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라는 '로컬' 점령해 가는 봉준호 감독의 여유
[하성태의 사이드뷰] 골든 글로브 감독상 등 후보 올라... 한국영화 100주년 선물
▲ 송강호, 최우식 배우와 함께 IMDB와 인터뷰 중인 봉준호 감독. ⓒ IMDB 유튜브 공식 채널
"오스카(아카데미) 영화상은 국제 영화제가 아니지 않나. 오스카는 굉장히 '로컬'(지역적)이니까("The Oscars are not 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They're very local")."
지난 10월, 봉준호 감독은 미 뉴미디어 전문지 <벌처>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디스' 아닌 '디스'를 했다. 국내 언론과 관객들은 물론이요, 미국과 전 세계 소셜 미디어 사용자들 역시 환호했다. "미국인들은 미국이 세상의 전부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봉준호의 평가는) 완벽한 요약이다" 등의 반응이 쏟아졌다.
지난 10월 11일 북미에서 정식 (소규모) 개봉한 이후, 봉 감독과 <기생충>의 현지 배급사 네온의 행보는 눈부셨다. 북미에서 개봉한 한국영화 중 박스오피스 1위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우선 국내 배급사 CJ ENM이 밝힌 흥행 성적을 보자.
"(<기생충>은) 지난 10월 11일 북미에서 개봉해 언론과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흥행 순항 중에 있다. CJ ENM은 북미 박스오피스 집계 사이트 모조를 인용, '<기생충> 이 현지 시각으로 12월 8일(일) 기준 누적 박스오피스 매출 북미 박스오피스 매출 1934만 6736달러(약 231 억 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개봉 59일째에도 여전히 박스오피스 12위를 기록하며 꾸준한 호흡으로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고 전했다."
골든 글로브 입성한 <기생충>의 눈부신 행보
▲ '기생충' 봉준호 감독, 기자를 찾아라!봉준호 감독이 지난 5월 27일 오후 서울 용산CGV에서 열린 영화 <기생충> 시사회에서 질문하는 기자를 찾고 있다. ⓒ 이정민
미국이라는 '로컬' 영화계를 점령 중인 <기생충>의 눈부신 행보는 이밖에도 차고 넘친다. 먼저 따끈한 소식부터. 9일(미 현지시각) 할리우드 외신기자협회는 <기생충>이 제77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 외국어 영화상, 각본상, 감독상 등 총 3개 부문 최종 후보작으로 선정됐다고 발표했다.
미(국과 영어권) 영화와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 영상 콘텐츠를 대상으로 하는 골든 글로브가 '오스카'의 전초전이란 사실은 부연이 필요 없을 듯하다. 한국 콘텐츠의 골든 글로브 주요 부문 최종후보 선정은 <기생충>이 단연 최초다.
10일 CJ ENM 측은 "<기생충>이 후보로 선정된 외국어 영화상 부문은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2019년 수상), 이안 감독 연출의 <와호장룡>(2001년 수상), 천카이거 감독의 <패왕별희>(1994년 수상) 등 전세계적으로 센세이션한 반응을 일으켰던 유수의 작품들이 수상한 바 있다"고 밝혔다. 제77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은 내년 1월 5일 캘리포니아주 베벌리힐스에서 열린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세 가지 정도로 꼽을 수 있겠다. 봉 감독이 외국어영화상, 각본상 외에도 감독상 후보로 < 1917 >의 샘 멘데스 감독, <조커>의 토드 필립스 감독, <아이리시맨>의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등 영화 팬들을 설레게 할 거장 감독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사실.
<기생충>이 지난해 <로마>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다. 제76회 시상식에서 스페인어로 제작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는 외국어상과 감독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하지만 지난해 후보에 비해(<스타 이즈 본>의 브래들리 쿠퍼, <그린 북>의 피터 패럴리, <블랙클랜스맨>의 스파이크 리, <바이스>의 아담 맥케이) 올해는 중량감이 남다르다. 넷플릭스 영화 <아이리시맨>으로 국내외에서 극찬을 받고 있는 '거장' 마틴 스코세이지와 올해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등 경쟁자들이 쟁쟁하다.
특히나 '마틴 스코세이지의 귀환'은 눈여겨 볼 대목이다. 그에 비해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만큼, <기생충>의 외국어영화상 수상이 수월해 보인다랄까. 도리어 <아이리시맨>과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외에 <결혼 이야기>(노아 바움백), <두 교황>(안토니 맥카튼)과 맞붙는 각본상 부문이 세 부문 중 가장 오리무중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지난해 스페인어 영화인 <로마> 역시 각본상 후보로 만족해야 했다.
다음으로 내년 2월 9일 LA 코닥극장에서 열리는 '로컬' 영화제인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 지명 가능성. <기생충>의 골든 글로브 작품상 후보 제외를 두고 미 '할리우드 리포트'는 영어 대사가 50%를 넘어야 하는 내부 규정 때문이라 풀이했다. 하지만 아카데미 시상식은 이런 규정이 없다. 지난해 <로마> 역시 작품상 후보 8개 작품으로 선정된 바 있다.
개별 수상은 둘째 치더라도, 후보 지명에 있어 아카데미가 골든 글로브를 배신하는 예는 드물다는 점 역시 <기생충>의 아카데미 입성 가능성을 밝게 한다. 그런 점에서, <기생충>의 골든 글러브 감독상 수상 여부는 초미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2019년 <로마>의 알폰소 쿠아론, 2018년 <셰이프 오브 워터>의 기예르모 델 토로, 2017년 <라라랜드>의 데이미언 셔젤, 2016년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의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등 지난 4년 간 골든 글로브 수상 감독이 아카데미까지 석권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이제껏 발표된 3대 비평가 시상식의 시상 결과가 <기생충>의 오스카 입성 가능성을 높이는 중이다.
골든 글로브에 이어 다음은 '로컬' 오스카 시상식
▲ 송강호, 최우식 배우와 함께 IMDB와 인터뷰 중인 봉준호 감독. ⓒ IMDB 유튜브 공식 채널
"<기생충>은 뉴욕 비평가협회상(외국어 영화상), 전미 비평가위원회상(외국어 영화상), LA 비평가협회상(작품상, 감독상, 남우조연상-송강호)에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 세 비평가협회상은 시카고 비평가협회상과 더불어 북미 4대 비평가 협회상으로 꼽힌다. 이에 더해 토론토 비평가협회상에서는 작품상, 감독상,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뿐만 아니라 <기생충>은 뉴욕타임스 수석평론가들이 꼽은 '올해 최고의 영화' 3위에 오르기도 했다."
CJ ENM이 밝힌 <기생충>의 수상 결과들이다. 역시 '로컬'은 '로컬'이다.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 시상식의 향배는 전통적으로 3대 비평가협회상을 통해 점쳐지기 마련이다. 뉴욕 비평가 협회상과 전미 비평가위원회상에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것은 칸 국제영화제의 수상작의 후광이라 평가해 보자.
눈여겨 볼 것은 할리우드가 위치한 LA 비평가협회상 결과다. <기생충>이 외국어영화상 부문이 아닌 작품상과 감독상 등 주요 부문을 수상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LA 비평가 협회상은 지난해에도 비영어권 작품인 <로마>에 작품상을 안긴 바 있다. 여러모로, <기생충>의 아카데미 입성 전망을 밝게 해 주는 대목이다.
아울러 <기생충>은 시드니 영화제 최고상, 할리우드 필름어워즈에서 할리우드 영화제작자상, 애틀란타 영화 비평가협회 시상식에서는 감독상, 각본상, 외국어 영화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참고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칸 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기생충>은 지금껏 총 52개 영화제에 초청됐고, 북미를 포함 전세계 37개국에서 개봉했다. CJ ENM에 따르면, 이중 프랑스, 베트남, 인도네시아, 호주, 독일, 이탈리아 등 19개국에서 역대 현지 한국영화 개봉작 중 흥행 1위를 달성했다. 그리고, 칸으로 시작된 <기생충> 전 세계적인 열광이 이제 '로컬' 시상식인 오스카 후보작 선정과 수상 결과로 귀결되고 있는 셈이다.
한국영화 100주년의 선물, 그리고 봉 감독의 여유
▲ <기생충> 스틸컷 ⓒ CJ 엔터테인먼트
특히나 아시아계 감독으로는 유일하게 오스카 감독상을 2회 수상(제78회 <브로크백 마운틴>, 제85회 <라이프 오브 파이>)한 이안 감독과 견줘 봐도, 또 스페인어 영화인 <로마>의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수상 이력과 비교해도 그러하다. 이안 감독은 일찍이 할리우드에 안착, 영어 영화로 감독상을 수상한 케이스다. 넷플릭스 영화 <로마>는 1990년대 중반부터 할리우드에 진출한 알폰소 쿠아론이 고향인 멕시코에서 촬영한 영화다.
이는 <설국열차>로 첫 영어 영화를 연출, 미라맥스의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가위질'을 감수하며 북미에 제한적으로 개봉했고, 넷플릭스 영화 <옥자>로 칸 경쟁부문에 진출했던 봉 감독의 행보와는 뚜렷이 비교된다.
특히, 오롯이 한국어 영화인 <기생충>에 대한 이례적인 북미에서의 환호는 유독 자막을 읽기 싫어하기로 유명한 북미 관객들에게, 특히나 예술영화를 선호하는 관객들에게 '봉준호 월드'의 영화적인 보편성과 독창성을 확실히 각인시킨 계기가 됐다고 볼 수 있다.
"송강호씨와 저는 4, 5년 전부터 아카데미 위원회 회원으로 투표를 해왔어요, 다른 작품들에."
지난 10월, 미 유력 영화사이트 'IMDB'와 인터뷰한 봉준호 감독은 "많은 사람들이 <기생충>이 한국영화 최초로 오스카 후보로 오를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진행자의 질문에 위와 같이 답하며 송강호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이어진 대화도 역시 봉 감독의 유머 감각을 가늠케 하는 장면이었다.
"음... 올(ALL)! 패러사이트(<기생충>)!!!" (송강호)
"(웃음) 본인 영화에 투표하세요. 좋은 선택입니다." (진행자)
"제 영화에 투표하는 게 불법은 아니죠? (봉준호 감독)
"당연히 아니죠. 그렇게 하세요. 모두들 다 그렇게 합니다." (진행자)
아카데미 회원으로서 본인 영화에 투표하는 것이 "불법 아니냐"고 묻는 엉뚱함이라니. 물론 같은 질문에 봉 감독이 농담으로만 대응한 건 아니었다. 같은 달 아카데미 위원회 측과의 인터뷰에서 봉 감독은 "아카데미 시상식과 관련해 미국을 방문한 것이, 또 토론토 영화제 수상이 봉 감독 개인과 한국영화계에 어떤 의미냐"고 묻는 질문에 또 이렇게 답했다.
"우연이었는데, 칸 영화제 측이나 심사위원들은 몰랐지만 우연히도 올해가 한국영화 역사 100주년 이었다. 1919년에 한국이란 영화에서 영화를 처음으로 만들었던 거다. 여러분 모두 구로사와 아키라나 미조구치 겐지 같은 아시아의 거장들을 잘 알고 계실 것이다.
사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한국에도 지난 100년 간 많은 거장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기생충> 역시 한국 고전영화의 하녀에서 영감을 받았다(중략). 여러분들께도 한국 고전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본인 영화의 아카데미 진출 여부를 묻는 질문에 한국영화 100주년과 <기생충>의 영감을 받았다 고백한 김기영 감독의 <하녀> 등 한국 고전영화를 소개한 봉준호 감독.
그의 북미에서의 극찬과 비영어권 아트하우스 영화로서의 남다른 흥행, 그리고 골든 글로브 후보 지명과 아카데미상 후보 지명 가능성 모두 봉 감독 개인의 영예이자 한국영화 100주년의 선물 같은 소식이라 할 수 있다. 또 아시아권 영화를 통틀어서도 전례없는 행보인 것도 틀림 없다(굳이 하나 꼽자면 2000년대 초반 북미에서 신드롬을 일으켰던 이안 감독의 중국어 영화 <와호장룡> 정도랄까).
그렇다고 아카데미 후보 지명과 이후 수상 여부를 두고 (북미 개봉 전부터 <기생충>의 행보를 라이브로 중계하다시피 한 몇몇 연예 매체들처럼)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어 보인다. <기생충>의 성과가 한국영화 전체의 성과도 아니거니와, 골든 글러브나 아카데미 수상(과 후보 선정)이 올림픽과 같이 '세계 재패' 식으로 귀결되는 것 역시 곤란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봉 감독이 이미 정답을 내놨는지 모르겠다. <기생충>의 북미에서의 성과는 봉준호라는 아티스트(와 <기생충>의 배우, 제작진) 개인의 성과 이외에 '한국영화 100주년'의 선물 같은 '플러스 원'이라는 사실 말이다. 2019년 한 해 한국영화가 <기생충> 속 양극화의 악화일로로 치달았던 현실을 상기한다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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