 때 히로시마에는 그런 피해가 많았다, 전쟁은 안 된다, 평화가 좋다, 그런 식의 평화교육을 했어요. 그런데 내가 어렸을 때부터 받은 차별 문제라든가 학생 때 부라쿠해방운동 등 여러 가지 공부하면서 차별 문제는 피해자 문제뿐만이 아니라 가해자 문제도 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히로시마는 피해 지역일 뿐만 아니라 히로시마가 아시아에 대한 가해, 침략 거점이었다, 군대가 거기 있었어요. 그런 가해 역사도 우리가 알아야 돼! 역사 일부분이 아니라 양면을 다 알아야 돼, 그렇게 생각해서 평화 교육 내용을 만들었어요."

스미에 씨는 아이들과 평화 교육을 하면서 원폭 투하로 피해를 당한 한국인 피폭자들도 2만 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학생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히로시마 평화공원에도 갔다.

"한국인 피폭자 위령비가 지금은 평화공원 안에 있는데 그 당시엔 밖에 있었어요. 이유가 표면적으로는 공원 안에 공간이 없다 그런 핑계였는데 실질적으로는 한국인 위령비를 공원 안에 두기가 싫어서... 밖에 있었어요. 그런 것을 학생들과 같이 그곳에 가서 그 위령비들을 건설하신 목사님들을 만나 직접 이야기도 듣고 학생들과 같이 공부했어요."

그 후에 스미에 씨는 교직원노동조합에서 한국인 피폭자들과 연대하는 사람이 많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 교직원노동조합 안에서도 그런 문제를 열심히 하는 선생님들이 있었어요. 그런 선생들이 한국 피해자들과 교류하는 투어가 있다 그래서 한국에 같이 왔어요."

김학순 할머니의 절규

1990년, 스미에 씨가 서울에 왔을 때 어떤 한국 여성이 일본군 '위안부'였던 할머니를 보호하고 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다. 스미에 씨는 그 사건이 먼 옛날 역사인 줄만 알았는데 현재 그 피해자들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전율이 일었다.

"실제 피해자가 존재하는 모습이 연결되지 않았어요. 옛날에 이런 거 있었구나, 과거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서울에서 그런 소식을 듣고 옛날 얘기가 아니라 지금 문제라고 깨달았어요. 지금은 공개할 수가 없는데 마음의 상처가 너무 커서 우리가 증오하고 있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한국 기독교 여성협의회라던가 하는 단체였어요."
 

▲ 2017년 9월 12일,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을 방문했다. 왼쪽부터 쓰즈키 스미에, 길원옥 할머니, 김복동 할머니. ⓒ 사진 제공 쓰즈키 스미에


다음 해인 1991년 8월 14일 김학순(1997년 작고) 할머니는 공개 증언을 한다. 반세기 가까이 가려졌던 위안부 문제가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당시 그의 회견은, 전쟁범죄에 '위안부는 없다'는 일본의 억지에 '내가 증거다'라고 하는 절규였다.

무엇보다 한 사람의 용기는 '수치스러운 삶', '순결 잃은 여자'라는 낙인에 강요당해 침묵에 잠겨 있던 다른 '김학순'을 깨웠다. 238명의 다른 피해자들 목소리를 끌어냈을 뿐 아니라, 국내를 넘어 북한, 필리핀, 중국, 인도네시아, 네덜란드의 피해자에게까지 닿았다.

그의 증언은 유엔의 결의 및 권고, 아시아연대회의와 2000년 일본군성노예전범여성국제법정 및 세계 각국 의회의 결의 채택까지 수많은 변화를 이끌어 냈다. 그리고 1992년부터 수요시위도 시작됐다.(2018년 8월 13일자 <한겨레> 사설.)

"그때 일본에서 소식을 듣고 그때 말씀하셨던 그 할머니가 김학순 할머니였던가 생각했어요."

스미에 씨는 아이들을 가르칠 때 김학순 할머니가 증언한 내용이 나온 신문기사를 교재로 만들어 가르쳤다. 그런데 그 무렵 '정대협'(한국정신대대책협의회)에서 활동하는 분이 한국인 원폭 피해자 지원 활동에 관련된 행사로 히로시마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스미에 씨는 히로시마까지 가서 정대협에서 활동하는 분을 만났다. 그리고 자기가 하고 있는 활동을 설명했다.

스미에 씨는 한국으로 가서 할머니들을 직접 만나고 싶었다. 한국에 가기 전에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쓴 감상문을 먼저 보냈다.

"학생들이 위안부에 관한 내 수업을 듣고 쓴 감상문, 그것을 그 당시 난 한국말을 할 수 없어서 재일 코리안 친구가 한국말로 번역해 주셨어요. 그걸 정대협에 보냈어요. 그리고 '내가 지금 중학교 교사인데 위안부 문제 가르치고 있다, 피해자 할머니를 직접 만나 뵙고 이야기 듣고 싶다'고 했어요. 그러면 오세요. 그날 우리 아들과 같이 갔어요. 할머니들을 아들이 촬영했어요. 완벽하지는 않지만."

스미에 씨는 그렇게 정대협 분들과 인연을 맺은 뒤, 1994년 2월 28일에 한국 '나눔의 집'을 가게 된다. 나눔의 집은 1992년 마포구 서교동에 개원을 했고, 명륜동과 혜화동을 전전하다가 1995년 12월에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에 건물을 짓고 할머니들을 모신다.

"할머니가, 제 외할머니가 한국 사람이라고 하면 할머니들이 너무 친하게 열심히 이야기해 줬어요. 두 번째 나눔의 집 갔을 때 할머니들이 마음 상처 치유로 그림을 그렸어요. 그림에 너무너무 감동을 받았어요. '이거야!' 김순덕 할머니에게 이야기했어요. '할머니, 내가 교사인데 이 그림을 교재로 학생들한테 보이고 싶어요.' 할머니가 '해라 해라.' 여러 할머니들 작품으로 학생들에게 가르쳤어요. '직접 할머니들이 경험하신 내용이다, 옛날에 어렸을 때 어머니와 같이 밖에서 작업을 했다'라든가, '어느 날은 모르는 사람이 와서 데리고 갔다'라든가, '일본 가는 배에 탔다, 모르는 남쪽 섬에 데리고 갔다', 할머니한테 직접 들은 이야기와 그림을 교재로 만들어 수업을 했어요."

관부재판

'허스토리'라는 영화가 있었다. 관부재판 이야기다. 관부재판은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자 세 분과 근로정신대 피해자 일곱 분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공식 사죄와 보상을 요구한 재판이다. 시모노세키에서 딴 '세키'의 한자음인 '관' 자와 부산의 '부' 자를 합쳐 관부재판이라고 한다. 일본에서 제소된 일본군성노예제 재판 중에 유일하게 일부 승소(1심)한 재판이다. 이 관부재판을 할 때도 스미에 씨는 일본의 다른 활동가들과 지원 단체를 만들어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김순덕 할머니가 일본 홋카이도에서 증언하는 게 있었어요. 그때 일본에서 증언하는 게 너무 힘들었대요. 가해 나라에 가서 일본인 앞에서 자기가 입은 피해를 말하는 게 너무 심리적으로 힘들었대요. 그래서 나보고 같이 가 달라고. 그때 교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강제숙 씨한테 연락해서 갔어요. 그때 할머니 옆에 있어서 지원하면서 홋카이도에서 활동하는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관부재판 2심, 히로시마 올라가고, 그 소식을 들었어요. 그 당시 30만 엔 한국 돈으로 300만 원 배상금, 그런 판결이 났어요.

그런데 할머니들은 완벽한 승소가 아니라고 항소했어요. 일본 정부도 항소. 그래서 2심이 히로시마 고등법원 재판소에 왔어요. 그 소식을 홋카이도에서 할머니랑 같이 갔다가 들었어요. 그래서 히로시마라면 피해 지역으로 사람들이 많이 이야기하는데 아시아에 대한 침략 책임을 지는 그런 점도 있었고 우리가 그런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우리도 지원하겠다, 지원 단체 만들었어요. 히로시마 현에 그 당시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내가 동부지방 지원하는 모임 대표가 돼서. 히로시마에도 하나 있고 북부도 세 개 단체가 열심히 연대해서 재판마다 원고 할머니들을 지원하고 재판 방청하고…"

 

▲ 2018년 11월 7일,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서 참석한 쓰즈키 스미에 씨. ⓒ 사진 제공 쓰즈키 스미에


2심과 3심은 기각됐다. 재판은 졌지만 그 과정에서 피해자 원고 할머니들을 지원하는 한일시민들이 연대하는 성과를 이뤘다. 그런 인연으로 히로시마 교직원 조합과 대구 전교조 지부가 의정서를 교환하고 한일 역사공동교재도 두 권 만든다.

"현대사는 서로 입장 너무 달라서, 너무 문제가 많아서 처음에는 통신사 책을 만들었어요. 역사 인식의 차이가 많아서 쉽지 않았어요."

그동안 스미에 씨는 위안부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수도 없이 한국을 드나들었다. 2013년 가을부터 한국에 머물면서 연세대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공부했다.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지금까지 한국에 머물고 있다.

스미에 씨가 한국어를 배우고 싶었던 계기는 처음에는 외할머니가 조선인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엔 '위안부' 할머니들 때문에 더욱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일본 YMCA어학당을 다녔다.

"피해자 할머니들과 식민지 시대에 강제로 시킨 일본어가 아니라 한국말로 이야기하고 싶어서 시작했어요. 그런데 조금 배워서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피해자 할머니들과 이야기하려면 사투리가 너어무. 하하하!"

하지만 스미에 씨는 이야기할 수 있는 할머니들이 줄어서 안타까워한다. 할머니들이 하나둘씩 돌아가시기 때문이다.

"장례식에 가면 너무 슬퍼요. 김순덕 할머니 장례식도 슬펐고 재작년에 이순덕 할머니 때도..., 관부재판 원고였어요.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몇 번이나..." 
 

▲ 2019년 8월 23일, 김금숙 작가의 작업실에서. 왼쪽부터 김금숙 씨, 쓰즈키 스미에 씨, 리령경 씨, 강제숙 씨. ⓒ 사진 제공 쓰즈키 스미에

 

▲ 2019년 9월 29일, 나눔의 집 이옥선 할머니 방에서 일본어로 펴낼 책 《풀》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 사진 제공 쓰즈키 스미에


 <풀>

이제 이 글 처음에 나왔던 <풀>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자. 앞서 말한 대로 보리출판사에서 나온 <풀>은 소작농의 딸로 태어나 일본군 '위안부'로 살았던 이옥선 할머니의 고단한 삶을 1인칭 시점으로 표현한 만화다. 스미에 씨는 왜 이 만화를 주목하게 됐을까.

"20년 전부터 일본 사회가 점점 더 우익 쪽으로 바뀌고 있어요. 내가 옛날에 자유롭게 한 인권 평화 교육 못하게 됐어요. 그래서 위안부 문제도 중학교에서 적극적으로 가르치는 교사가 많지 않아요. 모르는 학생들이 많아요. 일본 우익들이 할머니들이 거짓말을 한다든가 그런 소리가 많아져요. 그래서 이대로 가면 일본 사회는 과거 책임을 모르는 채, 숨긴 채 아시아에 대해, 세계에 대해 창피한 나라가 되지 않을까, 너무 걱정돼요.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과 지구 시민으로서 연대하기 때문에 필요한 과정이 있어요. 과거에 지은 죄를 정면으로 먼저 인정하고 같은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꼭 전해야 돼요. 이대로 가면 안 된다라고 해서 특히 젊은 사람한테 어떤 방법으로 이런 문제 알릴 수 있는지 생각했어요.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했어요. 그럴 때 이 작품을 만났어요. 이거야! 옛날에 할머니 그림 봤을 때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만화라면 젊은 사람들도 볼 거야. 요즘 한국 젊은이들하고 같지 않을까요? 책을 많이 안 읽어요. 그래서 만화라면 알기 쉬워서 감동받아서 좋은 방법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어요."

<풀>의 작가인 김금숙 씨는 강제숙 씨에게 소개받아 스미에 씨와 친구가 된 사이였다. 만화의 주인공인 이옥선 할머니도 몇 번이나 뵈어 스미에 씨가 잘 알고 있었다.

"이 책을 보면서 뭔가 운명적인 인연을 느꼈어요. '이 책 일본어 번역은 내가 해야지!'라고 생각했어요."
  

▲ 2019년 10월 6일, 작은책 사무실을 방문한 쓰즈키 스미에 씨. 만화책 《풀》에 나온 이옥선 할머니 장면을 보여 주며 설명하고 있다. ⓒ 안건모


뒷이야기

스미에 씨는 자신의 조국 일본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리고 어머니, 외할머니의 나라인 한국을 어떻게 생각할까.

"일본이 전쟁 국가였는데 미국이 그 당시 소련과 정치적인 세력 싸움을 하고 있어서 천황 제도를 남겼어요. 천황 제도를 거래한 거죠. 그래서 우익적인 가치관이 그대로 남아 있어요. 일본은, 미국에 받은 가짜 민주주의, 그래서 본질적인 것은 바뀌지 않았어요. 그것을 악용한 세력이 있어요. 그래서 내가 한국에 와서 공부하면서 한국의 시민들이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는 열심히 활동하는 그런 모습을 전하고 싶어요. 일본에."

스미에 씨는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기사로 써서 일본의 몇몇 기관지에 보내고 있다. 부라쿠해방단체와 '헌법9조지키는모임', '히로시마 위안부를 위해 활동하는 네트워크' 등 한국의 모습을 소개해 달라는 단체에 글을 보내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의 상황을 알기 위해 이곳저곳 열심히 다니고 있다.

"지난번 서초동 촛불시위도 대학원 학교 친구들과 같이 갔어요."

스미에 씨는 한국 사회를 배우기도 하고 알리기도 하면서 박사 논문을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논문은 과연 어떤 내용일까.

"내가 지금까지 해 왔던 활동과 외할머니, 할머니, 어머니가 살아온 3대의 역사를 쓰고 싶은데 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공부는 재미있는데 자료가 많아서 시간이 부족해요. 할아버지가 기록을 많이 남겨 놓았고 사진도 많이 있어요."

그 당시엔 카메라가 귀할 때였는데 외할아버지는 사진을 많이 찍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남긴 수기도 있다. 기록이 중요하다는 걸 새삼 느낀다.

"우리 할아버지가 한국에 왔을 때 신문기사가 있어요. 한홍구 교수가 찾았어요. '히데자네, 일본인인데 현재 한국에 조선전력회사 직원으로 왔다'는 소식이 실려 있어요."

스미에 씨의 외할머니는 2007년, 어머니는 2014년에 돌아가셨다. 일본 집에는 지금 스미에 씨의 남편만 혼자 있다. 스미에 씨가 재미있는 사연을 들려준다.

"우리 남편은 후쿠야마시 직원이었어요. 퇴직하시고. 재미있는 게 내가 집에서 한국 드라마 많이 봤어요. 근데 우리 남편은 처음엔 한국 드라마 재미없다 했어요. 내가 열심히 계속해서 보면 옆에서 같이 보게 돼서 <대장금>, <허준>, 같이 보면서 '재미있다, 다음 이야기 어떻게 되는 거야?' 그렇게 바뀌었어요. 특히 우리 남편이 <대장금>이나 <허준>을 보고 동양의학 관심 많아져서, 특히 허준이 사람들 치료하는 방법, 침, 너무 충격받았어요. 왜냐하면 그 당시 양반 계급은 돈이 많아서 귀한 약으로 치료할 수 있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돈 없어서 침 하나만 이용하면서 치료했다, 너무 감동받아서 이거야! 해서 전문학교 다녔어요."

남편은 결국 국가시험을 봤고 자격증까지 따냈다.

"지금은 우리 집에서 치료해요. 하루에 한두 명, 하하하. 나이 많은 사람이 많아요. 그리고 파킨슨병, 그런 사람들도 있고 마음이 불안한 사람들 상담도 해 주고, 뜸도 해요. 방학 때 내가 일본 집에 가면 인체 실험 대상? 하하하!"

또 다른 사연도 있다. 스미에 씨의 딸이 교사로 오사카에서 살고 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위 어머니도 스미에 씨와 똑같은 중학교 체육교사였다. 지역만 다를 뿐 시기도 똑같았다.

"그래서 우리 오사카 손자들한테 양쪽 할머니가 다 체육교사였어요. 하하. 우연이죠."

인권, 평화 운동하는 성향도 닮았다. 사위의 어머니는 중국을 오가며 인권, 평화 교육을 한다.

"중국과 일본 왔다 갔다 해요. 서로 마음이 맞고 사이 좋아요. 그래서 그 부부가 작년에 내가 서울에 있었을 때 처음 한국에 오셨고 같이 경주 나자레원도 갔어요. 식민지 시대에 조선인 남자와 결혼하고 한국에서 살던 할머니들이 지금 '나눔의 집'같이 경주 나자레원에 있어요."

스미에 씨가 보는 한국 사회의 미래

"작년까지는 한국은 이대로 민주화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요즘은 좀 어려운 느낌도 있어요. 왜냐면 지난 토요일 광화문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많이 나왔어요. 그런 거 보면... 작년까지는 그런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느꼈어요. 왜냐하면 미국기 흔들고 시위하시는데 그 미국이 자기들한테 어떤 짓을 했는지 정확하게 몰라요. 그런데 우리를 지켜 줄 거라 해서 좀 불쌍한 모습이라고 느꼈어요. 그런 노인들이 점점 돌아가시고 한국은 머지않아 민주화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한국은 군대 제도가 있잖아요. 그러면 정기적으로 계속해서 조직적으로 (보수적인) 사상 교육을 받을 거예요. 노인들이 돌아가셔도 새롭게 나올 것이다. 군대라는 조직이 자체로 무서운 조직 아닌가. 또 하나, 교회 세력이 돈이 많이 있잖아요. 경제력도 있고 조직도 있고 계속해서 교육시키고 그런 시스템 없애지 않는 한 간단하게 민주 사회가 되지 않으리라... 그래서 지금 힘으로 더 세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웬만한 한국인보다 더 한국 사회를 꿰뚫고 있다. 스미에 씨는 그래도 한국은 희망이 보인다고 결론을 맺는다.

"한국 시민들의 활동을 보면서 아, 이렇게 하는구나 하는 걸 배워요. 예를 들면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같은 거, 일본에는 많지 않아요. 노동자와 학생들이 같이 공부하거나 세대도 다르고 여러 입장 사람들이 공부하고 좋은 시스템이 있구나. 우리가 배워야 되겠구나. 그래서 한국에 이런 게 있다고 일본에 소개하고 싶어요."

스미에 씨의 삶을 돌아보면 한길을 걸었다는 생각이 든다. 환경운동, 부라쿠해방운동, 인권운동, 평화운동 등 모든 활동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고 애썼던 활동이었다. 가해자의 나라 일본인이 '위안부' 할머니를 알리는 운동은 다시는 그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작은 몸부림이다.

"위안부는 매춘"이라고 막말을 던지는 류석춘이나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닌, 자발적으로 돈을 벌러 간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는 이영훈 같은 한국인들을 보면서 절망스러웠다가 스미에 씨 같은 일본인을 만나면 희망이 생긴다.
 

▲ 2019년 10월 7일, 쓰즈키 스미에 씨가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에서 강연을 듣다가 활짝 웃고 있다. ⓒ 안건모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월간 작은책 2019년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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