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갑의 죄상을 밝힌다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 / 21회] 전봉준이 붙잡혀 공초에서 밝힌 고부군수 조병갑의 '죄상'
▲ 학교 앞 언덕에 있는 고부관아 배치도. ⓒ 안병기
심지어 그의 생몰연대까지도 정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본관이 양주인 조병갑은 순조왕비 조씨 일족이다.
순조왕비인 조대비의 비호 아래 출세한 가문이다. 조병갑이나 조두순이 과거 급제자의 명단에 없는 점으로 미루어 정상적인 방법으로 관직에 출사한 것이 아니라 권력의 비호를 받아 음직으로서 고위직에 올랐던 것 같다.
▲ 관아터에 들어선 고부초등학교. ⓒ 안병기
조병갑은 영해민란의 주도자 이필제를 국문할 적에 의금부도사로서 기록을 담당한 적도 있다. 그는 1892년 (고종19) 4월 고부군수에 부임하였다. 그 전에도 여러 주군(州郡)을 돌아다니며 탐학행위를 일삼는 탐관오리로 알려졌다. 조병갑과 그의 부친이 주로 전라도 곡창지대의 군수에 임명된 것은, 당시 이 지역이 가장 탐학하기에 적합한 '기름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 함양 '조병갑 선정비 안내문'. ⓒ 함양군청
조병갑과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웃음거리의 하나는 경상남도 함양에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진 일이다. 함양읍 상림 북측 역사인물공원 앞엔 <군수조후병갑청덕선정비(郡守趙侯秉甲淸德善政碑)>라는 이름의 조병갑 선정비가 세워졌다.
"조선말 조병갑 군수는 유민을 편케하고 봉급을 털어 관청을 고치고 세금을 감해 주며 마음이 곧고 정사에 엄했기에 그 사심없는 선정을 기리어 고종 24년 (1887) 7월에 비를 세웠다." 는 내용의 비문이다.
따지고 보면 그 시절에 조병갑만이 탐관오리였던 것도 아니다. 전라감사 김문현의 탐학도 이에 못지 않았다. 전운사(轉運使) 조필영이 전운영(轉運營)의 세미를 운반하면서 운임 · 유실 등의 조건으로 정량보다 더 거두어 들이고 서울로 수송한 뒤에는 부족미의 명분으로 농민들을 수탈하였다.
조필영은 풍양조씨로 조대비의 배경을 업고 농민들의 뼛골을 짜냈다. 여기에 균전사(均田使) 김창석은 농민들에게 묵은 토지를 개간하면 일정 기간 동안 세금을 내지 않도록 해주겠다고 하고서는, 농민들이 추수할 때는 관리들을 동원하여 도조를 빼앗아 갔다. 이중삼중의 수탈에 농민들은 농토를 버리고 도망가거나 유리걸식하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이와 같은 수령들의 탐학이 전라도 일대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었다. 전라도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부패한 왕조의 말기증세였다. 견디다 못한 고부의 농민들이 부정의 사례를 적은 민장(民狀)을 들고 조병갑을 찾아가 등소(等訴)라는 이름의 이른바 '선처'를 호소하려다가 옥에 갇히거나 관아 마당에서 내쫓기었다. 이래저래 고부 농민들의 원성은 하늘에 닿고 그들은 급속하게 결속되어 갔다. 이때 메시아처럼 전봉준과 김개남 등이 등장하고 평소 신뢰받은 인격이었던 이들은 전봉준의 개인적인 원한까지 겹쳐서 조병갑을 비롯한 탐관오리들의 숙청에 감연히 발 벗고 나서게 되었다.
▲ 다산 정약용이 외로운 남도 강진 땅에 유배되어 썼던 <목민심서>의 모습입니다. 이 책은 지방 관리의 사적을 가려 뽑아 백성을 위하는 정치가 무엇이며, 그것을 행하기 위해서의 지방관의 자세는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다산 정약용이 외로운 남도 강진 땅에 유배되어 썼던 <목민심서>의 모습입니다. 이 책은 지방 관리의 사적을 가려 뽑아 백성을 위하는 정치가 무엇이며, 그것을 행하기 위해서의 지방관의 자세는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 최형국
조병갑이 살던 시대보다 앞서 산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나뭇가지 하나 병들지 않은 것이 없다" 면서 "굶은 호랑이와 독수리가 더욱 사납게 농민들을 등치고 빼앗는다." 라고 조선후기 관리들의 탐학을 밝혔다.
▲ 구 기념관 지역에 서 있는 전봉준 동상. 1987년 김경승이란 사람이 제작했다. ⓒ 안병기
전봉준이 붙잡혀 공초에서 밝힌 고부군수 조병갑의 '죄상'은 다음과 같다.
(1) 보를 쌓은 봇둑 아래서 그 물의 혜택을 받는 농민에 대하여 억압적인 명령을 내려 상답이면 1두락에 2말을 세금으로 거두고, 하등 농에 대해서도 1두락에 1말을 세금으로 거두어, 도합하니 벼가 7백 여석이나 되었다.
(2) 묵은 황무지는 백성에게 갈아 먹으라고 허락하여 관가에서 문권까지 발급하면서 세금은 징수하지 않는다고 해 놓고, 가을 추수 때가 되니 억지로 거두어 간 일.
(3) 부잣집 백성에게서 돈 2만여 냥을 억지로 빼앗았다. (그것은 불효, 불목, 음행 및 잡기 등의 일로 죄목을 얽어서 그렇게 했다.)
(4) 그 아비가 일찍이 태인 고을에서 원을 지냈는데, 그 아비를 위하여 비각을 세운다고 하면서, 1천여 냥을 억지로 거두었다.
(5) 대동미를 민간에서 정백미 16말씩 일정한 값을 기준으로 해서 거두는데, 막상 쌀을 상납하면 하등미로 값을 쳐서 그 잉여 이익을 몽땅 먹어 버린 일.
(6) 수리사업으로 보를 쌓을 때 억지로 다른 산에서 수 백년 된 큰 나무를 베어다가 일꾼들에게 보를 쌓게 하고는, 한 푼도 일꾼에게 품삯을 주지 않은 일 등이다. (주석 6)
주석
6> 이이화, 『전봉준, 혁명의 기록』, 63~64쪽, 생각정원, 2014.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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