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군, 황토현에 포진하다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 / 31회] 정부군이 변변히 무장도 없는 오합지졸의 동학농민군에 참패한 이유
▲ 황토현 정상에 서 우뚝 선 갑오동학혁명기념탑. ⓒ 안병기
무장을 출발하여 백산에 모인 동학군은 군사를 2대로 나누어 부안과 태인으로 진격하여 말목장터에서 1박했다. 다음 하루가 지나자 일부는 그들의 원부(怨部)인 만석보를 헐어버리고, 군청을 습격하여 죄수를 석방시키고 무기고를 파괴하여 무기를 꺼내가지고 황톳재(黃土蜆)의 동남쪽에 매복했다. 황톳재는 해발 35.5m 구릉으로서 말목장터와 고부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 황토현 전적지의 녹두장군 전봉준상황토현 전적지의 녹두장군 전봉준상 ⓒ 이승철
황토현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의 연합부대는 다음과 같다.
이때에 호서대접주 전봉준, 무장접주 손화중, 부안접주 김개남, 남원접주 김낙철, 청풍접주 성두환, 홍천접주 차기석, 청산접주 권병덕, 화포영장 이상진ㆍ이유형ㆍ김덕명ㆍ최경선ㆍ차치구ㆍ정진구 등이 도유 수십만 명을 거느렸고, 그 진법은 서너명 또는 대여섯명으로 하늘에 가득한 별들의 모습을 이루었다. 깃발은 청색ㆍ황색ㆍ적색ㆍ백색ㆍ홍색 등 5색의 기를 사용하여 하늘에 휘날렸고, 이르는 곳마다 포(砲)와 말을 거두었으며 대나무를 깎아 창을 만들었다.
또한 바람을 찢어 각각 어깨에 둘렀다. 각 포의 도유로 하여금 어깨에 궁을(弓乙) 2자를 부치게 하고 몸에는 동심의맹(同心義盟, 한 마음으로 의기를 맹서하다) 4자를 두르게 하였으며, 깃발에는 오만년수운대의(五萬年受運大義)를 특별히 써서 내거니 진실로 전무후무한 변화막측의 신묘한 장수와 훌륭한 병사였다. (주석 7)
▲ 황토현 갑오동학혁명기념탑 우측 부조. ⓒ 안병기
4월 6일 점심때 쯤 해서 태인과 부안의 동학농민군들이 도교산으로 집결하자 백산으로 출동했던 전라감영군도 그 뒤를 쫓아 행군해 갔다. 이 때 동학농민군은 두승산에서 동북으로 뻗어내린 시목리 고지인 사시봉에 진을 치고 있었다. 뒤를 쫓던 관군은 6일 해질 무렵 황토현에 이르러 진을 치고 머물게 되었다.
위치를 약간 설명한다면 동학농민군 진지는 남쪽에 위치하여 높은 곳이요, 이에 비하여 황토현은 북쪽에 위치하여 낮았다. 서로의 거리는 약 1.5Km정도…. 4월 6일 밤 바야흐로 전기는 무르익었다.
▲ 갑오년 농민전북 정읍군 덕천면 황토재 동학혁명기념탑에 세워진 부조 ⓒ 민종덕
동학군측은 이날 밤, 관군 측으로부터 야습해 올 것을 예측하여 병력을 나누어 주위 요처에 잠복시켜 놓고 본진에는 병력이 없는 대신 허수아비를 만들어 흰 포목(布木)으로 위장해 놓았다. 과연 관군은 밤이 깊어 동학군지를 야습해왔다. 관군 측에서는 동학군과의 싸움이 처음이어서 그들을 오합지졸로 과소히 평가한 나머지 거침없이 적진을 치고 들어갔다.
그러나 얼마 후 관군은 스스로가 적군의 위계에 빠진 것을 알았다. 적군들이 전후 좌우에서 치고 달려드니 어느새 포위되어 혼전이 벌어졌다. 지리에 어두워 지척을 분간 못하니 대적을 못하고 시산혈해를 이루며 도망치고 말았다. 그리고 동학농민군 한 부대는 관군의 본진을 기습하여 또한 큰 성과를 거두었으니 이 싸움에서 관군은 영관 이경호, 서기 유상문이 전사하고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 때 관군의 유기품 가운데는 민간인으로부터 약탈한 금ㆍ은 보화가 많이 남아 있었다고 하며 어찌된 일인지 전사한 감영군 가운데는 남자로 변장한 여자의 시체도 있었다고 한다. (주석 8)
▲ 강화도조약 당시 진무영의 훈련장에서 일본군대가 군사 훈련을 하고 있고, 이를 강화부민들이 구경하고 있다. ⓒ 이승숙
정부군이 변변히 무장도 없는 오합지졸의 동학농민군에 참패한 이유를 전문가는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조선의 군대는 19세기 초부터 정번(停番)으로 사실상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881년부터 부분적이지만 일본식으로 훈련을 받았고, 다시 중국식으로 훈련을 받다가 또다시 미국식으로 훈련을 받는 민족적 굴욕을 감수해야 했다. 이것은 민씨 정권이 스스로 불러들인 결과였다.
또한 군내부에서는 신식 군대와 구식 군대의 대립이 발생하였는데, 이는 당시 서울 안의 도시빈민 문제와 연결되어 1882년에 이른바 임오군란이라는 군인폭동이 일어나는 동기가 되었다. 이런 사정이니 만큼 장비는 최신식으로 갖추어져 있다고는 하나 불타는 투지는 바라기 힘들었다.
이와는 달리 농민군은 싸우고자 하는 투지에 찬 사람들로 뭉쳤고, 황토재 전투에서의 승리로 사기가 절정에 달했다. 뒤에 경군과 농민군 간에 벌이게 될 장성 황룡촌 전투는 싸우기 전부터 이미 승패가 결정되었는지도 모른다. 또 여기서, 왜 농민군이 정규군을 대신하여 조선을 외세로부터 지키기 위해 반침략투쟁을 벌여야 했는지 그 해답의 실마리를 볼 수 있다. (주석 9)
주석
6> 신복룡, 『개정판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 173쪽, 선인, 2006.
7> 『동학도종역사(東學道宗繹史)』, 124쪽,『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11)』,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3.
8> 최현식, 앞의 책, 61~62쪽.
9> 오윤, 앞의 책, 175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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