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캐나다 1년 살기, 딱 하나 아쉬운 점
[30대에 알았다면 좋았을 것들] 한번쯤은 나를 위해 낭비할 용기
사십 대에 접어드니 지나온 시간이 이제야 제대로 보입니다. 서른과 마흔 사이에서 방황하던 삼십 대의 나에게 들려주고픈, 지나갔지만 늦진 않은 후회입니다.[기자말]
사실 나는 그런 말들이 아니어도 모범적 생활 태도에 지나칠 정도로 충실한 사람이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성실함이었던 만큼, 학창 시절에는 결석은커녕 지각을 한 기억도 없고, 회사 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선을 넘지 않는 성실함의 목표는 '남들처럼 사는 것'이었다.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평범하게 사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그래서 때가 되면 결혼할 줄 알았고, 취직할 줄 알았고, 승진할 줄 알았고, 아이를 낳을 줄 알았다. 그러나 내 계획대로, 뜻대로 된 게 거의 없었다. 남들 사는 대로 대세의 흐름대로 살려 했지만 어느 한구석은 일탈해 있었다.
게다가 모범생처럼 성실하게 달려오기만 한 삶이 어느 지점에 이르자 삐걱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오전 7시 30분 출근, 오후 10시까지 야근하는 날이 한 달에 절반 정도. 그렇게 몇 년을 지내다 보니 나는 지칠 대로 지치고 망가져 있었다. 내가 자초한 고장이었다.
마음속에선 공허함이, 육체에서는 그만 쉬라는 아우성이 폭발한 다음에야 모든 걸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내가 용쓰지 않으면 '아무나'가 될까 봐 혹은 '대세'의 흐름에서 누락될까 봐 낼 수 없었던 용기 말이다.
퇴사 후 캐나다 빅토리아로
사표를 내기로 하면서 무엇을 할지 생각해봤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게 있었다. 바로 어렸을 때부터의 꿈인 외국에 나가서 살아보기. 내가 외국 유학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고, 당시만 해도 해외연수가 활발하던 때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우리 집 형편에 어학연수라도 떠날 수는 없었던 터라 그저 아득한 장래 희망으로만 여기던 꿈이었다.
누군가는 허영심이라고 따가운 충고를 하기도 하고, 그런 인생 낭비를 왜 하냐고도 하고, 생산성 없는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하기도 했다. 제일 많이 들은 말은 '갔다 와서 뭐 하려고 하냐'는 걱정이었다.
평소 팔랑귀임에도 불구하고 그때는 그저 내가 벌어놓은 돈으로 한번쯤은 나를 위해 탕진해 보고 싶었다. 그동안 명품백이나 옷 등 신상품 같은 것과 무관하게 살아왔고, 시계추처럼 딴 길로 새지 않고 열심히 산 대가로 한번쯤은 나에게 진탕 써보고 싶었다.
결정적으로 당시 난 책임져야 할 가족이 없었다. 결혼하면 더 못 갈 테고, 재취업하면 더 못 갈 테니 '지금이 아니면 영영 할 수 없을지도 몰라' 하는 생각이 들자 용기가 났다. 무책임하거나 나쁜 일만 아니라면 한번쯤은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낭비를 해보는 것도 괜찮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셈이다.
그해 겨울, 나는 캐나다 빅토리아로 떠났다. 별 준비도 없이 그저 어학연수로 홈스테이만 정하고 떠났다. 빅토리아로 정한 이유는 딱 두 가지였다. 캐나다에서 제일 따뜻한 곳, 그리고 노인들이 많은 휴양지 같은 곳이라는 말에 더 생각하지 않고 결정했다.
▲ 퇴사 후, 나는 캐나다 빅토리아로 떠났다. ⓒ unsplash
그때의 나는 도시의 세련됨이나 속도보다는 느린 편안함이 본능적으로 더 이끌렸다. 가서 보니 실제로도 그랬다. 어느 곳에서든 사람(특히 노약자)을 우선으로 기다려주는 느긋함, 건물의 문을 열고 들어갈 때도 뒷사람을 배려해 주는 에티켓, 팔순의 할아버지가 버스에 오르기 전 "레이디 퍼스트"라며 나에게 먼저 타라며 양보해 주는 매너 등.
아무도 떠밀지 않는 그곳의 기분 좋은 한가함과 몸에 밴 배려, 사람이 먼저인 친절한 사회 시스템에 나는 몇 번이나 눈물을 쏟았다. 지금은 우리나라도 많이 바뀌었지만, 당시엔 내가 그동안 얼마나 속도에 치어 살았는지, 그러면서 얼마나 내 속에 독이 차 있었는지 울면서 깨달았다.
나를 위해 또 한번 거하게 낭비할 날을 기대하며
한쪽 청력을 잃을 만큼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나는 그곳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백수로 온전히 1년을 보내며 그 어느 때보다 많이 웃었고, 자연을 보며 많이 걸었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 꿈같은 시간이었다.
그곳에선 내가 과장님도 팀장님도 아닌, 그저 나였다. 한국에 있을 땐 명함이 너무나 소중해서 그것을 잃어버리면 내 존재가 무너질 것 같았는데, 아무것도 아닌 채로 산다는 게 얼마나 자유롭고 가벼운 일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물론 덕분에 그동안 벌어놓은 돈을 탕진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도 내 인생에서 가장 현명한 낭비였고, 한 점 후회 없는 낭비다.
그저 의미 없이 아무것도 남는 거 없는 '돈지랄'한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유형의 것만 보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과연 눈에 보이는 것만이 남는 것일까.
그곳에서 보낸 시간은 지금도 종종 들여다보는 아름다운 추억이다. 아마 죽을 때까지 갖고 갈 행복한 기억일 것이다. 내가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꼽을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건 돈만큼이나 소중한 자산이다. 그런 기억이 지금도 나를 행복하게 하고, 죽을 때에도 가져갈 수 있는 것이므로.
또 하나, 빅토리아에서 만난 인연들은 지금까지 내 삶의 큰 복이다. 어학원에서 만난 일본 친구와도 가끔씩 안부를 나누고 있고, 한인교회 동생들과는 서울에 와서도 꾸준히 만나며 속내를 나누는 인생 친구가 됐다. 돈으로 살 수 없는 평생 재산을 얻은 셈이다.
그래서 나를 위한 1년간의 낭비는 30대를 돌아볼 때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되지 않아도 되고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자신만을 위해 낭비하는 시간은 하루든 일 년이든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낭비가 아니라 오히려 투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단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있다. 요즘은 'OOO에서 한 달 살아보기' 같은 것이 유행이던데, 그때는 그런 개념조차 나오기 전이었다. 그때 만약 <캐나다에서 1년 살아보기> 같은 걸 나름 잘 정리해서 다녀온 뒤에 글을 썼다면 그 분야의 개척자가 됐을 텐데. 나중에 '한 달 살기' 콘텐츠들을 보면서 무릎을 쳤다.
그러고 보면, 내가 생각했던 걸 누군가 하고 있고, 내가 쓰려고 했던 걸 누군가 이미 쓰고 있다. 그래서 '먼저 하는 사람이 임자'라고 하던가.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 하고 있는 것. 이제는 그런 것들을 놓치지 않고 해보려 한다. 10년 뒤 지금을 생각하며 '아, 그때 그거 했어야 했는데'라는 후회를 조금은 줄이기 위해. 나이기 때문에, 지금의 내 삶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 말이다.
물론 현실은 녹록지 않다. 이제는 사회에서 용도 폐기될 위기에 처한 50대의 프리랜서 작가. 나같이 사회에서 작고 미미한 존재가 만들 수 있는 작은 리그는 어떤 것일까. 오래 일하고 싶은 내가 뛸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계속 답을 찾으며 문을 두드리고 있다. 또 한번 거하게 나를 위해 낭비할 날을 기대하면서.
덧붙이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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