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피다'에 피범벅 그림.. 문해력, 공교육이 책임져야
[TV 리뷰] EBS <다큐 프라임> '다시 학교, 10부 교과서를 읽지 못하는 아이들'
EBS는 지난 2010년 <학교란 무엇인가?> 시리즈를 통해 학교 교육의 방향을 모색한 바 있다. 그로부터 10년, 2020년 오늘날 학교 현장에서는 어떤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7차 교육 과정, 시험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수행 평가가 대신하고 교사에 의한 하달식 교육 대신 활동 중심프로젝트가 대신한 우리의 교육 현장에서 아이들은 바람직한 교육을 받고 있는가? 그 질문으로부터 <다시 학교> 10부작을 마련하였다.
그 이전의 기능주의적 지식 주입식 교육을 비판하며 그 자리를 대신한 새로운 교육 과정은 안타깝게도 '학력 저하', '학력 격차', '사교육비 사상 최대'의 결과를 낳았다. '지식보다는 역량이 중요하다', '학생 주도 수업'이 '강의식 수업'을 대신해야 한다는 최근의 학교 교육 담론, 그렇게 활동 중심의 프로젝트 수업 과정에서 교사의 자리는 점점 더 사라지며 스스로 '구태'라 여기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고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공부를 학원에 가서 하는 것이라 여기는 세태, 그래서 학교는 '잠자는 교실'이 되어버린 상황, 무엇이 문제일까?
다큐는 가르치지 않는 학교, 교사의 고백, 시험을 시험하다, 최고의 수업, 창의성의 발견, 학생다움을 묻는 어른에게, 수학이 불안한 아이들, 잠자는 교실, 학교는 동사다 등 총 10부의 다큐를 를 통해 현재의 학교 교육을 점검해 본다. 그 중에서도 10부 교과서를 읽지 못하는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는데 글을 읽지 못하는 현실을 냉정하게 드러낸다.
문해맹의 학교
세종 대왕이 창제하신 '쉬운 한글' 덕분에 우리나라 사람 중 한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는 사람은 전체 성인 인구의 7.2%인 311만 명 정도이다(국가 평생 교육 진흥원, 성인 문해 교육 현황). 하지만 한글만 읽고 쓰면 다일까? 전체 성인 가운데 22%에 달하는 960만 명이 한글을 읽고 쓸 수는 있지만 복잡한 내용의 정보는 이해하지 못하는 실질적 문맹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실질적 문맹이란 무엇일까? 가장 이해하기 쉽게는 의약품 복용량 설명서나, 각종 서비스 약관 등 공공, 경제 생활에 필요한 문서를 활용하는 데 미흡한 상태를 말한다. 여기서 바로 등장하는게 '문해력'이다. 즉, 말 그대로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다.
학생들이 이런 질문을 하면 어떨까?
교과서 내용 중 등장한 '머리에 서리가 내린다'에 여름인데 어떻게 서리가 내려요? 라거나, '얼굴이 피다'라는 문장을 설명하라니 피범벅된 얼굴을 그려 놓는다면? 과연 문장을 이렇게 이해하는 학생들이 수업을 따라갈 수 있을까? 국어 수업만이 아니다.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유추하여 해석할 수 없는 학생들이 하물며 사회, 역사, 과학 교과서를 혼자 읽을 수 있을까?
청주에 있는 분평초등학교 2학년 지윤이에게 받아쓰기는 가장 두려운 시간이다. 책읽기는 로봇처럼 한 자 한 자 읽어서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되곤 한다. 글자를 제대로 못읽으니 당연히 수업은 못따라간다. 그러니 '공부가 재미없다'.
지윤이만의 문제일까? 초등학교 학생의 11%가 이렇게 지윤이처럼 기초적인 문해력의 수준에 못 미친다. 아이들의 문해력을 조사해 보면 개별적인 특성과 경험의 차이에 따라 3세에서 8세까지의 수준 차이가 난다. 당연히 3세 수준의 아이들은 심각한 읽기 부진을 보이고 이는 학습 부진으로 이어진다.
초등학교 만의 문제일까? 읽기 진단 검사를 마친 중학교 교실, 낱말 뜻을 모르는 아이들이 많았다. '고지식'을 높은 지식이라 생각하고, '대관절'을 큰 절이라 생각한다면? 당연히 단어 의미를 바탕으로 한 추론이 불가능하다. 교과서를 이해할 수 없고, 학습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중학교 2학년인 의담이는 학원 수업마저 제대로 따라가지 못해 엄마랑 함께 공부를 한다. 하지만 문장 하나, 문제 하나도 이해하지 못해 새벽 한 두시까지 공부해도 교과서 한 두 장 정도를 소화할 수 있다. 이러니 다른 과목 성적을 기대할 수 없다.
문제는 이렇게 문해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이 점점 더 늘고 있는 현실이다. 활동 중심, 학습지 중심의 수업 형태에서 아이들은 얼마든지 글을 읽지 않아도 한 학년을 지나갈 수 있다. 글을 못읽으니 학습에 대한 동기 부여는 애초에 무리다. 잠재력을 가진 아이들이 방치되는 현실이다.
왜 아이들은 글에 집중하지 못할까? 글을 읽는 아이들의 시선을 조사해 보니 아이들의 시선은 글이 아닌 부수적 정보나 지문 외의 공간에 머물러 있다. 거의 책을 읽지 않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는 훈련 자체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거기에 더 재밌는 컴퓨터 게임, 스마트폰이 있으니 더더욱 아이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게다가 컴퓨터 게임이나 스마트폰의 읽는 메뉴얼은 책과 다른 방식이기에 아이들에게 책은 낯설다.
공교육이 해야 할 몫: 문해력
그렇다면 이렇게 문해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에 대한 책임은 어디에 있을까? 개별적인 차이이니까 각자 개인과 가정의 책임일까? 다큐는 바로 여기서 '공교육'의 위상을 불러온다. 말 그대로 공공의 교육을 책임지는 학교가 그 몫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고 나아가 국가의 책무라는 것이다.
뉴질랜드의 트리모아나 초등학교 뉴질랜드 원주민을 비롯한 다양한 민족의 이민자들이 모인 이 학교의 학생들이 언어 발달에 격차가 큰 건 당연한 결과다. 이에 뉴질랜드에서는 공교육의 책무로 국가가 나서서 '리딩 리커버리(reading recovery) 수업'을 진행한다.
국가가 지원하는 리링 리커버리 수업에서는 읽기가 부진한 학생들을 상대로 매일 30분씩 1년간 1:1로 전문적인 교육을 수행한다. 특히나 전문간들은 만6세 정도, 초등학교 2학년 이전의, 학습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생기기 전의, '조기 개입'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다시 청주의 분평 초등학교, 매일 바쁜 업무에도 불구하고 방과 후에 지윤이와 함께 읽기 공부를 해주신 선생님, 덕분에 지윤이는 이제 친구에게 자신만만하게 '받아쓰기 하나 틀렸어, 안타까워'라며 자랑 아닌 자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한 계절만의 변화이다.
'얼굴이 피다'를, 얼굴에 피범벅을 해놓던 의담이를 비롯한 동산중학교 중학생들, 역시 문해력 캠프를 마쳤다. 왜 모르는 걸 질문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질문도 아는 게 있어야 하지 않느냐던, 포기를 먼저 말하던 아이들은 이제 친구들과 당당하게 답안지를 맞추는 수준에 이르렀다.
겨우 몇 달의 수업이 아이들의 문해력을 변화시켰다. 그저 문해력만이 아니다. '노력을 안 해서 죄송해요'라며 한없이 수그러들던 아이가 웃음을 되찾았다. 친구들 사이에서 어깨가 펴졌다. 학원이 아니다. 그저 학교에서 조금 더 신경을 쓰니 달라진 것이다. 다큐는 말한다. 바로 이것이 '공교육'의 자리가 아니겠냐고. 가장 기본을 책임지는 곳, 그곳이 바로 교육의 자리라고 '다시 학교'는 말한다.
그 이전의 기능주의적 지식 주입식 교육을 비판하며 그 자리를 대신한 새로운 교육 과정은 안타깝게도 '학력 저하', '학력 격차', '사교육비 사상 최대'의 결과를 낳았다. '지식보다는 역량이 중요하다', '학생 주도 수업'이 '강의식 수업'을 대신해야 한다는 최근의 학교 교육 담론, 그렇게 활동 중심의 프로젝트 수업 과정에서 교사의 자리는 점점 더 사라지며 스스로 '구태'라 여기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고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공부를 학원에 가서 하는 것이라 여기는 세태, 그래서 학교는 '잠자는 교실'이 되어버린 상황, 무엇이 문제일까?
▲ <ebs 다큐 프라임 - 다시 학교, 10부 교과서를 읽지 못하는 아이들> ⓒ ebs
문해맹의 학교
세종 대왕이 창제하신 '쉬운 한글' 덕분에 우리나라 사람 중 한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는 사람은 전체 성인 인구의 7.2%인 311만 명 정도이다(국가 평생 교육 진흥원, 성인 문해 교육 현황). 하지만 한글만 읽고 쓰면 다일까? 전체 성인 가운데 22%에 달하는 960만 명이 한글을 읽고 쓸 수는 있지만 복잡한 내용의 정보는 이해하지 못하는 실질적 문맹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실질적 문맹이란 무엇일까? 가장 이해하기 쉽게는 의약품 복용량 설명서나, 각종 서비스 약관 등 공공, 경제 생활에 필요한 문서를 활용하는 데 미흡한 상태를 말한다. 여기서 바로 등장하는게 '문해력'이다. 즉, 말 그대로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다.
학생들이 이런 질문을 하면 어떨까?
교과서 내용 중 등장한 '머리에 서리가 내린다'에 여름인데 어떻게 서리가 내려요? 라거나, '얼굴이 피다'라는 문장을 설명하라니 피범벅된 얼굴을 그려 놓는다면? 과연 문장을 이렇게 이해하는 학생들이 수업을 따라갈 수 있을까? 국어 수업만이 아니다.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유추하여 해석할 수 없는 학생들이 하물며 사회, 역사, 과학 교과서를 혼자 읽을 수 있을까?
청주에 있는 분평초등학교 2학년 지윤이에게 받아쓰기는 가장 두려운 시간이다. 책읽기는 로봇처럼 한 자 한 자 읽어서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되곤 한다. 글자를 제대로 못읽으니 당연히 수업은 못따라간다. 그러니 '공부가 재미없다'.
▲ <ebs 다큐 프라임 - 다시 학교, 10부 교과서를 읽지 못하는 아이들> ⓒ ebs
지윤이만의 문제일까? 초등학교 학생의 11%가 이렇게 지윤이처럼 기초적인 문해력의 수준에 못 미친다. 아이들의 문해력을 조사해 보면 개별적인 특성과 경험의 차이에 따라 3세에서 8세까지의 수준 차이가 난다. 당연히 3세 수준의 아이들은 심각한 읽기 부진을 보이고 이는 학습 부진으로 이어진다.
초등학교 만의 문제일까? 읽기 진단 검사를 마친 중학교 교실, 낱말 뜻을 모르는 아이들이 많았다. '고지식'을 높은 지식이라 생각하고, '대관절'을 큰 절이라 생각한다면? 당연히 단어 의미를 바탕으로 한 추론이 불가능하다. 교과서를 이해할 수 없고, 학습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중학교 2학년인 의담이는 학원 수업마저 제대로 따라가지 못해 엄마랑 함께 공부를 한다. 하지만 문장 하나, 문제 하나도 이해하지 못해 새벽 한 두시까지 공부해도 교과서 한 두 장 정도를 소화할 수 있다. 이러니 다른 과목 성적을 기대할 수 없다.
▲ 국제 학업 성취도 평가 ⓒ 눈높이
문제는 이렇게 문해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이 점점 더 늘고 있는 현실이다. 활동 중심, 학습지 중심의 수업 형태에서 아이들은 얼마든지 글을 읽지 않아도 한 학년을 지나갈 수 있다. 글을 못읽으니 학습에 대한 동기 부여는 애초에 무리다. 잠재력을 가진 아이들이 방치되는 현실이다.
왜 아이들은 글에 집중하지 못할까? 글을 읽는 아이들의 시선을 조사해 보니 아이들의 시선은 글이 아닌 부수적 정보나 지문 외의 공간에 머물러 있다. 거의 책을 읽지 않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는 훈련 자체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거기에 더 재밌는 컴퓨터 게임, 스마트폰이 있으니 더더욱 아이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게다가 컴퓨터 게임이나 스마트폰의 읽는 메뉴얼은 책과 다른 방식이기에 아이들에게 책은 낯설다.
▲ <ebs 다큐 프라임 - 다시 학교, 10부 교과서를 읽지 못하는 아이들> ⓒ ebs
공교육이 해야 할 몫: 문해력
그렇다면 이렇게 문해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에 대한 책임은 어디에 있을까? 개별적인 차이이니까 각자 개인과 가정의 책임일까? 다큐는 바로 여기서 '공교육'의 위상을 불러온다. 말 그대로 공공의 교육을 책임지는 학교가 그 몫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고 나아가 국가의 책무라는 것이다.
뉴질랜드의 트리모아나 초등학교 뉴질랜드 원주민을 비롯한 다양한 민족의 이민자들이 모인 이 학교의 학생들이 언어 발달에 격차가 큰 건 당연한 결과다. 이에 뉴질랜드에서는 공교육의 책무로 국가가 나서서 '리딩 리커버리(reading recovery) 수업'을 진행한다.
국가가 지원하는 리링 리커버리 수업에서는 읽기가 부진한 학생들을 상대로 매일 30분씩 1년간 1:1로 전문적인 교육을 수행한다. 특히나 전문간들은 만6세 정도, 초등학교 2학년 이전의, 학습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생기기 전의, '조기 개입'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다시 청주의 분평 초등학교, 매일 바쁜 업무에도 불구하고 방과 후에 지윤이와 함께 읽기 공부를 해주신 선생님, 덕분에 지윤이는 이제 친구에게 자신만만하게 '받아쓰기 하나 틀렸어, 안타까워'라며 자랑 아닌 자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한 계절만의 변화이다.
'얼굴이 피다'를, 얼굴에 피범벅을 해놓던 의담이를 비롯한 동산중학교 중학생들, 역시 문해력 캠프를 마쳤다. 왜 모르는 걸 질문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질문도 아는 게 있어야 하지 않느냐던, 포기를 먼저 말하던 아이들은 이제 친구들과 당당하게 답안지를 맞추는 수준에 이르렀다.
겨우 몇 달의 수업이 아이들의 문해력을 변화시켰다. 그저 문해력만이 아니다. '노력을 안 해서 죄송해요'라며 한없이 수그러들던 아이가 웃음을 되찾았다. 친구들 사이에서 어깨가 펴졌다. 학원이 아니다. 그저 학교에서 조금 더 신경을 쓰니 달라진 것이다. 다큐는 말한다. 바로 이것이 '공교육'의 자리가 아니겠냐고. 가장 기본을 책임지는 곳, 그곳이 바로 교육의 자리라고 '다시 학교'는 말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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