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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일은 '정규직'이 하는 게 맞다

[똑경제-황세원 LAB2050 연구실장] 영화 <기생충>과 비정규직 문제

등록|2020.02.12 12:38 수정|2020.02.12 12:38

▲ 영화 <기생충>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정부가 '노동 존중'과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내세우고 이런 저런 시도를 해 오고 있는데도 왜 우리는 노동과 관련해서 의미 있는 변화가 있다고 느끼지 못 할까. 이런 주제로 글을 쓰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 4관왕 소식이 들려왔다. 숟가락을 얹을 수밖에 없다.

<기생충>이 세계를 매료시킨 메시지의 핵심은 '차별'의 일상화다. 돈의 있고 없음, 사회적 지위가 있고 없음은 어느새 우리 몸에서 나는 '냄새'까지 달라지게 했다. 그렇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이 격차를 뛰어넘을 수 없는 게 아닌가. 그 공포가 비극을 낳고, 비극은 다시 격차로 이어진다.

나쁜 일자리를 만드는 핵심도 차별이다. 사회 문제로 주로 다뤄지는 것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근로 조건 차이와 같은 직장 밖 차별이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직장 안에서의 차별이다. 일 하는 우리의 하루하루, 일상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직장 내 차별이 일자리 문제의 핵심

지금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이라면 다 같이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 팀에 일손이 부족해서 한 명의 직원을 뽑기로 했을 때, 인사팀에서 이렇게 물어온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정규직으로 뽑을까요, 비정규직으로 뽑을까요?"

만일 '정규직으로 뽑기에는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닌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그렇게 뽑은 사람을 차별할 준비가 돼 있는 것이다. 너무 심한 말이라고 억울해 하기 전에 그동안 젖어 있었던 고정관념부터 되짚어 보자.

정규직 직원들과 같은 시간에 출퇴근하고,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하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더라도 계속 고용하지는 않을 사람, 정규직 직원들이 하기에는 하찮고, 귀찮아 보이는 일을 몰아줘도 괜찮은 사람을 뽑고 싶은 것이 아닌가? 설사 정규직 지원들보다 '덜 좋은 대학'을 나왔다 하더라도, 혹은 경력이 모자라거나 나이가 어리다고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일을 시켜서는 안 된다. 그것은 차별이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은 상대적으로 중요한 일, 덜 중요한 일을 구분해서 시키라고 만들어진 직군이 아니다. 그렇게 정해진 바가 어디에도 없는데 한국 사회에서 유독 그렇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보통 '비정규직'에게 돌아가던 일을 누구에게 어떻게 시키라는 것인가? 아웃소싱을 하라는 것인가? 그럴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아웃소싱의 목적이 외부 업체에서 일하는 사람을 싼 가격에 편하게 쓰려는 것이라면 그 역시 차별이다.

외부 업체에서 파견 나와서 특정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은 그 나름대로의 전문성과 숙련도가 있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정규직으로, 혹은 직접 고용으로 일을 시키기에는 조건이 모자라서, 또는 너무 하찮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파견을 받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차별이기 때문이다.
 

▲ 한 대형할인마트 비정규직 직원들의 투쟁을 그린 영화<카트>. ⓒ 명필름


정규직이란 것은 신분인가

아웃소싱을 하지 않는 경우, 그 하찮고 귀찮은 일을 사내에서 누군가가 꼭 하긴 해야 한다면? 그렇다면 정규직 직원들이 나눠서 하는 것이 맞다. "이 무슨 천지개벽할 말인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고정관념 역시 되짚어 봐야 한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정규직'이라는 것은 신분인가? 설사 좋은 학력과 스펙, 높은 입사 경쟁률을 뚫은 실력까지 있다고 하더라도 정규직이 된 순간 신분이 높아져서 다른 사람을 차별할 자격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직장에 안정적으로 오래 다닐 수 있게 됐다는 것뿐이다.

오래 다닐 사람이기 때문에 기업 입장에서는 더 편한 사람, 세세한 부분까지 소통이 가능한 사람으로 여길 수도 있다. 정규직 직원 입장에서도 오래 다닐 것이기 때문에 더 애사심을 가질 수 있다. 회사에서 꼭 필요로 하는 일이라면 동료들을 위해 희생하는 자세로 자청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하찮고 귀찮은 일이 생겼다면 정규직이 하는 것이 맞다.

그렇다면 비정규직은 어떤 경우에 채용하라는 말인가? 답은 이렇다. 지속 고용을 할 수 없는 업무에 특화된 사람이 필요할 때만 채용해야 한다. 예를 들면 이런 상황이다.

영미권 기업들을 주로 상대하는 무역회사가 있다고 하자. 대부분 직원들은 영어에 능통하다. 그런데 물건을 사고파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스페인 문화권에 팔 수밖에 없는 물건을 떠맡았다. 이 물건을 제 값에 다 팔아야만 회사는 적자를 면할 수 있다. 그런데 당장 사내에 스페인어 능통자가 없다. 그렇다고 그 인력을 정식 채용할 수는 없다. 그 물건을 다 파는 데 1년 정도밖에 걸리지 않을 것이고, 그 이후에는 스페인어권과 무역을 할 계획이 없기 때문이다.

면접을 거쳐서 스페인 유학을 준비 중인 사람이 1년 계약직으로 채용됐다. 그가 첫 출근을 했을 때 직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스페인어 어디서 배우셨어요?", "스페인 어디로 유학갈 예정이신가요? 저도 언젠가 여행가 보고 싶은데, 부럽네요." 등등 관심을 표하며 예우할 것이다. 그리고 본래 예정돼 있던 스페인어 관련 업무만 하도록 안내할 것이다.

누구도 그 사람에게 "계약직이시죠? 오늘부터 저희 사무실 난 화분에 물 주시고요. 이런저런 잡일들 눈치껏 도맡이 하시면 됩니다"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이 1년 후 관련 업무를 마치고 퇴사할 때, "계약이 연장될 줄 알았는데 억울하다"고 할까? 처음부터 계약 연장에 대해 회사도, 당사자도 기대가 없었는데 그럴 리가 없다. "언젠가 스페인 가면 놀러가도 되죠?", "그럼요." 하는 얘기를 나누며 동료들과 기분 좋게 헤어질 것이다.

'엘리트'의 특권은 '편하게 일 하는' 특권?

이제 다시 되짚어 보자. 한국 사회의 여러 직장들마다 생기는 계약직 채용에서의 잡음은 무엇 때문인가? 직군에 따라, 채용 형태에 따라 사람을 '차별'할 수 있다는 인식과 관행 때문이다. 말로만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할 뿐, 우리는 특정한 경로로 '자격'을 얻은 사람은 신분이 높고, 그렇지 못 한 사람은 신분이 낮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정규직이 하기에는 덜 중요하고 하찮은 일에 비정규직을 쓴다"는 그 관행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왜 우리 사회에는 그런 관행, 인식이 생겨났을까? 가부장적인 문화, 남존여비 사상, 연공서열을 중시하는 문화 등의 영향이 있겠지만 그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엘리트'에 대한 인식이다.

<20대 80의 사회>의 저자 리처드 리브스가 명문대 학력에 부여되는 '자격'이 불평등을 강화하고, 격차를 강화하는 핵심이라고 지적한 것을 보면 이는 분명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 어디보다 한국에서 강력하게 작동하는 것도 사실이다. 조선시대 과거제도의 영향이 더 큰지, 경성제국대학 출신만 제한적으로 고위직에 진입할 수 있었던 일제 강점기 영향이 더 큰지는 몰라도 한국 사회에서는 '공부를 잘 해서 명문대를 나온 사람이라면 사회적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인식이 유독 강하다.

문제는 그 특권이란 것이 '더 중요한 위치에서 열정적으로 일 해서 성취를 누리고 사회에 기여할 특권'이라기보다는 '꼭 중요한 일을 하지 않더라도 승진 기회와 정년을 보장 받으면서 편하게 지낼 수 있고 휘하의 직원들이 노력한 결과를 자기 공로로 삼아도 되는 특권'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 기업들, 그리고 정부 기관들조차도 '승진 기회가 보장된 엘리트 직군'을 따로 뽑아 왔다.

경제가 성장하던 시절에는 그 외의 직군 사원들에게도 일정한 시험 등 절차를 거치면 승진하거나 직군을 전환할 기회가 좁게나마 열려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엘리트 직군으로 입사한 사람들보다는 한참 늦게 뒤따라가야 했지만, 직원들 스스로도 '나는 명문대를 나오지는 못 했으니까'라고 자조하면서, 그 정도 기회라도 감지덕지 했다.

그런데 저성장이 '뉴 노멀'이 되면서 몇 가지가 달라졌다. '엘리트 직군'에 부여되는 보장과 특혜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반면 비정규직으로 입사한 사람이 정규직으로 전환되거나 승진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 이제 한 직장 내에서 비정규직은 어떻게 해도 계속 비정규직이다. 마치 전근대 사회에서 신분을 바꿀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 조직에서 혹시나 하고 성실하게 일 하는 것보다는 오래 걸리더라도 '9급 공무원'과 같은 자격을 획득하는 것이 훨씬 낫다. 차별받지 않는 직군이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 한국마사회 고 문중원 기수 아내 오은주씨가 오체투지를 하며 남편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 이희훈


'정규직'이라는 신분제를 깨트려야 한다

차별을 방치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차별 앞에서 무기력함을 느낀 개인들은 살아갈 의지를 잃기도 한다. 최근 들려온, 직장에서의 차별 때문에 세상을 떠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자.

CJB청주방송에서 (심지어 비정규직도 아니고) 프리랜서 PD로 14년간 일 하던 고 이재학 PD는 임금 인상 문제로 관리자와 갈등을 빚던 중 목숨을 끊었다. PD라는 직군이 하는 업무는 정규직 공채 출신이나 프리랜서나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규직 공채로 입사한 PD는 높은 연봉을 받고, 정년을 보장받고, 승진해서 국장이 되고 임원이 되는데, 공채를 거치지 않은 프리랜서 PD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소폭이나마 임금을 높여갈 수 있는 방법도, 자기 의견을 말할 권리조차 전혀 없었다. 이것이 신분에 따른 차별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고 문중원 기수의 경우도 비슷하다. 경마 산업의 꽃은 기수라고 하는데 그는 한국마사회의 공고한 피라미드 구조 속에서 아무 권한도 없고 권리도 없이 일 해야 했다. 기수라는 직군을 떠나 '조교사' 자격을 얻어서라도 길을 찾아보려다가 좌절하고 생을 마감한 그를 생각하면 이 사회가 잘못됐다는 확신이 더욱 강해진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한국마사회는 대졸자들이 선망하는 직장이다. 높은 연봉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단 들어가면 큰 어려움 없이 편하게 다닐 수 있는 직장이라는 평가의 영향이 크다. 그렇기 때문에 학력과 스펙이 최고 수준이어야 공채로 입사할 수 있다고 한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그 직원 및 임원들의 권한이 그렇게까지 절대적이어야 하는 이유는 대체 어디에 있을까? 기수도 나름대로의 자격을 갖춰야만 선발되는데, 그 자격은 왜 명문대 출신 '엘리트' 공채 자격에 비교하면 그렇게도 보잘것 없었을까? 이것이 신분에 따른 차별이 아니면 무엇이라는 말인가?

법과 제도와 정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생각이다. 사람들이 '정규직'을 신분으로 여기고 매일의 일상을 그 생각에 따라 행동하는데 '노동 존중'이 가능할리 없다. 정부가 나서서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한다는데 대해서 "자격 없는 사람을 정규직 시켜 주는 건 불공정하다"는 불만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따라서,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정규직'이라는 신분제를 깨트리는 것이다. 그 생각에 젖어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되돌아보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일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모두를 위해서도 좋다. 정부도 기업도 그렇게 원하는 경쟁력, 혁신 동력 등은 차별 없이 각자 능력을 발휘하게 해 줄 때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제 한번 탁 터놓고 얘기해 보자. 공부 잘 하고 시험 잘 보고 입사해 승진을 보장 받은 엘리트들이 기업의 경쟁력에 얼만큼 기여하고 있나? 그런 구분 없이, 필요한 업무를 가장 잘 할 사람에게 적정한 보상을 해 주고, 성취감과 소속감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 기업에도 더 이익이지 않겠는가?

모두 각 분야의 능력자였지만 이미 벌어진 격차의 벽을 넘을 수 없었던 영화 <기생충>의 반지하 가족들, 세계가 제각기 "우리 이야기" 같다고 한다지만 그들의 메시지가 가장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한국 사회인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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