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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읽는 책] 김현인 '논 벼 쌀'... 다 같은 논이 아닌, 다 다른 논으로

등록|2019.12.24 09:11 수정|2019.12.24 09:11
 

▲ 겉그림 ⓒ 전라도닷컴

 
논둑을 세우던 날, 하늘을 땅 위에 새기던 날이면 내 육신의 목숨줄도 이 길을 따라 가는 것이니 천지간의 목숨이 복되고도 귀하구나, 굵은 땀에 흔들려 뼛골이 다 닳는들 하나하나 흙을 일으키고 돌을 옮기며 세세연년의 복전을 기약하노라. (47쪽)

겨울이 저물고 봄이 될 즈음, 해마다 시골마을에서는 마을지기 알림말이 구석구석 퍼집니다. 어떤 알림말인가 하면, 새해에 논에 심을 볍씨를 두어 가지 가운데 골라서 마을지기한테 말해 달라는 알림말이에요. 요즈막은 웬만한 논마다 농협에서 품종개량을 한 볍씨를 내다팔고, 시골 흙지기는 농협 볍씨를 사다가 심습니다.

가을에 거둔 벼를 농협에 내다팔자면, 봄에 농협 볍씨, 그러니까 씨나락을 사야 하고, 농협에서 내다판 씨나락이어야 농협에 가을벼를 팔 수 있어요. 나라에서 사들이는 모든 벼는 나라에서 심으라고 콕 집어서 흙지기한테 파는 몇 가지 볍씨입니다.
 
벼의 반응은 직선적이다. 너희는 내가 필요한가. 그렇게 벼는 묻고 있는 듯했다. (67쪽)

시골지기로서 흙을 만진 나날을 갈무리한 <논 벼 쌀>(김현인, 전라도닷컴, 2019)을 읽으며 논살림 얼거리를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나라에서는 왜 똑같은 볍씨만 심도록 이끌까요? 지난날에는 고장마다, 고을마다, 마을마다, 또 집마다 다른 볍씨를 심었다는데, 왜 오늘날에는 모조리 같은 볍씨를 심어야 한다고 북돋울까요?

마을 어르신 말씀을 들으면, 농협에서 파는 볍씨는 심어서 가을알을 거둔 다음에 이듬해에 심으면 그럭저럭 나지만, 이태 뒤부터는 거의 안 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라(농협)에서 흙지기한테 팔아서 온나라 논을 채우는 여느 볍씨는 '씨알을 거두어 심을 수 없는 씨앗'인 셈입니다. 여느 밥상에 오르는 쌀이란, 여느 밥집에서 다루는 쌀이란, 땅에서 새롭게 자랄 수 없는 알맹이랄까요.
 
어찌 보면 여러분은 똑똑해질 것이 아니라 한없이 다양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217쪽)
 

▲ 시골 가을들. 저녁빛을 받으며 붉은빛까지 더하는 들판. ⓒ 최종규/숲노래



나라에서 볍씨를 다룬다면, 나라에서는 통계를 내거나 돈을 벌기 쉽겠지요. 그러나 다 다른 고장이며 고을이며 마을에서 다같은 볍씨를 심다가는 비바람이나 가뭄에 쉽게 큰일이 날 수 있습니다. 고장마다 날씨가 다를 텐데 고장마다 엇비슷한 볍씨를 심도록 한다면, 또 한 고장이어도 고을이며 마을마다 날씨가 다르기 마련인데, 모조리 같은 볍씨로 맞추려 한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까요? 무엇보다도 '농협 볍씨를 손수 심고 거두어 새로운 씨나락으로 삼을 수 없도록 품종개량'을 했다면, 이러한 쌀이 우리 몸에 얼마나 이바지할까요?

흙지기 김현인님은 <논 벼 쌀>이라는 책을 쓰면서 이 대목을 아프게 밝힙니다. 이러면서 외치지요. "사람들이 똑똑해지기보다는 다 다르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우리가 나아갈 길은 '쉬운 관리와 표준화'가 아닌, 고장맛 고을멋 마을살림을 다 다르게 가꾸면서 '서로 다르기에 아름답게 새로 어우러지는 사랑'이 될 노릇 아닌가 하고 이야기해요.
 
1962년부터 각급학교에서 보리 혼식을 감시하는 도시락 검사가 전면적으로 실시되고, 이는 향후, 어느 역사에서도 볼 수 없는, 산골 누옥의 밥상머리까지 들여다보는 강력한 국민 통제수단으로 자리잡는다. (142쪽)

우리가 나아갈 길이란, 우리 삶터를 가꾸는 길이란, 우리 마음이며 몸을 살찌우는 길이란 무엇일는지 돌아봅니다. 밥 한 그릇에 담는 온누리를 흙지기뿐 아니라 나라일꾼도 어린이도 푸름이도 풀내음하고 바람결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빕니다. "보리 혼식"을 밀어붙이고 나중에는 '혼분식'이라 해서 하루 한끼는 반드시 밀가루를 먹어야 한다고 윽박지르던 새마을운동이었는데, 논뿐 아니라 밥상까지 지켜보며 억누른 그 눈초리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셈이지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글쓴이 누리집(blog.naver.com/hbooklove)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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