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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앞에 선 '82년생 김지영'과 시민기자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나를 찾는 글쓰기

등록|2019.11.08 16:08 수정|2019.11.10 10:37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은 오마이뉴스 에디터의 사는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봤다(소설은 읽지 않았다). 어느날 퇴근하다 갑자기. 당연히 혼자. 김지영(정유미 역)이 산후우울증때문에 다른 사람으로 빙의하는 장면에서 여러 번 눈물이 터졌다. 하지만 영화관을 나오면서 계속 머릿속에 남았던 건 노트북 앞에 선 김지영(정유미 역)의 모습이었다. 거기에서 내가 떠올린 건 '엄마 시민기자들'이었다.

내가 16년간 편집기자로 일하면서 가장 반갑기도 하면서 안타깝다고 여긴 사람들. 바로 '엄마 시민기자'였다. 좋은 소재와 주제, 탁월한 문장력을 갖추고 혜성처럼 나타나 반짝하고 사라진 엄마 시민기자들. 그들은 왜 오래 쓰지 못하고 그렇게 사라져야 했을까.
 

▲ 정규직, 비정규직, 알바는커녕 글 쓰는 데 필요한 일주일의 몇 시간도 허락되지 않는 게 엄마 시민기자의 삶이었다. ⓒ 봄바람영화사


정규직, 비정규직, 알바는커녕 글 쓰는 데 필요한 일주일의 몇 시간도 허락되지 않는 게 엄마 시민기자의 삶이었다. 애가 너무 어려서, 아파서,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중학교,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대학입시를 앞두고 있어서 등등 엄마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기간은 길어 보였다.

열심히 기사를 쓰다가 근황이 뚝 끊기는 엄마 시민기자를 볼 때마다 그저 아쉬웠다. 아내와 엄마가 아닌 '내 시간'을 내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대단한 일인지 알게 된 건 몇 년 전부터 내가 그 입장이 되면서부터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내가 시민기자가 되어 보니 알겠더라는 거다.

편집기자가 어떻게 시민기자가 되느냐고? 가능하다. 해 뜨면 출근해서 기사를 보는 사람이지만, 해가 지면 나도 퇴근이란 걸 한다. 일 아닌 다른 걸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근무 중에는 내 글을 쓸 수 없으니, 퇴근하고 쓸 수밖에. 그러니 나 역시 퇴근하면 시민기자가 되는 셈이었다. 그렇게 쓰면서 이해하게 됐다. 엄마 시민기자들이 기사 하나를 쓰기 위해 얼마나 시간을 쪼개 쓰고, 잠을 줄였을지를.

또 그렇게 힘든데 왜 쓰게 되는지도 알게 됐다. 내 경우, 일단 글 쓰는 게 재밌었다. 애들 다 재우고 남는 시간에, 잠자는 시간 줄여서 쓰는 글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엄마도 아내도 직장인도 아닌 나를 다시 찾은 기분이었다.

'글 쓰는 재미를 왜 지금 알게 됐을까. 좀 더 빨리 쓸 걸. 하다못해 일기라도 매일 쓸 걸.' 후회가 밀려오는 만큼 열심히 썼다. 밤에도 쓰고, 새벽에도 쓰고, 지하철에서도 쓰고, 카페에서도 쓰고, 온 가족이 <런닝맨>에 나오는 유재석과 이광수를 보고 웃을 때 나는 골방에서 키보드를 두드려댔다. 신나게.

내가 만난 엄마 시민기자들
 

▲ 영화 < 82년생 김지영 >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내가 만난 엄마 시민기자들도 거의 비슷했다. 이혜선 시민기자는 용인에서 상암으로 출퇴근하던 시절, 새벽 5시에 일어나 조금이라도 글을 쓰고 출근했다고 했다. "어떻게 그렇게 살았냐?"라고,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느냐?"라고 물으니 오히려 쓰지 않았으면 그 힘든 시간을 버틸 수 없었을 거라고 했다. 썼기에 버틸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했다.

[관련기사 : 새벽마다 블로그질 하는 워킹맘, 애들 때문이 아닙니다 http://omn.kr/oqg1]

엄마 시민기자들은 글을 쓰면서 자신의 만족감을 체험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변화도 생겨서 좋다고 했다. '나의 독박돌봄노동 탈출기'를 연재한 송주연 시민기자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그리고 일을 그만두면서 가사의 모든 일을 아내에게 요구하는 현실을 조목조목 따져 물었다. 좀 더 평등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문제를 문제라 말하고, 글을 쓰면서부터 남편이 달라졌다. "일단 쓰기 시작하니 계속 아이디어도 생기고 삶이 더 즐거워졌다"라고 말한다.

[관련기사 : "독박육아, 참지 않고 썼더니 싸움이 줄었어요" http://omn.kr/1c02b]

'페미니스트 엄마가 쓰는 편지'를 연재했던 이성경 시민기자도 편집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마이뉴스>에 글 쓰는 게 좋았던 게 뭐냐면요. 제가 하는 생각이 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어서였어요. 저 정말 남편하고 무지 많이 싸웠거든요. 저는 제가 쓴 글을 꼭 남편에게 보여주는데, 집에서 만날 하는 말인데도 글로 쓰면 좀 달라 보이나 봐요. 어쨌든 편집기자가 보고 기사로 채택하는 거니까, 그건 나 아닌 누군가가 내 글을 인정한다는 거잖아요. 블로그에 쓰는 거랑 전혀 다르죠. 또 포털에서도 볼 수 있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남편도 제 말을 흘려듣기보다는 더 귀 기울여 듣게 되는 것 같았어요. 본인의 행동이나 이런 것도 좀 신경 쓰는 것 같고. 그런 점에서 저는 <오마이뉴스>에 글 쓰는 게 여러 모로 도움이 많이 됐어요."

정확한 워딩은 아닐 수 있지만 뉘앙스는 맞을 거다. 말로는 백 번 말해도 못 알아듣던 걸 글로 쓰니 전달되고, 전달하니 이해하고, 이해하니 행동이 바뀌더라는. 그 좋은 선순환을 남편과 함께 만들어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다시 영화의 마지막. 나는 김지영이 글을 써 내려간 노트북 화면에 <오마이뉴스>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상상해 본다. '82년생 김지영'이 시민기자로 활동했으면 좋겠다. 영화에 등장하는 서울대 공대 나와 아이들 구구단 가르쳐주는 엄마도, 연기를 전공했지만 아이들에게 실감나게 책을 읽어주는 게 전부인 엄마도 모두 자신만의 이야기를 <오마이뉴스>라는 플랫폼을 통해 뽐냈으면 좋겠다.

자신의 글로 타인에게 공감받고 스스로 위로 받았으면 좋겠다. 지금도 잘 하고 있다고, 내 잘못이 아니라고, 네 생각이 틀리지 않다고 자신을 토닥여주면 좋겠다. 나는 기꺼이 그 글의 첫 번째 독자가 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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