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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아이의 누명을 벗겨야 했습니다

[이 사람] 월간 <작은책>이 선정한 올해의 인물 김미숙씨

등록|2019.12.26 07:35 수정|2019.12.26 10:08
경북 구미에 살던 김미숙씨는 평범한 노동자였다. 한 남자의 아내였고, 귀한 자식을 둔 어머니였다. 오로지 공장과 집을 오가며 아픈 남편과 가정을 돌봤다. 그런데 자신보다 더 아끼던 아들이 공장에서 사고로 죽었다. 김미숙씨는 '엄청' 엉터리인 이 세상을 다시 배워야 했다. 그리고 아들 이름을 딴 '김용균재단'을 설립해 부조리한 이 세상에 맞서고 있다.

▲ 김용균재단 대표 김미숙 씨 ⓒ 사진. 고창수


성장기

김미숙씨는 충북 영동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집 앞으로 금강이 흐르고 뒤로는 논과 밭이 있었다.

"충북 영동 용산면하고 심천면하고 경계선이에요. 어릴 때 아버지가 벼 베고 있을 때 메뚜기 잡고 뛰어 놀던 생각이 나요. 강 건너에 논이 있었고요. 새마을 운동의 하나로 줄지어서 학교를 다녔어요. 마을 길 한쪽에는 코스모스 심고, 한쪽에는 무궁화나무 심는 일도 했었어요. 초가지붕도 양철 지붕으로 바꾸고 페인트 발라서 빨간 지붕, 파란 지붕 만들었어요."

김미숙씨는 어릴 때 새마을 운동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박정희 정권 때였다. 그 당시 세뇌당했던 어린이들이 거의 그랬듯이 박정희 대통령은 '위대'해 보였다. 김미숙씨는 고등학교까지 평범하게 학창 시절을 보냈다. 형제 자매가 많았다. 둘째였던 김미숙씨는 대학 갈 꿈도 꾸지 못했다.

"언니가 아빠한테 대학 보내 달라고 그랬는데, 형편이 안 된다고 못 보내 줬어요. 그래서 자동으로 저는 안 될 거로 생각하고 아예 포기했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김미숙씨는 구미로 갔다. 맨 처음 들어간 회사는 섬유회사였다. 다행히 그 회사 사장은 악덕 사장은 아니었던 듯했다. 잔업 수당도 꼬박꼬박 받았다.

"잔업 시간을 개인마다 똑바로 체크했어요. 사장이 그랬어요. '이상 있을 때 월급명세표 갖고 와서 잔업 시간이 틀리거나 이런 거, 계산해서 틀린 거 있으면 제시해라. 이런 걸 못 찾아 먹으면 바보다'라고요. 회사에서 주는 대로 받는 게 아니고, 내가 내 권리를 찾아서 받아 낼 수 있구나 하는 걸 그때 알게 됐죠."

김미숙씨는 그 공장에서 십 년 동안 근무한다.

"저는 그냥, 할 만하면 꾸준히 해요. 월급 타서 꼬박 삼 년을 아버지한테 갖다 줬어요. 아버지가 빚도 있었거든요. 그래서 빚을 갚아 드렸어요."

결혼

김미숙씨는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한다. 남편의 고향은 경북 영천이었다. 김미숙씨는 구미에서 아이를 낳은 뒤 영천으로 이사를 했다. 아이 이름은 '용균'이라고 지었다. 김미숙씨는 용균이를 키우려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아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김미숙씨는 다시 공장에 들어간다. 전자회사였다. 김미숙씨는 눈썰미가 있었다.

"처음에는 아주 단순하게 몸으로 하는 일을 했는데, 전자 제품 안에 들어가는 초록색 판이 있잖아요. 거기 들어가는 부품 용량이 다 달라요. 일을 하면서 부품 용량이 얼마인지 그런 걸 재미 삼아서 봤어요. 그런데 하루는 샘플하고 용량이 다른 거예요. 크기도 살짝 달라요."

김미숙씨는 조장을 불러 물었다. "조장님, 왜 이게 샘플하고 달라요?" 한참 들여다보던 조장은 "어떤 게 잘못됐는지 모르겠는데?"하고 대답했다. 확인해 보니 용량이 다른 제품이 들어간 것이었다. 모든 작업을 멈춰야 했다.

"회사에서 다시 제대로 만들었어요. 이미 잘못 조립한 거는 다른 사람 몇 명 붙여서 며칠 동안 일일이 그것만 바로 잡았어요."

하청을 받았던 사장도 김미숙씨에게 와서 고맙다고 연신 인사를 했다. 회사에서는 김미숙씨를 다시 보게 됐고 검사 업무를 맡겼다. 그런데 김미숙씨는 검사 업무가 달갑지 않았다.

"오 년 이상 일했던 다른 동료를 제가 일하는 곳에 배치를 하더라고요. 그 사람한테 너무 못할 짓이잖아요. 그 언니는 '회사에서 밀린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고, 많이 울었어요."

김미숙씨는 그 동료에게도 미안했지만 더 큰 불만은 따로 있었다. 주야로 일을 못해 월급이 적어진 것이다.

"퇴직금까지 떨어졌잖아요. 그래서, 정말 싫었거든요. 왜 제가 부당한 대우를 받아야 되는지 정말…"

그게 부당한 대우는 아니지 않냐고 물었더니 김미숙씨가 정색을 하면서 반발한다.

"아, 저는 부당해요. 돈을 못 버니까. 그때 애 아빠가 아프고, 저 혼자 벌어야 할 실정이었으니까. 남편은 일을 그만둔 지 오래됐어요. 십 년 넘었어요. 아프고 나서 계속 못 했으니까."

김미숙씨는 월급이 줄어든 것이 불만이었지만 성심성의껏 일했다. 아들 용균이가 고등학교로 올라가면서 학교가 집에서 더 멀어졌기 때문에 김미숙씨는 공장을 옮겨야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7년 동안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응급실에 없어 혹시나 영안실 확인했더니 

2018년 12월 11일 새벽에 전화가 울렸다. 남편 전화에 문자가 몇 번 와 있었는데 자느라고 몰랐다.

"아이한테 무슨 사고가 생겼다고 경찰서에서 오라는 거예요. 애가 무슨 잘못을 했나 생각하고 경찰서에 거의 다 갔는데 병원으로 오라고 다시 연락이 왔어요. '큰일 났다' 생각을 했죠. 애가 기절을 했거나 말을 못 할 정도로 심하게 다쳤거나 그런가 보다 생각했어요."

병원 응급실로 갔는데 그런 환자는 없었다. 김미숙씨는 정신이 없었다. 혹시나 영안실에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했다.

"20대 남자가 있냐고 했더니 한 명 있다는 거예요. 영안실로 가서 확인을 했어요. 서랍장 같은 곳에서 애를 꺼내더라고요. 비닐 같은 거에 싸여 있었는데 머리만 보였어요. 얼굴이 탄가루로 다 까맣게 되어 있었어요. 입안에도 탄가루가 다 들어가 있었고, 정면으로 보고 난 뒤에야 용균이라는 걸 알았어요.

몸을 보여 달라고 했어요. 병원에서 못 보여 준다고 해요. 충격이 클까봐 그렇대요. 말로 설명해 달라고 했어요. 몸과 머리가 분리된 상태고 등이 갈려서 타 버린 상태래요. 그래도 제가 애 몸을 보려고 하니까 저를 밖으로 쫓아냈어요. 복도에서 우리 아들 더 봐야 된다고 그러면서 얼마나 오열을 했는지 몰라요. 애 아빠하고 저하고. 아무리 통곡을 해도 기절도 안 되더라고요. 하…."


김미숙씨는 그때가 떠오르는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 2019년 11월 4일. 김미숙씨가 대림동 공공운수노조 회의실에서 <작은책> 대표 안건모씨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안건모


책임을 떠넘기는 원청과 하청

"울다 지쳐서 1층에 올라왔는데 하청회사 이사라는 사람이 저한테 오더니 용균이가 '고집이 있어서 가지 말라는 곳을 갔고, 하지 말라는 일을 하다가 사고가 났다'는 거예요. 처음에는 그 말 듣고 '아, 그런가?' 생각했어요. 근데 생각해 보니까 용균이가 지 마음대로 가서, 지 잘못으로 죽었다, 이거 아니에요? 처음 만난 회사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는 게 정말 이해가 안 갔어요.

용균이 동료들이 그 근처에 있었어요. 그 동료들을 다른 곳으로 데려가서 물어봤죠. 일할 때 대기실이 있는데, 그 대기실에서 이상 신호가 올 때 노동자들은 어떻게 하냐고 물어봤어요. 무조건 가서 확인하고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회사가 죽은 아이한테 완전 누명을 씌우려고 한다는 걸 알았죠. 그래서 그때부터는 '애 누명을 벗겨야 되겠구나. 내가 할 일은 그거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데…"


병원 안에는 다른 사람들도 많았다. 시민대책위라는 사람들도 보였고 민주노총에서 온 사람들도 보였다. 막막했다. 누구한테 물어봐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김미숙씨는 시민대책위를 믿어도 될지 몰라 망설였다.

"공장 생활을 오래 했지만 제가 노조 활동을 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뭐 하는 사람들인지, 저 사람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나를 이용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명함 보니까 민주노총 공공운수 뭐라고 쓰여 있어요. 민주노총은 맨날 '동지' 그러잖아요. 동지, 북한에서 쓰는 말, 그래서 빨갱이로 자꾸 불리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또 민주노총 하면 텔레비전에서 맨날 싸우는 것만 보여 주니까, 저 사람들은 질이 안 좋다? 이렇게 믿고 살았죠.

우리 제부가 옛날에 코오롱에 있었어요. 노동조합 부위원장을 한 적이 있어서 제가 전화를 해서 물어봤죠. 여기 뭐, 공공운수 뭐라고 이름표에 있는데, 이 사람들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냐고. 그러니까 괜찮은 사람들이다, 믿고 맡기면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시민대책위 사람들을 믿었던 게 시민대책위 부위원장님이 '우리는 유가족을 중심으로 하고 유가족의 말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이 큰 힘이 됐어요. 그리고 회의하는데 유가족이 참석해도 된다고 해서 아침저녁으로 다 참석했어요."


시민대책위는 김용균씨 빈소에 있는 식탁에서 회의를 했다. 김미숙씨는 꼬박꼬박 그 회의에 참석을 했는데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한국말을 하고 있는데, 무슨 다 전문 용어고, 못 들어 본 말들이에요. 그러다가 열흘 정도 지나니까 차츰 귀에 들어와요. 의문이 나는 건 다 물어봤어요. 사고난 지 3일 됐을 때 사측도 자기네들하고 유가족하고 이야기하게끔 시간 내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시민대책위에 위임장을 써 주면서 내 앞에서 회사 사람들 얼씬 못하도록 해 달라고 부탁했죠."

그다음부터는 시민대책위와 함께 진상 규명을 요구하면서 싸우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아들이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현장을 확인하고 싶었다.

"용균이와 같이 일했던 동료들한테 부탁해서 용균이가 일했던 현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 가보자고 했어요."
 

▲ 고 김용균씨가 '비정규직 그만 쓰개! 1100만 비정규직 공동투쟁'이 추진하는 '문재인 대통령과 비정규직 100인의 대화'에 참가 신청을 하려고 찍은 인증 사진이다. 김 씨는 위 사진을 찍은 지 두 달 뒤, 2018년 12월 11일 새벽 일터인 충남 태안 화력발전소 9.10호기 석탄운송설비 컨베이어벨트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 사진제공 발전비정규직연대회의


용균이가 마지막 일했던 곳으로

2018년 12월 13일 김미숙씨는 현장에 들어갔다. 김용균씨가 사용하던 운전원 대기실에서 컵라면 등의 유품이 나왔다. 김용균씨가 사용하던 고장난 손전등, 건전지, 슬리퍼 등이 있었다. 김용균씨와 함께 일한 동료는 '용균이가 헤드 랜턴조차 지급받지 못한 채 일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원청에서) '낙탄 치우라고 수시로 지시가 내려온다'며 '언제 지시가 내려올지 몰라 식사 시간이 없어서 매번 라면을 끓여 먹이고 그랬다'고 설명했다. 김미숙씨는 가슴이 미어졌다. 사고 현장으로 가는 길은 더욱 위험했다.

"기계 하나가 아파트 15층 높이의 큰 건물이래요. 발전소 기계 하나가 그렇게 커요. 일반 계단은 비스듬하게 올라가게 되어 있잖아요. 근데, 여기는 거의 직각 계단이에요. 정말 무슨 훈련받는 느낌이었어요."

김미숙씨가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탄가루와 먼지가 눈처럼 쌓여 있었다. 들어가면서 내리막이 있는데 미끄러질 것 같았다. 옆에 잡을 것이 있어서 잡으려고 했더니 용균이 동료들이 잡지 못하게 했다.

"여기는 원래 가동하고 있을 때는 옆에 아무 것도 잡으면 절대 안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왜냐면 회전체가 다 거기 있으니까 위험하다고. 만약에 그냥 미끄러지면 잡을 데 없이 미끄러질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또 가다 보니 바닥에 호스 같은 게 있어요. 잘못하면 넘어질 수도 있는 그런 것들이 있었고 무덤처럼 쌓여 있는 낙탄들이 있었어요. 용균이는 그 9, 10호기에서 일을 했대요. 철판으로 쌓여 있어요. 컨베이어 벨트가 중간에 지나가고.

근데 이게 그 안에 들어가려면 성인 남자가 반 구부려서 이렇게 들어가서 삽질하고 확인할 수 있게끔 그렇게 구조가 되어 있어요. 밤이 되면 여기는 안에 불이 없으니까 컴컴하죠. 그러니까 헤드랜턴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 철판 바깥에 풀코드라는 긴 줄이 있어요. 이건 위험할 때 당기는 줄이에요. 그게 평소에는 쭉 늘어져 있대요. 왜냐면 조금만 건드려서 스톱되면…. 다시 가동하려면 삼십 분 이상 걸린대요."


위험할 때 당기는 줄을 일부러 느슨하게 해 놨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이 풀코드를 당기려면 원청의 허락이 있어야 된대요. 만약에 잘못 당겼다 그러면 기계가 스톱되고 하청은 돈을 못 벌잖아요. 삼십 분 동안 못 번 거를 손해배상 해 줘야 된대요. 하청이 원청한테. 그리고 밤에 사고가 나서 원청한테 보고를 하잖아요. 그러면 이게 몇 단계 올라가서, 전화를 몇 군데 올려서 허락 맡고, 몇 군데 또 내려와서 여기한테 연락 주게 되어 있어요. 밤에 누가 빨리빨리 전화를 받고, 연락이 잘 안 되잖아요. 정말 저는…"

김미숙씨는 인터뷰 내내 '정말', '말도 안 되는', '엄청'이라는 말을 많이 했다. 도저히 표현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계속 일어났기 때문이다.

"(특조위에서) 용균이가 업무 수칙을 다 지켜서 죽었다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원청은 하청을 주었으니 책임이 없다 하고, 하청은 또 내 사업장이 아니니까 책임 소재가 없다 그러고…"

김미숙씨는 마지막으로 맨 위층에 올라갔다. 사고가 난 장소였다.

"기가 막혔어요. 청소가 돼 있어서 사고가 났는지 뭐 했는지 표시가 하나도 없어요. 애가 왜 죽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갔는데 아무런 흔적이 없어요. 회사에서 덮으려 하고 있구나, 그 생각이 딱 드니까 정말… 분해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용균이가 죽고 나서 시신 수습도 안 됐는데 그 옆에서 기계를 가동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용균이가 쓰레기인가… 최소한 짐승이 죽어도 아파하고 그러는데 내 자식은 뭔가…"

김용균씨는 이제 스물다섯 살이었다. 군대 갔다 와서 일 년 동안 스펙을 쌓다가 7개월 동안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은 끝에 겨우 얻은 직장이었다.

"첫 직장이었어요. 저는 우리 용균이보고 '너는 엄마아빠한테는 정말 생명 같은 존재니까, 몸 잘 보살펴야 되고, 차 조심 늘 해야 되고, 나갈 때마다 조심해라.' 맨날 그러고 살았죠."

김미숙씨는 사고 원인이 밝혀지고 책임자가 처벌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대책위를 통해 산업안전보건법이 있다는 걸 처음 들었다. 이름뿐인 법이었다. 그 법에는 중대 사고에 걸맞게 처벌하는 조항이 없었다. 세상을 다시 보게 됐다. 여태 자기가 살았던 세상이 이런 세상이었다는 걸 이제야 깨닫게 됐다. 생각만 해도 억울해 정신을 추슬렀다. 시민대책위와 함께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을 요구하면서 국회를 드나들었다.

"3일 동안 국회를 갔어요. 사고를 낸 원청을 처벌하는 법이 통과돼야 원청을 처벌할 수 있다고 들었어요. 당연히 개정해야 되는 거잖아요. 이 법이 왜 가로막히고 통과가 안 되는 건지 이해가 안 갔어요. 소리도 지르고, 때로는 읍소도 했어요."

그렇게 김미숙씨가 싸울 무렵 위험한 업무를 하청 업체에 떠넘기는 '위험의 외주화'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죽음까지 외주로 돌린다는 '죽음의 외주화'라는 표현도 나왔다. 김용균씨를 추모하는 추모제가 곳곳에서 열리는 등 비판 여론이 높아지자 정치권도 이를 외면하기 어려웠다. 결국 2018년 말 위험의 외주화를 방지하고 산업 현장의 안전 규제를 강화하는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개정안, 이른바 '김용균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름뿐인 '김용균법'

'김용균법'이 통과됐지만, 유가족과 시민대책위는 김용균씨의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 비슷한 사고를 막기 위한 대책이 보이지 않았고 책임자를 처벌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민대책위의 공동대표단들이 광화문광장에서 단식 농성에 돌입했다. 이들은 정부가 고 김용균씨 죽음의 진상을 밝히고,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대책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여론이 점점 악화될 무렵인 2019년 2월 5일 정부는 진상 조사와 재발 방지책을 약속했다. 발전소 사측에도 약속을 받고 유가족과 시민대책위는 2월 9일 민주사회장으로 김용균씨의 장례를 치렀다. 유해는 마석 모란공원에 안치됐다.

"합의안 끌어낸 다음에는 당연히 장례 치른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장례를 치르는데 아주 크게 했잖아요. 저는 그런 행사를 난생처음 보고 겪었어요. 그런데 실감이 안 났어요. 무슨 꿈을 꾸는 건지, 이게 진짜 현실인지, 용균이가 금방이라도 올 거 같은데… 애가 갔다고 그러는데 아직도 어딘가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전화를 해도 안 받고 톡을 해도 안 받아요. 전화기를 들면 그 안에 용균이 영정 사진도 있고 무덤 사진도 있어요. 애가 뼛가루가 되어서 묘에 들어간 거까지 내 눈으로 다 봤는데, 우리 아들이 여기 묻힌 게 맞나? 이런 게 '죽은 것'인가…" 
 

▲ 발전비정규직 농성 돌입 기자회견. 2019년 11월 11일 광화문광장. ⓒ 사진제공 김용균재단.


진상 조사 결과 발표

"발전시설 원하청 관계가 만드는 '책임 공백'이 김용균씨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2019년 8월 19일 '석탄화력발전소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특조위) 김지형 위원장이 넉 달 만에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김용균씨가 숨진 직접 원인이 원하청 구조에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특조위는 발전사의 경상정비와 연료·환경설비 운전업무 민영화와 외주화를 철회하도록 정부와 발전사에 권고했다. 당연한 조사 결과였지만 김미숙씨는 '아들이 잘못해 죽었다'는 누명을 벗은 걸 안도해야 했다. 그런 누명조차 못 벗고 죽어간 노동자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전태일이 먼 옛날의 역사인 줄만 알았다. 김미숙씨가 이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처음 의심하게 된 사건은 세월호 사건이었다.

"그때 충격을 엄청 받았어요.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떠넘기기를 했잖아요. 구하지 않고. 맞아요? 제가 보는 눈에는 그랬어요. 학생들이 몇백 명 타고 있는 배를 아무도 구할 생각을 안 하고 저렇게 하고 있나. 그러면서 그 죽은, 부모들이 사람들이 얼마나 억울하고 힘들겠나. 저 사람들 어떻게 살까. 자기 자식 잃고… 막 그런 감정이 일어났죠."

하지만 역시 자기가 겪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안타까움에 그쳤다. '저 사람들 어떻게 살까' 생각했지만 자신이 당할 거라고는 생각 안 했다. 어쨌든 한 다리 건너서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어느 날 갑자기 내 일이 되더라고요. 전태일은 저한테는 아주 옛날에, 먼 역사인 줄 알았어요. 그 사람들이 (전태일)재단을 만들어서 계속 쭉 이어 오고, 사회를 바꾸려고 노력했던 그런 역사를 이제 알게 된 거잖아요. 그 전까지만 해도 세월호만 그렇게 힘든 줄 알았더니 이 속에 들어와 보니까…"

김미숙씨는 그동안 숱한 젊은이들이 그렇게 죽어갔다는 사실을 알았다. 30년 전 15살 문송면(1971-1988)의 수은 중독부터 가까이는 2016년 구의역 스크린도어 수리 정비 하청 노동자의 죽음 등이 김용균과 같은 죽음이라는 걸 알았다. 우편배달부 과로사, 조선소 크레인 사고 등으로 해마다 노동자가 2천여 명씩 죽어 나가는 현실에 경악했다.
 

▲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요구하며 광화문광장에서 1인시위하고 있는 김미숙씨. ⓒ 사진제공 김용균재단


그런데 산업안전보건법에는 중대한 사고가 난 기업을 무겁게 책임을 지게 하는 그런 조항이 없었다. 자기 자식은 그렇게 허망한 사고로 죽었지만 "다른 아이들의 죽음은 막고 싶다"며 김미숙씨는 시민대책위와 활동가들과 함께 숱하게 국회를 드나들면서 법을 개정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위험의 외주화 방지법으로 불리는 이른바 '김용균법', 산업안전보건법이 28년 만에 개정돼 국회에서 통과됐다.

"그런데 이상했어요. '김용균법'이 만들어진 다음에 현장 태안분소에 갔는데 용균이 동료들이 다 술 먹고 힘 빠져 있고, 화가 나 있었어요. 그래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용균이법' 안에는 용균이가 안 들어가 있다고. 그래서, 거기서 알았죠. 너무 엉망이 되었구나. 위험의 외주화 막겠다고 산업안전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는데 결국은 하위 법령인 시행령에서 다 완화시킨 걸 그때야 알게 됐어요."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에도 김용균 같은 노동자들처럼 위험한 직종의 외주화를 금지하는 법이 없었다. 위험의 외주화가 가장 심한 업종으로 꼽히는 조선업, 지하철, 철도 같은 업종도 노동부의 하청 승인이 필요한 업종에서 빠졌다. 게다가 도급 금지를 어긴 사업주에 대한 처벌이 오히려 약화됐다. 개정 전에는 도급 금지를 위반한 자에 대해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 벌금의 형사처벌 조항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개정법에서는 10억 원 이하의 과징금만 있고 형사처벌 조항이 없어졌다. 처벌의 하한선도 없으니 전보다 더 약해진 것이다.

"그때는 몰랐어요. 원래는 용균이 죽게 만든 사람들을 강력히 처벌하는 법을 집어넣었대요. 그게 다 누락돼서 들어갔다고. 지난 8년동안 서부발전소에서 목숨을 잃은 노동자가 열두 명이래요. 한 번 사고 났을 때 제대로 방책을 세워서 개선을 했더라면 재발이 안 되는 거잖아요. 근데 우리나라는 처벌이 너무 약하니까 이와 같은 살인을 계속 허용해 주고 있는 거잖아요."

김미숙씨는 낙담만 하고 있지 않았다. 아들의 장례를 치른 뒤 시민대책위에 재단을 설립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시민대책위가 논의를 거쳐 김용균재단 설립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 재단은 그냥 용균이 기리는 사업뿐만이 아니에요. 용균이같이 안전 무방비 상태인 비정규직이 우리나라 건설업이나 조선소 등에 너무 많아요. 이런 조직을 연결해서 싸울 수 있는 조직을 만들어 보자, 우리 용균이 기리는 사업 뿐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안전하게 일할 수 있게 하는 조직을 한번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었어요."

우여곡절 끝에 지난 10월 26일 김용균재단이 출범했다. 재단은 가장 먼저 노동자가 산업재해를 당했을 때 가족들의 권리, 언론 대처 방법 등 '산재 대응 매뉴얼'을 만들어 전국적으로 알리고, 산재 사고가 났다는 연락을 받으면 피해 가족들을 만나 지원할 예정이다. 김미숙 대표는 처음에 사고를 당했을 때 자신처럼 누구한테 도움을 청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재단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 2019년 8월에 발간한 백서 <김용균이라는 빛> 1권. 지난 2018년 겨울 62일간의 투쟁 기록을 담았다. ⓒ

 

▲ <김용균이라는 빛> 2권. ⓒ

뒷 이야기

요즘 김미숙 대표는 여기 저기 강연을 다니기도 하고 집회에 참석해 발언하기도 한다. 그리고 재단 설립을 선전하고 후원회원을 모으고 있다. 후원회원은 몇 명 모았냐고 물었다.

"이제 겨우, 한 오백 명?"

- 단 시간에 엄청 많이 모인 건데요?
"아 저는 이 일을 처음 하다 보니까… 워낙 많은 사람들이 합류를 했잖아요. 용균이 투쟁에. 처음 겪는 거니까 후원회원이 많은 건지, 적은 건지 감을 못 잡아요."

- 사고 나기 전에 보던 사회하고 지금 보는 사회하고 어떻게 달라요?
"이 일이 있기까지 저는 앞만 보고 살았어요. 애 아빠는 아파서 병원에 있지, 용균이 키워야지, 학교 보내야지, 돈 벌어 살기만도 바쁜 시간이었어요. 힘들었죠. 그래도 용균이가 있어서 좋았어요. 걔만 잘 자라주면 더 바랄 게 없었죠.

이 일 나고 초반에 세월호 유가족 분들이 오셔서 저를 많이 안아 주셨어요. 그분들한테 제일 처음 묻고 싶던 거는 애 없이 어떻게 살았는지였어요. 세월호 유가족 영석이 엄마는 애가 하나밖에 없었잖아요. 그 아이를 잃고 아픔을 어떻게 견디고 있을지 그게 제일 궁금했어요. 저는 정말… 살아갈 자신이 없었거든요. 저런 일 나는 겪지는 않겠구나. 근데… 내가 겪더라고요. 어느 순간 저 사람이 내가 되더라고요. 사회가 이렇게 안전하지 않다는 걸 모르고 살아서… 정말… 근데 그 용균이 죽음 같은 죽음들이 엄청 그동안 많이 있었고, 앞으로도 진행되는 거고 막, 엄청나게 저한테 큰 충격이었어요. 그리고 또 사회를 위해서 싸우는 분들이 이렇게 많구나. 여기 와서 알았죠.

제가 처음 안 게 한두 개였겠어요? 제가 있는 세상이 밝음에서 어둠으로 들어와 있는 느낌이거든요. 그 어둠 속에서도 밝음을 위해서 싸우고 있다는 거. 아, 희망이 있구나. 그런 걸 본 거죠. 싸우면 되겠구나. 노조가 있으면 자기 권리를 지킬 수 있다는 걸 여기서 배웠어요."

김미숙 대표는 이제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
 

▲ 지난 11월 11일, 공공운수노조 발전비정규직연대회의가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 추모분향소를 설치하고 특조위 권고안 이행을 촉구하는 농성에 돌입했다. 농성장을 설치하는데 이를 막고 있는 서울시 공무원들을 지켜보는 김용균씨 어머니. ⓒ 사진제공 김용균재단

덧붙이는 글 월간 작은책 12월호에도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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