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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이 공개 저격한 위안부 문옥주, 그에 관한 진짜 이야기

[반일 종족주의 20] 근거로 들이댔던 '문옥주 일대기'의 정반대 내용들

등록|2020.01.13 07:51 수정|2020.01.13 07:51
<반일 종족주의>가 논란입니다. 몇 회에 걸쳐 이 책의 문제점을 짚어봅니다. 이 기사는 스무번째로 마지막회입니다. 그동안 이 연재를 아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편집자말]
 

▲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집에서 찍은 위안부 피해자들. ⓒ 김종성


일본 극우파와 한국 뉴라이트(신우익)는 일본군 성노예(위안부 피해자)들이 성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었다고 주장한다. 작년 7월 개봉한 다큐 영화 <주전장>에 등장하는 일본 극우파와 그들에게 동조하는 미국인들은 "그들은 그저 매춘부에 불과했고 보수도 상당히 받았다"고 주장한다. 작년 9월 19일 연세대 류석춘 교수는 '매춘부와 무엇이 다르냐?'는 망언을 해서 사회적 공분을 일으켰다.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와 5인이 공저한 <반일 종족주의> 역시 위안부를 매춘업과 연관시킨다. 이 책 제23장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 편에서 이영훈은 "저는 일본군 위안부가 성노예였다면, 해방 후의 민간이나 기지촌의 위안부는 그보다 훨씬 가혹한 성노예였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한 뒤, 위안부 인권운동가들을 겨냥해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빈곤 계층의 여인들에 강요된 매춘의 긴 역사 가운데 1937~1945년의 일본군 위안부만 도려낸 가운데 일본 국가의 책임을 추궁하였습니다. - <반일 종족주의>에서

일본군 위안부 역사가 '매춘의 긴 역사' 가운데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위안부를 바라보는 시각이 류석춘과 별반 차이가 없다. 물론 이영훈은 차이가 전혀 없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말한다.
 
물론 차이는 있었습니다. 민간의 공창제에 비해 군 위안부제는 고노동, 고수익, 고위험이었습니다. - <반일 종족주의>에서

많은 병사를 상대해야 하다 보니 '고노동', 그래서 많은 돈을 벌다 보니 '고수익', 그렇지만 전쟁 중의 활동이다 보니 '고위험'일 뿐이지, 일본군 위안부 역시 '매춘의 긴 역사' 속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고자 이영훈이 <반일 종족주의> 제23장에서 상당히 비중 있게 거론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위안부 피해자 문옥주 할머니다. 제23장 내의 소제목인 '방패사단의 위안부 문옥주' 파트에서 그에 관한 언급이 자세히 이어진다.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 근거로 주장하지만...

문옥주는 3·1운동 5년 뒤인 1924년 4월 23일 대구에서 출생했다. 16세 때인 1940년 위안부로 강제연행돼 중국과 미얀마(버마)에서 성노예 생활을 한 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귀환했다. 그의 별세를 알리는 1996년 10월 26일자 대구 <매일신문> 부고기사 '일군(日軍) 위안부 문옥주 할머니 숨져'는 귀국 뒤 그의 인생을 이렇게 압축했다.
 
일제의 정신대 만행을 폭로한 대구의 첫 증언자였던 고 문옥주 할머니는 평생 결혼도 못하고 피붙이라고는 없이 파출부와 보따리 장사로 번 돈을 약값으로 쓰면서도 죽는 순간까지 서푼어치 배상을 거부하고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받아내기 위한 노력을 늦추지 않았던 조선의 딸이었다.
- <매일신문>  '일군(日軍) 위안부 문옥주 할머니 숨져'
 

▲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 저자 모리카와 마치코 작가가 5일 통영 남망산에 있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조형물인 '정의비'를 찾았다. 2017.8.5 ⓒ 윤성효


하지만 '조선의 딸' 문옥주가 성노예도 아니고 피해자도 아니라는 게 이영훈의 주장이다. 이영훈은 모리카와 마치코 작가가 3년간 인터뷰를 토대로 1996년 펴낸 <문옥주, 버마전선 방패사단의 위안부였던 나(文玉珠―ビルマ戦線楯師団の慰安婦だった私)>를 근거로 그런 주장을 개진한다. 문옥주 일대기인 이 책은 김정성 교토대학 연구원에 의해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라는 한국어판으로 번역돼 있다.

이 책에 따르면, 문옥주는 1940년 가을에 강제연행됐다. 일본 이름을 사용하는 한국인 친구 하루코 집에서 놀다가 저녁이 돼서 귀가하던 중 벌어진 일이었다. 이 책의 한 대목이다.
 
그날도 하루코네서 놀다가 저녁이 되어, 걸어서 이십 분 정도 되는 거리의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 '너, 여기로 잠깐 와' 하는 소리에 놀라서 멈춰섰다. 그때 나를 불러 세운 사람들은 일본인 헌병과 조선인 헌병, 조선인 형사였다.
-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에서
 

▲ <문옥주, 버마전선 방패사단의 위안부였던 나(文玉珠―ビルマ?線楯師?の慰安婦だった私)>. ⓒ 나시노키사


그 길로 문옥주는 헌병대에 끌려간 뒤 다음날 대구에서 기차에 태워져 만주의 위안소로 끌려갔다. 하지만 이영훈은 문옥주가 끌려갔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반일 종족주의>에서 이렇게 말한다.
 
헌병에 잡혀갔다고 했지만, 그대로 믿어서는 곤란합니다. 어머니나 오빠의 승낙 하에 주선업자에 끌려간 것을 그렇게 둘러대었을 뿐입니다. - <반일 종족주의>에서

하지만 이영훈은 근거를 대지 않았다. 대신 그는 위 문장의 바로 앞에 "문옥주의 집은 찢어지게 가난하였습니다. 양식이 떨어지면 7~8세의 문옥주는 이웃집을 다니면서 동냥을 하였습니다"라는 두 문장을 배치했다. 가난 때문에 문옥주가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됐으리라는 생각을 독자 스스로 품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 이영훈은 문옥주가 성노예가 아님을 보여주고자 그가 돈을 많이 벌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렇게 말했다. 아래 글 속의 '전차금'은 선금이다. 그리고 '원'은 '엔'으로 읽어야 한다.
 
문옥주는 1943년 8월부터 저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짐작건대, 그 전에는 전차금을 상환하느라 돈을 모으기 힘들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저금은 1945년 9월이 마지막이며 총액은 2만 6551원이었습니다. - <반일 종족주의>에서

1943년 당시 일본군 육군 중장의 연봉이 5800엔이었다. 문옥주의 저금 액수는 육군 중장의 4년 6개월치 월급에 해당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른 위안부들과 마찬가지로 문옥주 역시 실제로는 돈을 만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서류상으로만 금액이 쌓여갔던 것이다. 1992년 5월 13일자 <한겨레> 기사 '일제 종군위안부 군사우편저금, 일(日) 저축금 원부서 확인'은 이렇게 말한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에 의해 종군위안부로 끌려가 고통을 당했던 문옥주(68) 씨의 우편저금이 일본 당국의 저축금 원부에 그대로 남아 있는 사실이 11일 확인됐다. 일본 <교도통신>에 따르면, 문씨는 이날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 우체국을 방문해 강제연행된 뒤 미얀마(옛 버마)에서 저축했던 군사우편저금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 <한겨레>  '일제 종군위안부 군사우편저금, 일(日) 저축금 원부서 확인'

이영훈은 "문옥주는 악착같이 꽤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라며 "인기가 많고 능력이 있는 위안부였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문옥주가 고수익을 거둔 것처럼 말했지만, 실상은 돈을 손에 쥐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문옥주가 1992년 시모노세키로 건너가 금전 지급을 청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문옥주는 그 돈을 끝내 받지 못했다. 2016년 5월 17일자 <연합뉴스> 기사 '위안부 피해자 고 문옥주 증언, 기록 일치'는 "문씨는 1996년에 세상을 떠나 돈을 돌려받지 못했다"고 말한다. 시모노세키를 방문한 1992년으로부터 4년이 경과하도록 일본이 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고래 심줄처럼 질긴 일본이라는 느낌이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다.

이영훈이 말하지 않는 것들

이영훈은 문옥주가 성노예가 아님을 입증하고자, 그가 계약이 만료돼 귀국길에 올랐다가 스스로 귀국을 보류하고 위안부 생활을 좀더 했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그러면서 "이 사건이 위안부의 성격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는 매우 중요합니다"라면서 "위안부 생활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선택과 의지에 따른 것이었습니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계약이 만료됐다', '스스로 귀국을 보류했다' 등등의 표현에 접하다 보면, 위안부 생활이 자발적 선택의 결과였던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영훈이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를 근거로 위의 결론을 내렸지만, 실제로 그 책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는 점이다.

문옥주가 귀국 허가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 일본이 패망해가는 데다가 미얀마에 대한 공습이 심해서 생명과 안전을 담보할 수 없게 되자 문옥주가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서 벌인 조작극의 결과였다.
 
손님으로 오는 군의관에게 이 문제에 대해 상의하였다. '귀국하기 위한 증명서가 필요한데요. 손에 넣을 수 없을까요?'라고. 그러자 그 군의관은 내가 폐병이 났다는 진단서를 써주었다. 군의 중좌와 소좌 두 사람의 서명으로 진단서에 '기침을 하면 가끔 피를 토함'이라고 써주고는 '당신이 너무 건강해 보이면 거짓 진단서인 것이 들통나서 내 목이 날아가니 꼭 병자처럼 행동해요'라고 당부했다.
-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에서

병사들과 신체적으로 접촉하는 위안부가 폐병에 걸렸다면, 부대에서 어떤 조치를 취할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문옥주가 귀국허가를 받은 것은 가짜 진단서로 일본군을 속였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위안부에게 자유선택을 허용해준 결과가 아니었다.

그리고 문옥주가 귀국을 포기한 것은, 책에 따르면 선박을 타기 직전 대합실에서 깜빡 졸다가 아버지의 환영을 봤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지금 가는 길이 위험하니 그냥 돌아가라고 했다. 그 전에도 공습 전에 아버지가 꿈에 나타나 계시를 해준 일이 있었다. 그런 경험 때문에, 이때도 귀국을 포기했던 것이다. 실제로 문옥주가 타려고 했던 배는 미군 잠수함의 공격으로 침몰됐다.

성노예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문옥주가 다시 그 생활로 돌아간 것은 그가 자유인임을 보여주는 증표가 아니다. 위험을 피하려면 그 길 외에 달리 선택지가 없었던 것이다.
 

▲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 저자 모리카와 마치코 작가가 통영노인전문병원에 입원해 있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복득(98) 할머니를 찾아 손을 잡았다. 2017.8.5 ⓒ 윤성효


이 외에도 이영훈은 문옥주가 일본 병사를 죽인 뒤 법정에서 행한 진술도 근거로 제시한다. 술 취해서 칼을 휘두르는 병사로부터 칼을 빼앗아 정당방위를 한 문옥주가 군사법정에서 "우리도 일본인이기는 마찬가지다"라며 "천황 폐하가 내린 칼을 일본군을 위안하러 온 위안부를 향해 겨누는 것은 잘한 일인가"라며 스스로를 변호하자, 재판관이 그 말에 감복해 무죄판결을 내렸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문옥주가 이처럼 높은 자아의식을 가진 것은 그가 성노예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이영훈은 해석한다. 살아남기 위해 일본 판사한테 '아부성 발언'을 한 것을 그렇게 평가했던 것이다. 문옥주의 그 발언이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점은 법정에 가기 전 그가 어떤 생각을 했는가에서도 드러난다. 문옥주는 재판을 받기 전에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가를 이렇게 서술했다.

"조선인인 내가 일본 군인을 죽였으니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지 않을 것은 불을 보듯 훤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면 되지, 아무리 열심히 생각해도 좋은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감옥 안에서 그저 이것저것 되는 대로 계속 빌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문옥주는 판사 앞에서는 자신이 일본인인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처럼 말했지만, 이처럼 재판 전에는 '조선인인 내가 일본군을 죽였으니 어쩌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고민 끝에 나온 말이 '우리도 일본인'이라는 법정 진술이었다. 이 말을 하면서 그는 판사의 안색을 살폈다. 그 순간을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그렇게 말했을 때 재판관은 고개를 끄덕였고, 순간적으로 얼굴색이 싹 변했다. 뭔가 좋은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일이 잘 풀릴지도 몰라' 하는 직감이 들었다."

문옥주가 '우리도 일본인'이라고 발언한 것은 일본인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졌기 때문도 아니고, 성노예가 아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일본 판사를 상대로 살아남기 위해 한 발언이었을 뿐이다.

이처럼 이영훈은 '조선의 딸' 문옥주가 돈도 많이 벌고, 귀국허가도 받고, 높은 자아의식도 가진 점들을 근거로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었다'라는 주장을 개진한다. 그러면서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를 증빙자료로 제시한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증빙자료는 지금껏 설명한 것처럼 일본 극우와 뉴라이트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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