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지철같은 사람 이해 안 갔지만..." 이희준이 택한 방법
[인터뷰] 영화 <남산의 부장들> 곽상천 대통령 경호실장 역의 배우 이희준
▲ <남산의 부장들>에서 곽상천 역할을 맡은 이희준 ⓒ (주)쇼박스
"실제로 만난다면 말도 섞고 싶지 않다. 그 사람의 10m 근처에도 절대 안 갈 것 같다."
이희준은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본인이 연기한 곽상천 경호실장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1979년 부산과 마산에서 유신 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 항쟁이 번졌을 당시 차지철 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죽였는데, 까짓 것 우리도 100만 명 정도 죽는다고 큰일나겠나. 탱크로 깔아뭉개자"라며 강경진압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에서도 이 장면은 그대로 재현됐다. 이날 인터뷰에서 이희준은 "곽상천을 이해하고 연기하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캄보디아에 대해 그가 하는 말은 무시무시하다. 이 말을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이해가 전혀 안 됐다. 그래서 곽상천이 어떻게 자랐고 5.16 쿠데타에서 어떻게 각하를 만났고 그 이후 각하가 그 인물에게 얼마나 잘해줬는지, 혼자서 (상상을 통해) 캐릭터 구축을 탄탄하게 하려고 했다. 아마 곽상천을 그토록 믿어주는 사람은 각하가 유일했을 것이다. 생물학적 아버지보다 더한 사람이지 않았을까.
곽상천같은 사람을 실제로 만난다면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 10m 이내에도 절대 안 갈 것 같다. 실제로 (시나리오에서) 곽상천을 봤을 때 사람 이희준의 거부감이 있었다. 그래도 연기를 하려면 인물을 이해해야만 하지 않나.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애쓰다 보니 영화 촬영이 끝났을 때는 연민이 조금 들기도 했다. 곽상천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이다."
▲ ⓒ (주)쇼박스
자신이 맡은 인물을 이해하고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는 것. 평생 만나본 적 없었던 사람일지라도 이해하려고 노력해보는 것. 이희준이 배우라는 직업에 매료된 이유이자, 배우로서 그의 가장 큰 목표이기도 하다. 영화 <해무>에서는 욕구에 충실한 선원으로, < 1987 >에서 보도지침을 어기고 진실을 보도하는 기자로, <미쓰백>에서 책임감 있는 형사로 그동안 수많은 작품에서 이희준이 극에 녹아들 수 있었던 것 역시 인물에 대한 이해가 바탕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희준은 "배우를 하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되고 이해하게 되는 게 좋다"고 털어놨다.
"내가 <해무>를 하지 않았다면 어부를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어부를 직접 인터뷰 하면서 '아저씨는 뭐가 힘드세요?' 이런 대화를 나눠볼 이유도 없지 않나. 어부들의 삶을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고, < 1987 >을 하면서 '나라면 그런 기사를 쓸 수 있었을까, 겁나지는 않았을까' 고민하고 공감해볼 수 있게 됐다. 그런 사람도 있으니까. (여러 작품을 하면서) 사람에 대한 공감의 폭이 조금씩 넓어지는 것 같다. 나이를 먹고 운 좋게 내가 더 많은 캐릭터들을 연기하게 된다면, 내 공감 능력의 미세혈관이 어디까지 뻗칠 수 있을까 그런 기대도 한다."
연기를 제외하면 이희준의 유일한 취미는 드로잉이라고. 쉬는 날이면 지하철역, 기차역, 동네 공원 등지에 몇 시간이고 앉아 사람을 그린다는 그에게 드로잉은 연기와는 또 다른 방법으로, 사람을 만나고 이해하는 수단이었다.
"(연기를 빼면) 내가 좋아하는 건 딱 세 가지다. 술 마시면서 연기 얘기 하는 것, 연기하는 동료들과 등산하는 것, 대단한 실력은 아니지만 드로잉이나 그림 그리는 것. 그림을 그릴 때 스스로 편안함과 행복함을 느낀다. 주로 사람을 그린다. 배우이다 보니까 사람을 관찰한다. 지하철이나, 기차역에서 이동하는 사람들, 다양한 사람들을 그린다. 그린 지 한 4~5년 넘었다. (대중에게) 공개할 정도의 실력은 아니다. 색칠도 해보곤 하지만 끔찍하다(웃음). 내겐 하나의 명상 같은 시간이다. 뭔가 그릴 때 대상 자체에 집중하게 되지 않나. 사람의 눈과 주름을 보면서 저 주름은 어떻게 생겨났나, 어떤 일을 겪었나 상상해본다. 배우로서 휴식하는 연장선인 것 같다."
▲ ⓒ (주)쇼박스
한편 이희준은 전작 <마약왕>에 이어 <남산의 부장들>까지, 연달아 우민호 감독의 작품을 선택했다. 그는 이번 작업을 하면서 "우 감독의 연출력에 다시 한 번 놀랐다"고 감탄했다. 앞서 언론배급시사회에서 이병헌은 "<남산의 부장들> 촬영 도중 <마약왕>이 개봉됐는데, 흥행에 실패해서 그런지 우민호 감독이 현장에서 굉장히 차분했다"며 우민호 감독을 놀리기도 했다. 이날 이희준 역시 그에 대해 언급하며 "진짜 <마약왕> 때와는 우민호 감독의 연출 스타일이 완전히 달랐다"고 귀띔했다.
"<마약왕> 때는 즉석 애드리브도 많았다. 상황에 맞게 배우들과 함께 빈 틈을 채워가면서 영화를 즐겁게 만들어 갔다. 반대로 여기(남산의 부장들)서는 오랫동안 차갑게, <남산의 부장들>만의 온도를 유지하려고 (감독님이) 진짜 애쓰셨다. 그런 걸 영화를 보고 알았다. 촬영할 때는 몰랐다. 그런 의미에서 되게 (우민호 감독의 연출력이) 놀랍다고 생각한다. 감독은 정말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느꼈다."
그도 지난 2018년 단편 영화 <병훈의 하루>를 통해 연출에 도전했다. 당시 <병훈의 하루>는 국내외 여러 영화제에 초청되고 전주국제영화제 단편경쟁 부문에 진출하는 등 꽤 주목을 받았다. "감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그의 말이 겸손으로 들렸다. 이희준은 "그런 영화를 너무 보고싶어서 누가 만들어줬으면 좋겠는데, 아무도 안 만들 것 같아서 내가 사비로 만들었다"며 "영화를 만들면서 감독들을 더욱 존경하게 됐다"고 손사래를 쳤다. 이어 그는 연출을 경험한 뒤 달라지게 된 부분이 있다고 고백했다.
"영화 감독님들을 더 존경하게 되고 새롭게 보이기도 하더라. (직접 연출을 경험하고) 가장 크게 바뀐 점은 비 오는 날의 내 반응이다. 배우는 촬영 날인데 비가 오면 '아싸' 한다. 90퍼센트? 친한 배우들과 등산을 가거나 술도 한 잔하면서 놀기도 하고. 내 단편 영화는 3회차로 찍었는데, 마지막 회차 촬영 때 새벽 5시에 모이기로 했다. 전날 잠을 자는데 밤 12시쯤 비가 부슬부슬 오는 소리가 들렸다. 벌떡 일어나서 '비 언제 그치지, 그칠 비인가' 고민하느라 한숨도 못 잤다. 5시에 모였는데 비가 그때까지 계속 왔다.
PD 형이 '감독님 어떻게 할까요?' 물었다. 원래 내가 쓴 시나리오에는 비가 오지 않는다. '오늘은 실내에서만 찍고, 야외 촬영은 다음에 하루를 다시 잡자'고 말했더니, PD 형이 귓속말로 '감독님 그러면 500만 원이 더 듭니다'라고 하는 거다. 그래서 내가 '그럼 오늘 다 찍자'고 했다. 마침 영화를 보면 비가 오다가 후반에 그친다. 마치 연출한 것처럼, 인물의 심리에 따라 비가 그친다. 얻어걸린 거다. 이제는 배우로 참여하는 작품에서도 (촬영 날) 비가 오면 (감독에게 미안해서) 신난 마음을 좀 숨기려고 애쓴다."
장편영화에 도전할 계획은 없느냐는 물음에 그는 "또 보고 싶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기면, 그게 구체화 되면 도전해보고 싶긴 하다. 아이디어가 생각날 때마다 메모하고 쓰고 있기는 하다"며 "내가 배우로 참여하는 대본들과 비교하면 형편없다. 그래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때그때 많이 메모하는 편"이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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