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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 영화에 반대하며 뿌린 민중 영화 씨앗

[한국영화운동 40년 ⑤] 민중과 호흡하는 영화를 추구했던 '서울영화집단'

등록|2020.02.05 06:47 수정|2023.01.18 15:23
 

▲ 1982년 서울영화집단 회원들. 왼쪽 윗줄 홍기선 감독, 전양준 부산영화제 위원장, 정성일 평론가, 박광수 감독. 김의석 감독, 아래줄 이정국 감독, 김홍준 감독, 문원립 감독, 송능한 감독, 김인수 전 시네마 서비스 대표 등등 ⓒ 서울영화집단


서울대 얄라셩 영화연구회의 핵심을 이루던 회원들이 학교를 떠나던 1982년 3월, 영화의 사회 비판적 기능에 주목하는 최초의 영화단체가 만들어진다. 그 이름은 서울영화집단. 얄라셩으로 출발한 영화운동이 학교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었다. 취직과 군입대, 유학 등으로 대거 학교를 떠난 알라셩 회원들은 '영화'라는 구심점을 계속 갖고 싶어 했다. 그 노력이 서울영화집단의 결성으로 이어지게 된다.

홍기선, 김동빈, 박광수, 문원립, 송능한, 윤영주, 오만호, 배인정, 김인수, 김홍준, 박은미 등이 회원이었다. 81년 얄라셩 3대 회장이었던 김인수는 대학 재학 중이었지만 창립회원으로 참여했다.

특징은 얄라셩이 아닌 다른 대학 출신들도 개별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동서영화연구회에서 활동하던 전양준(현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과 휴학생이었던 김의석(전 영진위원장) 등이었다.

박광수 송능한이 주도

얄라셩 창립 회원으로 서울영화집단에도 참여한 김동빈(감독)에 따르면 "초기 서울영화집단을 만들고 주도했던 것은 박광수와 송능한이었다"고 한다. 이들이 다른 대학이나 영화모임에 있던 사람들을 서울영화집단으로 이끄는 역할을 했다. 각 대학에서 새로운 영화를 고민하던 사람들이 서울영화집단이란 이름으로 모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 1982년 서울영화집단 개소식에 참석한 정성일(평론가), 전양준(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홍기선(감독) ⓒ 서울영화집단


동서영화연구회에서 활동했던 전양준은 "문화원을 다니며 가깝게 지내던 홍기선, 김동빈, 박광수, 송능한 제안으로 합류하게 됐다"며 "대학에서 영화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모였고, 영화이론에 대해 토론을 많이했다"고 말했다. 전양준은 이후 1985년 계간 <열린영화>에 실린 '작은영화를 위하여'라는 글을 통해 소형영화와 단편영화로 불리는 8mm, 16mm 영화에 대해 '작은 영화'라고 정의했다.

당시 중앙대학교 학생이었던 김의석(전 영진위원장)은 "대학 휴학 중이었는데 박광수 감독과 알고 지냈다"며 "영화를 찍을 수 있는 단체를 만든다고 해서 가입하게 됐고, <장님의 거리>(8mm. 1982)를 함께 제작했다"고 회상했다. "황규덕과 문원립 등도 서울영화집단에 왕성하게 참여했었다"고 덧붙였다.

서울영화집단 회원은 아니었지만 긴밀한 관계를 갖고 개소식에서 참여했던 이정국(세종대 교수, 영화감독)에 따르면 "당시 영화 서클이 몇 개 되지 않다 보니,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을 다니며 서로가 다 아는 사이였고, 지속적인 교류가 진행 중이었다"고 한다.

이정국은 "동서영화연구회에서 활동했는데, 서울영화집단과 대학 영화서클 등과 함께 세미나를 갖거나, 신촌 영화마당과 막 태동하기 시작한 각 대학 영화동아리를 다니며 영화 강의를 다녔다"며 서울영화집단이나 다른 모임들이 동등한 입장이었다"고 말했다. 정성일(평론가) 역시도 서울영화집단과 교류했고, 개소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중앙대 이용관(현 부산영화제 이사장)이 서울영화집단과 만난 것도 1982년 함께 세미나를 하게 된 것이 계기였다. 이용관은 "1982년이던가 당시 조경환(전 부평문화센터 관장, 문화기획자)이라는 친구가 주선을 해서 서울영화집단을 만나게 됐다"며 "함께 영화세미나를 몇 차례 했었는데, 이 자리에서 박광수를 알게 돼 친구가 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용관은 또한 "서울대 알랴성과 서울영화집단은 한국영화운동의 시작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했다. 이어 "당시 신촌 주변의 연세대, 이화여대, 서강대, 홍익대 등의 대학들을 중심으로 모이는 모임이 있었고 서울대와 고려대 쪽이 모였는데, 서울영화집단이 만들어지면서 이들과 교류를 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서울영화집단은 당시 영화계의 주류로 통칭되던 충무로에 반대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영화이론 정립과 제작에 몰두했다. 현실참여에 주목한 연구작업의 성과로 책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를 펴냈다. 또 여러 편의 8mm, 16mm 영화도 제작했다. 황규덕 감독의 <전야제>, 문원립 감독의 <결투>, 김의석 감독이 참여한 <장님의 거리>, <생활>, <그 여름> 등이 주요 작품이다.
 

▲ 서웅영상집단에서 제작한 소형영화 <결투>. 문원립 감독 연출, 김인수, 황규덕 출연 ⓒ 김인수 제공


첫 작품은 82년 봄에 제작한 <판놀이 아리랑>이었다. 당시 공연 중이었던 연우무대의 마당극 <판놀이 아리랑 고개> 8mm 필름으로 기록한 실험적 요소가 가미된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박광수, 김홍준, 황규덕, 문원립이 공동연출을 했고, 공연 내용뿐만 아니라 연습장면, 관객 인터뷰, 연우무대 총평 등을 담았다. 공연장과 분장실, 공연 사진 등을 영상으로 담고, 공연실황과 인터뷰 등은 음향으로 담아 결합시켰다.

이러한 시도는 영상과 음향 간의 불일치를 통해 관객의 심리를 영화에 참여시키도록 한다는 의도로 해석됐다. 관객이 영화에 몰두해 자신과 주인공을 일치시킨다는 종래 영화 틀을 버리고 부조화하는 영상화 음향이 일으키는 다른 작용이 관객을 객관적 위치에 서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영화를 계기로 회원들이 더 모여들었고 '서울영화집단'은 정식으로 발족할 수 있었기에 서울영화집단의 기초 역할을 작품이기도 했다. 이후 제작비가(당시 20여만 원) 적립되면 소형 영화 한 편(20분내외)씩을 만들고 이를 놓고 토론과 연구를 계속해갔다.

민중과 호흡하는 영화

서울영화집단은 남영동에 작업공간으로 활용하는 사무실을 확보하면서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 개인들이 번역료와 원고료 등을 모아 어렵게 사무실을 마련했고, 새로운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집단생활을 하며 개인제작과 공동제작을 병행했다. 덕분에 다수의 단편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다.

1983년 11월 29일자 <중앙일보>는 '민중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새로운 영화의 길을 찾자'란 기사를 통해 기성영화계의 구태의연한 탈을 벗어나 공부하고 땀흘리는 젊은 영화인들의 모임이 있다며 서울영화집단을 소개했다. 기사에는 서울영화집단이 지향하는 민중의 삶에 대한 영화운동의 방향이 강조돼 있다.
 
'서울영화집단', 서울대 얄라성 영화연구회 출신 회원을 주축으로 12명의 20대 영화인들이 발족한 영화연구 모임이다. 이들은 그동안 첫 공동작품 <아리랑 판놀이> 등 8∼16m짜리 소형영화 8편을 만들어 연구하고, 최근엔 영화논문집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학민사)를 펴내는 등 활발한 영화운동을 펴고 있다. (중략)

회원들은 매주 두 번씩 이 낡은 방에 모여 앉아 그동안 각자 공부한 것들을 토론하고 제작계획도 세운다. 토론이 열기를 띠다 보면 밤을 지새우기 일쑤고 회원중 1∼2명씩은 아예 이곳서 숙식을 하기도 한다. 끼니는 주로 라면이고 냉방의 잠자리는 낡은 이부자리 한 채가 전부다.

20대 청년들이 밤낮 없이 모여 앉아 영사기도 돌리고 토론을 벌이다 보니 오해도 받게 마련. 한때 수상한 집단으로 신고돼 경찰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춥고 낡은 방에 모여 앉아 알아주지 않는 작업에 전념하는 이들이지만 우리 영화계의 현실과 나아가야 할 길을 보는 눈은 누구보다 날카롭고 애정은 누구보다 깊고 뜨겁다.

"기성 영화제는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의 삶과는 동떨어진 줄기로, 보고 즐기고 나면 그뿐인 '소비형 상업영화'를 양산해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화가 나아가야 할 참다운 길이 아닙니다."(송능한)

영화는 민중의 삶을 담아 공감하고 새로운 문제로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들어 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영화에서 민중이 소외돼서는 안 되며, 늘 그들과 함께 호흡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문화에서 소외된 소도시와 농촌의 민중을 찾아 그들의 삶을 담아야 한다는 얘기다. 이같은 새 운동에서 8∼16m 소형영화제작 방법을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다고 덧붙인다.

"이 같은 영화운동이 활성화되기 위해선 누구나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현행 영화법이 개정되어야 합니다. 영화제작권을 독점하고 있는 제작자나 작가의식이 결여된 일부 감독 등 기성영화인들은 민중을 영화로부터 소외시켰습니다. 70년대 이후 영화계의 침체는 그 근본 원인이 여기에도 있다고 봅니다."(홍기선)

'서울영화집단'회원들은 기성영화계가 영화의 사명을 외면하고 상업적으로만 흘러왔다는 데 대해 공통된 비판의식을 갖고있다.(중략) 이들은 이러한 운동이 같은 세대들의 공감을 얻어 좀더 확산되고 발전되면 우리나라 영화계의 장래는 조금이나마 제 길을 찾아들게 되지 않겠느냐는 희망을 조심스레 밝힌다.
 
<수리세> <파랑새>로 구체화된 민중영화
 

▲ 서울영화집단이 제작한 8mm 다큐멘터리 영화 <수리세> ⓒ 한국영상자료원

 
이들이 강조했던 민중의 삶을 담은 영화는 1984년 <수리세>와 1986년 <파랑새>로 구체화 된다. <수리세>는 구례군 용방면 구만리 농민들의 수세현물납부 투쟁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수세는 형식적으로는 농지개량조합이라는 조직에 조합원이 납부하는 조합비였으나 농민들은 이것을 조합비가 아니라 수세(물값)라고 불렀다. 자발적으로 내기 보다는 일제 강점기부터 내던 수리조합에 의한 징세 성격이 강했고, 농민 수탈도구로 받아들였다.

이에 저항하는 농민들의 시위가 벌어졌는데, 홍기선 감독을 중심으로 서울영화집단은 투쟁 현장으로 직접 찾아가 그곳 농민들의 인터뷰와 재현 등을 통해 사건을 재구성한다. 농민들의 승리를 담은 <수리세>는 서울영화집단이 표방한 소형영화운동론을 구체화 시킨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된다.

서울대 알라셩 영화연구회 회장을 역임한 김인수는 "당시 대학 재학 중이었으나 촬영과 편집에 참여했다며 홍기선 감독과 함께 현장에서 농민들과 함께 지내면서 영화를 만들었다"고 회상했다. 김인수는 김정희 등과 함께 영등포 일대 공장 등지를 돌며 <그 여름>을 촬영하기도 했다.

1986년 6월 제작을 진행하기로 하고 8월까지 2개월 동안 제작된 <파랑새>는 홍기선, 이효인, 이정하가 연출한 40분 8mm 극영화로 농촌의 비참한 현실을 묘사했다. 딸의 병원 치료비가 없어서 절망적인 삶을 사는 농민 가족의 모습을 통해 당시 농촌이 현실을 드러낸다. 딸의 병원비를 구하러 다니다가 어쩔 수 없이 사채를 끌어다 쓰고, 병이 재발해 치료도 어렵게 된 현실에서 빚만 잔뜩 지게 되는 빈농의 삶을 그리고 있다. 추수한 쌀 수매가 안 되고 소값도 폭락해 신음하는 빈농의 삶은 1985년 소값 폭락을 담은 것이었다.

해당 작품은 당시 농촌에서 농민운동을 주도하던 가톨릭농민회의 도움을 받아 겨우 촬영할 수 있었다. 당시의 제작과정을 정리한 기록에 따르면 1985년 7월 중순 애초에 결정된 지역에서의 촬영은 현지 사정과 출연 배우의 거부로 무기한 연기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곧바로 가톨릭농민회 전국본부를 통하여 장소를 구하고 배우로 출연할 농민을 물색할 수 있게 되면서 사흘 만에 촬영이 진행됐다.

농사일에 묶인 빈농 배우의 형편 때문에 제작진은 농사일도 도왔다. 하루 8시간 이상의 노동 후 30분 정도씩 짬을 내 8일 만에 촬영을 끝낼 수 있었다. 당시 제작진은 "농민들의 사정 때문에 밤과 일하는 막간을 이용해 완성하다 보니 영화에 대한 총체적 자기평가의 여유가 없었다며 잘못된 점을 알고도 그냥 넘어가는 오류를 범했다"고 평가했다.

제작진은 다만 "<파랑새>의 제작과정이 한국 민중영화의 구체적 방향성과 가능성을 가늠하는 기회였음을 믿는다"며 "농민 형제들의 삶과 투쟁 속에 제작과정이 이뤄지고 농민 형제들 속에서 상영·비판되어지면서, 우리는 생산자와 수용자 간의 체험이란 노정에 들어섰기 때문이다"라고 부연했다.
 

▲ 서울영화집단이 제작한 8mm 단편영화 <파랑새> ⓒ 한국영상자료원


<파랑새>는 홍기선 감독이 연출했는데, '서울영화집단'이 활동을 마무리하고 '서울영상집단'으로 바뀐 1986년, 일명 '파랑새 사건'으로 인해 큰 고초를 겪어야 했다. 당시 군사독재의 탄압과정에서 공연윤리위원회(공륜)의 심의없이 영화를 상영했다는 이유로 홍기선 감독은 구속됐다.

1996년 발간된 책 <변방에서 중심으로> 따르면 발단은 연세대학교 총학생회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부활하는 산하>(8mm)라는 작품이 고려대학교 등 대학가에서 상영되면서였다. 당국은 <부활하는 산하>에 이념 서적인 <계급투쟁사>의 몇 대목이 삽입 인용된 점을 빌미로 삼았다. 그러면서 불법 사상서적이 대중에게 전파되었다는 혐의로 연세대 총학생회에 대해 일제 검거령을 내렸다.

<파랑새>가 20여 차례 농민들에게 상영되자 수사 기관에서는 이를 당시의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일명 민통련) 계열의 농민 선동영화로 보고 예의 주시하다가 서울영상집단이 제작한 <파랑새>도 바로 그와 같은 소위 불온사상을 전파하는 작품으로 간주, 검거령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대공분실의 조사에서 <부활하는 산하>와 '서울영상집단'이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심의없이 상영한 것이 당시 영화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를 들어 홍기선, 이효인을 구속했다. 홍기선과 이효인은 이후 선고유예 2년을 받고 풀려난다. 영화운동에 대한 첫 구속으로, 제도권 밖의 영화관련 활동을 사회주의 이적 집단으로 몰아붙여 소형영화 활동에 일침을 가하고, 나아가서 한국 영화발전에 쐐기를 박고자 한 의도가 역력한 탄압이었다.

남미 영화운동에서 한국영화운동 모델 찾아

'서울영화집단'의 이론적 토대는 남미 영화운동이었다. 라틴아메리카의 영화운동 경향을 소개하는 한편으로 민중영화의 개념을 제시한 것은 서울영화집단이 영화를 통해 추구하고자 했던 지향점이었다. 민중의 삶을 영화로 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에 글을 썼던 장선우는 1985년 계간지 <실천문학>에 기고한 글에서 민중영화의 개념을 이렇게 정의했다.

"민중영화란 민중주체의 예술운동으로서 민중은 누구이며 민중은 무엇인가 그리고 삶의 편에 서 있는가 아니면 삶을 압살하는 자들의 편에 서있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민중의 분열, 대립, 적대감, 환락, 부패를 책동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기 회복을 위한 저항, 각성 통일, 신명을 촉성하는 영화를 말한다.(중략 )

또한 민중영화란 우리의 영화현실의 모순과 비리에 대한 비판적인 대안으로 나온 개념인 동시에 이 땅에서 진행되는 다른 예술매체의 운동적 성과를 반영한 말이기도 하다."

 

▲ 남영동 사무실에 모인 서울영화집단 회원들. 왼쪽 안경 쓴 사람이 박광수(감독), 흰 옷 입은 김인수(전 충남문화산업진흥원장) ⓒ 김인수 제공


서울영화집단이 남미 영화운동에 관심을 두고 영향을 받은 것에 대해 당시 일각에선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는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 꿈의 나라> <파업전야>를 만들며 90년대 영화운동의 중심이었던 '장산곶매'는 80년대 초반의 한국영화운동을 정리한 문건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80년대 초에는 한국 사회를 라틴아메리카 종속이론으로 설명하는 견해가 지배적이었고, 라틴 아메리카의 운동이론이 광범위하게 소개될 때였다. '서울영화집단'이 라틴 아메리카 영화이론에서 한국영화의 모델을 찾은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서울영화집단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정초된 '해방영화론', '제3영화론'을 소개하는 가운데서 자신들의 견해를 덧붙이곤 했는데, 다큐멘터리적 창작방향을 옹호하고 민중지향적인 관점을 강력히 제시했다."


다만 장산곶매는 "서울영화집단이 뚜렷한 이념적 목표를 갖고 영화운동을 새롭게 시작했다는 의의를 갖고 있으나 당시 변혁운동과 분리된 채로 고립돼 있었으며 자신의 이념적 목표를 현실화시키지는 못하였다"고 지적했다.

<파랑새>를 공동연출했고 서울영화집단과 민족영화연구소에서 활동했던 이정하(전 영화평론가)는 1991년 연세대학교 교지 <연세>에 실린 '민족영화운동의 발전을 위해'라는 글에서 "80년대 영화운동의 시발점으로 평가되는 서울영화집단은 영화를 수용하는 입장이나 실천적인 활동의 형태 등에 있어서 70년대 후반에 영화서클 소모임과는 차별적인 질적 전환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며 "서울영화집단은 이후 많은 대학영화집단이 등장하는 직접적 토대가 되었으며 한국영화문화에 민족 민중적 씨앗을 뿌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서울영화집단 마감하고 서울영상집단으로
  

▲ 영상집단 창간호 ⓒ 성하훈


서울영화집단은 초기 회원이었던 김홍준, 박광수 등이 83년 미국과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이후 홍기선 감독 중심으로 운영된다. 이에 대해 김동빈은 "홍기선 감독은 군대에 갔다 온 후 서울영화집단에서 집단생활을 했다"며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 책을 출판할 때가 전성기였다"고 말했다. "이후 초기 원들도 별로 없었기에 홍기선 감독 위주로 운영이 됐다"고 설명했다.

또한 "대부분은 미래의 상업영화를 염두에 두고 각자 준비하고 있었지만 홍기선 감독은 집단에 남아 단편영화 작업을 했기에 노선(?)의 차이도 느꼈다"면서, "가끔 술 먹으러 들르는 공간이되었고, 당시 회사에 다니고 있었기에 홍기선 감독이 가끔 작업비가 부족하면 찾아오곤 했다"고 회상했다.

서울영화집단은 1986년까지 이어지다가 홍기선 감독 등이 서울영상집단을 만들면서 활동을 끝내게 된다. 김동빈은 "당시 홍기선 감독이 이효인 등의 친구들과 작업을 하면서 '서울영화집단'이란 이름을 쓰는 게 부담이 된다고 했다"며 이후 "'서울영상집단'을 만들게 됐고, 서울영화집단은 책 한 권과 몇 편의 단편영화를 남기고  5~6년의 활동을 마감하게 됐다"고 말했다.

1986년 10월 18일 창립한 서울영상집단은 민중영화에 대한 방향성을 강조한 영화운동 단체였다. 이들은 창립선언문에서 당시 농가부채 및 수입 농산물 문제, 빈부격차의 심화에 따른 국민 생활의 빈곤을 거론하며, 문제의 원인을 "외자에 의존하고 있는 경제구조의 파생성과 독점자본과 결탁한 군부세력, 그 하수인 역할을 하는 정치 세력 등 반민족적, 반민주적, 반민중적 집단"으로 지목했다.

이어 "끊임없는 민중성의 획득과 그에 따른 예술형식으로서의 민중형식에 대한 개발 및 보급이 착실하게 이뤄져야 할 것"이라면서, "이것은 결국 현실적으로 인텔리에 주도되고 있는 현단계 문화운동이 범할 수 있는 오류를 최소화해 줄 것이며, 이 땅에 널려있는 반민족적, 반민중적, 반민주적 요소들의 척결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영화운동 역시 같은 관점에서 진행돼야 한다"며 "민중연대 속의 끊임없는 제작 및 베급의 과정은 그 자체가 주요한 진보적 형태의 예술생산 과정이 될 것이고, 동시에 구성원들의 양심적이며 진보적인 활동은 주요한 실천과정으로서 보편적인 민중정서의 획득과 그를 통한 민중영화의 완성 및 이 땅의 문제 해결에 적극적인 역할을 해 줄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영상집단은 80년대 이후 8mm 영화를 중심으로 한 영화운동에 대해서도 "민중형식의 부재를 여실히 드러낸 소형영화, 제반 현실에 대하여 문외한 적이라고 할만한 각종 영상자료, 고립적이며 분산적이고 배타적이었던 각 영화팀 상호 간의 관계, 이 모든 것이 우리 영화운동의 한계를 노정시켰던 요인들"이라고 반성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서울영상집단은 <파랑새 사건>의 영향으로 1년 정도의 짧은 활동을 마치고 노선 차이로 인한 문제로 재편된다. 책 <변방으로 중심으로>에 따르면 영화운동에 대한 입장 차이와 내부 문제로 1987년 초 조직이 분리된다. 일부는 민족영화연구소를 설립했고, 남은 회원들은 당시 대표적인 문예운동단체인 '민중문화운동연합'의 산하로 들어가게 된다.

이후 1989년 민중문화운동연합을 탈퇴한 후 노동운동과의 연계를 모색하며 다른 단체들과 연대해 '노동자뉴스제작단'을 결성했다. 그러다가 1989년말 노동자뉴스제작단의 활동에 대한 평가과정에서 창작관점에서 차이를 보여 1990년 홍형숙(다큐멘터리 감독), 남인영(부산 동서대 교수) 등이 중심이 돼 '서울영상집단'이라는 이름을 다시 사용하며 분리 독립한다.

1980년대 중반부터 독립영화운동에 참여해 홍기선 감독 등과 함께 활동했고 현재 독립영화워크숍을 이끌고 있는 낭희섭은 "서울영상집단은 홍기선 감독과 이효인이 영화법 위반으로 구속된 '파랑새 사건'으로 타격을 입은 영향이 컸다"면서 "이후 민중문화운동연합 안으로 들어갔다가 노동자뉴스제작단을 거쳐 다시 분리돼 나온 서울영상집단은 서울영화집단의 연장선이기 보다는 새로운 영화조직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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