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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이 '척왜'를 내걸게 된 사력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 / 29회] 일본의 약탈적인 양곡무역은 농민들에게 이중삼중의 부담이 되고 있었다

등록|2020.01.09 16:38 수정|2020.01.09 16:38
 

▲ 강화도조약을 맺을 당시의 우리측 대표단과 일본측 대표단.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동학농민군이 거사를 하면서 '척왜'를 기치로 든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일본의 약탈적인 양곡무역은 탐관오리의 수탈에 신음하는 농민들에게 설상가상, 이중삼중의 부담이 되고 있었다. 쌀의 일본 유출로 인한 물가의 앙등, 1889년 '조일통어장정' 이후 일본어선의 남획으로 우리 어족자원의 고갈상태, 임오군병, 갑신정변과 관련한 정부의 거액의 배상금 지불 등은 대부분 농민의 부담으로 돌아왔다.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체결을 요구하기 위해 강화도 앞바다에서 무력시위를 벌이고 있는 일본 함대. 사진 출처 : 1978년 동아일보사 발행 <한국백년>.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체결을 요구하기 위해 강화도 앞바다에서 무력시위를 벌이고 있는 일본 함대. 사진 출처 : 1978년 동아일보사 발행 <한국백년>. ⓒ <한국백년>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일본에 개항한 이래 일본 상인들이 조선 농촌에 침투하여 갖은 방법으로 쌀 · 콩 등을 매점하여 일본으로 실어갔다. 이 바람에 조선 농민들은 심한 식량난에 허덕이게 되었다.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상품의 조선 진출은 급속도로 증가되어 상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따라 정부는 1889년 (고종26)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곡물수출금지령을 내렸다. 이른바 방곡령(防穀令)이다. 방곡령이 실시되면서 일본의 상인들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로써 두 나라 사이에 분규가 일어나자 정부는 서둘러 관찰사들에게 방곡령의 해제를 지시하였다. 방곡령이 해제되고 일본에 배상금까지 지불하면서 일본 상인들의 매점 · 매석이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고, 농민들의 생활고는 갈수록 어려워졌다.

일본 상인들은 매년 다량의 농산물, 특히 쌀ㆍ대두ㆍ소ㆍ쇠가죽ㆍ인삼ㆍ면화 등을 약탈해갔다. 1877년 후반기부터 1882년 전반기까지 5년간, 평균 농산물의 대일 수출액은 61만 여 엔이었지만 1891~1893년에는 789만 여 엔으로 늘어났다. 이 농산물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쌀을 필수로 하는 곡물이었다. (주석 6)

  

▲ 방곡령으로 인한 손해배상의 이행을 촉구하는 일본측 문서.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이런 상황에서 전국적으로 한재(旱災)가 거듭되면서 사방에서 도적떼가 횡행하고 무장한 화적들은 닥치는 대로 노략질을 일삼았다. 전국 곳곳에 화적이 없는 곳이 드물게 되어 상화(商貨)의 유통이 막힐 정도에 이르렀다.

농민들은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이 무렵에 농민들 사이에 동학이 구원의 메시아로 다가왔다.

봉건적 신분제와 이중 삼중으로 얽힌 수탈구조에서 해방을 약속하는 동학사상은 농민들의 소망을 반영하기에 모자라지 않았다. 당연하게 도인의 수가 늘어나고, 이들을 교화하기 위해서 여러 지역에 교단지부인 접소(接所)가 설치되었다. 접주를 임명하여 지역 내의 교세확장과 교도의 교화에 힘쓰게 하였다.
  

▲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미국 수탈기지 군산항에 쌀가마니가 수북히 쌓여있다. ⓒ .


동학은 1860년에 창도된 이래 1864년 교조 최제우가 처형되는 등 정부의 극심한 탄압을 받아왔다. 1871년에는 이필제 난에 연루된 혐의로 많은 교도가 박해를 받게 되었다. 동학의 교세를 크게 확장한 것은 제2대 교주 최시형이었다.

최시형은 관의 검거를 피해서 강원ㆍ경상도 산간지역을 중심으로 은밀히 포교활동을 펴는 한편 1883년에는 공주 목천군에 『동경대전』의 간행소를 설치하면서부터 충청지방에까지 교세가 확대되었다. 교세가 확장되자 전라도ㆍ경기도 지역에서도 신도들이 몰려들었다.
  

▲ 천도교의 경전인 <동경대전>. ⓒ 안병기


교세의 확대는 필연적으로 교단의 조직을 보다 체계적으로 정비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수탈구조가 국내의 탐관오리들 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많다는 사정을 깨닫게 되고 '척왜'를 시대정신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동학교단은 1892년 교조 신원운동을 전개할 때부터 '척왜척양'을 내걸었다. 특히 호남지방의 도인들은 1893년 2월 전라감영에 제출한 소장에서 다음과 같이 '척왜'의 이유를 제기하였다.
 

군산세관군산세관 일본제국주의의 수탈의 상징이다. 서울역사와 한국은행본점건물과 같은 양식으로 국내 현존하는 서양 고전주의 3대 건축물 중 하나이다. ⓒ 신민구


이제 왜양(倭洋)의 적이 심복에 들어와 인란(人亂)이 극에 달하였다. 우리의 국도(國都)는 이미 이적(夷狄)의 소굴이 되었다. 가만히 생각컨대 임진년의 원수와 병자년의 치욕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고, 어찌 차마 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나라 삼천리 강토가 짐승의 근거지가 되어 오백 년 종사가 장차 망하고 그 터전이 기장밭이 되고 말 것이니, 인의예지 효재충신은 이제 어디에 있습니까.

하물며 왜적이 뉘우치는 마음이 없이 재앙을 일으킬 마음만을 품고 있어 바야흐로 그 독을 뿌려 위험이 닥쳐왔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별일 없다고 하는데, 지금의 형세는 장작불 위에 있는 것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주석 7)


주석
6> 『조선근대혁명운동사』, 68쪽, 북한사회과학원역사연구소 편, 한마당.
7> 『일본외교문서』5, (한국편), 457쪽, 태동문화사간.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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