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 가난은 부모님이 내게 준 선물
[창간 20주년 공모- 나의 스무살] 삶은 오로지 본인의 선택으로 달라진다
인생의 황혼인 내 나이 77세. 익숙한 글솜씨는 아니지만 나는 요즈음 늦은 나이에 글을 쓰고 책을 본다. 내 삶이 후회 없기를 소망하며 일상을 보낸다. 학생 때 소풍날 보물찾기는 못했지만 인생의 끝자락 나는 보물찾기에 성공했다. 어느 날 서점을 통해 작가를 만나고 에세이 쓰기 공부도 하고 책을 읽는 북클럽에서 많은 사람들의 인생도 만났다. 어쩌면 나이 듦이 허허롭고 쓸쓸할 노년을 젊은 친구와 활기차게 보낼 수 있고 소통할 수 있어 즐겁다.
나는 전주에서 아주 평범한 한 가정의 장녀로 태어났다. 쭉 전주에 살다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 직장을 따라 고창군 무장읍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어 시골생활을 시작했다. 목가적인 자연 속에 아름다운 감성이 뭉글뭉글 피어났다. 순수하고 꿈이 많은 소녀 시절이었다. 문학세계가 아름답게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들꽃을 보고 새소리 바람 소리와 대화하며 시집을 읽으며 시심에 젖곤 했었다.
우리 집은 차츰 동생들이 하나둘 생겼다. 엄마를 도와 동생을 돌보는 일도 내가 해야 할 몫이었다. 예전에는 손빨래를 하고 우물에서 물도 긷고 집안일이 많았다. 모든 걸 자급자족해서 먹거리를 준비하던 때, 일상의 삶이 분주했다. 자연 속에 놀 수 있는 천진난만한 친구가 있고 자연 속에서 공부하는 소박하고 자유로운 생활이 행복하고 즐거웠다.
아버지는 이곳저곳 전근 다니는 경찰 공무원이었다. 유달리 약주를 좋아하고 음악도 좋아했던 낭만 많은 분이었다. 아주 낙천적이며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했다. 가족보다 주변 사람을 더 많이 배려해서 가끔이면 엄마와 다투는 날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가족은 뒷전이고 엄마가 고달팠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
무슨 일인지 몰라도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직장을 잃게 되면서 가정은 어렵게 되고 생활에 변화가 왔다. 다시 직장을 가지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차츰 의욕을 잃은 아버지의 무력함에 가족은 더 어렵게 되었다. 엄마 역시 친정에서 어렵지 않던 환경에서 곱게 자란 딸이라서 가정 경제적인 활동과는 무관했다. 억척스럽지를 못했다. 그때는 사회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이기도 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니고 있을 때다. 아버지 수입이 없게 되니 가정생활이 힘든 나날이 지속되었다. 대학교를 갈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상황이 되었다. 나는 짜증을 많이 내고 부모님에게 원망을 많이 하며 우울한 날이 지속되었다. 이십 대 시절은 꿈도 많고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세상 사는 일이 마음대로 안 되고 내 삶의 걸어가는 길이 끓어진 듯한 참담함이 나를 아프게 하면서 고통스러웠다. 대학을 다니는 친구를 볼 때면 울컥하는 마음에 몰래 눈물을 훔치곤 했다. 나는 경제적 도움을 받을 곳이 없었다. 우리 집은 어려움을 피해서 시골 생활을 선택했다.
나는 스스로 나의 삶을 찾아야만 했었다. 직장 생활을 선택하고 독립을 했다. 어린 나이 스무 살 때이다. 생활도 책임지며 외롭고 고독한 생활을 인내하며 잘 견뎌 냈다. 생활이라는 굴레 안에서 나의 꿈을 펼칠 여력이 없었다. 생활전선에서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고달픈 나날의 연속이었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꿈은 저 멀리 도망가고 말았다. 가끔씩 틈이 나면 나를 위로하듯 독서를 하는 게 작은 위안이었다. 책을 읽던 어느 날은 무거운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책이나 마음껏 읽을 수 있도록 서점이나 했으면 하는 작은 소망도 가져 본 날도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꿈은 뒤로하고 내 이십 대 청춘은 슬프고 아프게 지나가고 말았다. 대학을 어떻게든 가야지 하는 꿈은 접은 채.
가만히 앉아 있어도 세월은 간다고 결혼 적령기 스물여섯이 되었다. 나는 삶에 지치고 사는 게 힘이 들게 되고 결혼하라는 주변의 권유에 마음이 기울게 되면서 사촌 오빠의 중매로 설렘도 모르는 체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남편은 책임감과 생활력이 강하고 성실했다. 결혼 후 딸을 네 명 낳고 기르면서 가정에 온 마음을 다해 열심히 살았다. 아이들 교육도 최선을 다했다. 딸들은 모두 서울로 대학을 가게 되고 결혼해서 내 곁을 떠났다.
이제 이십 대에 가슴에 묻어둔 내 꿈을 위한 삶을 살기로 했다. 동양화도 그리고 자수도 독학해서 수강생을 모아 봉사도 했다. 공부할 수 있는 곳은 어느 곳이든 찾아다녔다. 차 공부도 오랫동안 하면서 허허로운 마음을 채울 수 있었고 더 넓은 세상과 멋진 삶도 만났다. 지역에서 공부하는 평생교육원도 빼놓지 않고 다녔다. 나의 성장을 위한 노력을 쉴 새없이 했다.
지금 내 나이가 딱 좋다
딸 네 명 중에 유난히 둘째 딸은 몸이 약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다닐 때다. 딸은 "엄마 나 공부 더 하고 싶으니 유학 보내 주세요"라고 했다. 우리는 큰딸 유학 보낸 상황에서 경제적인 부담으로 또 보낼 수 없었다. 둘째 딸은 희생을 했다. 나는 "결혼하면 대학원은 보내주마, 그리고 애 낳으면 도와줄게"라고 약속했다. 둘째 딸은 대학원을 다녔고 직장을 다니면서 아들을 낳았다. 남편을 두고 서울에 가서 살 형편은 아니라서 어쩔 수 없이 우리 집에 데려와 키우기로 했다.
나는 집에서 아이만 키우는 시간이 너무 허망했다. 애만 키우고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내 삶의 일부가 소멸된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원대 온라인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집에서 컴퓨터로 강의 듣고 리포트 쓰고 가끔씩이면 오프라인 수업을 한다. 딸에게서 손자 보육비를 받아서 등록금과 학비를 냈다.
내 나이 57세 되던 해이다. 공부는 재미있었고 늦은 나이에 학생으로 할머니로 정신없이 살았다. 그렇게 해서 4년을 공부해서 졸업하고 학사모도 썼다. 대학원도 2년 코스까지 마쳤다. 내가 그렇게도 꿈꾸던 공부를 해내고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고 사유할 수 있고 꿈을 이루었다. 손주는 7년을 키워서 초등학교 입학 때 서울 딸에게 보냈다.
어쩌면 내 어린 시절 가난은 부모님이 내게 준 선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었던 젊은 날들이 역경을 이겨내는 인내와 성실과 도전정신이었던 거다.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교훈을 얻어내고 인생을 후회 없이 사는 원동력을 만들었다. 참 많이 노력한 삶의 긴 여정이다. 지금은 다 저세상 사람이 되신 부모님이 때때로 그립다. 내가 이제는 부모님 나이가 되어 부모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70세가 넘었다. 부모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고 아프게 했던 일들이 죄송스럽다.
20년 전 내가 길렀던 손자가 이번에 대학에 들어가게 되고 스무 살이 됐다. 내 스무 살 때 꽃피우지 못한 대학 공부를 손자를 키우면서 바라던 꿈을 이루었다. 나는 지금도 열정을 가지고 나이를 잊고 더 많이 도전하고 싶다. 책도 보며 공부하며 여유를 즐긴다. 미숙하지만 글도 쓴다. 언론에 내 글이 올라왔을 때, 혼자서 가슴이 벅차 눈물을 훔친 적도 있다. 옛적 문학을 꿈꾸고 책을 좋아했던 소녀는 이제 책과 글 속에서 노년이 되었다. 다시 젊은 날로 돌아가라고 하면 사양하고 싶다. 나는 내 삶을 치열하게 살아 냈다.
나는 지금 내 나이가 딱 좋다. 내 젊은 날 아픈 이십 대, 풋풋한 꿈은 아름다운 날로만 기억하련다. 가난은 젊은 날 부모님이 내게 준 선물이었다. 인생은 무한하다. 삶은 오로지 본인의 선택으로 달라진다.
나는 전주에서 아주 평범한 한 가정의 장녀로 태어났다. 쭉 전주에 살다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 직장을 따라 고창군 무장읍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어 시골생활을 시작했다. 목가적인 자연 속에 아름다운 감성이 뭉글뭉글 피어났다. 순수하고 꿈이 많은 소녀 시절이었다. 문학세계가 아름답게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들꽃을 보고 새소리 바람 소리와 대화하며 시집을 읽으며 시심에 젖곤 했었다.
아버지는 이곳저곳 전근 다니는 경찰 공무원이었다. 유달리 약주를 좋아하고 음악도 좋아했던 낭만 많은 분이었다. 아주 낙천적이며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했다. 가족보다 주변 사람을 더 많이 배려해서 가끔이면 엄마와 다투는 날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가족은 뒷전이고 엄마가 고달팠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
무슨 일인지 몰라도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직장을 잃게 되면서 가정은 어렵게 되고 생활에 변화가 왔다. 다시 직장을 가지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차츰 의욕을 잃은 아버지의 무력함에 가족은 더 어렵게 되었다. 엄마 역시 친정에서 어렵지 않던 환경에서 곱게 자란 딸이라서 가정 경제적인 활동과는 무관했다. 억척스럽지를 못했다. 그때는 사회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이기도 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니고 있을 때다. 아버지 수입이 없게 되니 가정생활이 힘든 나날이 지속되었다. 대학교를 갈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상황이 되었다. 나는 짜증을 많이 내고 부모님에게 원망을 많이 하며 우울한 날이 지속되었다. 이십 대 시절은 꿈도 많고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세상 사는 일이 마음대로 안 되고 내 삶의 걸어가는 길이 끓어진 듯한 참담함이 나를 아프게 하면서 고통스러웠다. 대학을 다니는 친구를 볼 때면 울컥하는 마음에 몰래 눈물을 훔치곤 했다. 나는 경제적 도움을 받을 곳이 없었다. 우리 집은 어려움을 피해서 시골 생활을 선택했다.
나는 스스로 나의 삶을 찾아야만 했었다. 직장 생활을 선택하고 독립을 했다. 어린 나이 스무 살 때이다. 생활도 책임지며 외롭고 고독한 생활을 인내하며 잘 견뎌 냈다. 생활이라는 굴레 안에서 나의 꿈을 펼칠 여력이 없었다. 생활전선에서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고달픈 나날의 연속이었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꿈은 저 멀리 도망가고 말았다. 가끔씩 틈이 나면 나를 위로하듯 독서를 하는 게 작은 위안이었다. 책을 읽던 어느 날은 무거운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책이나 마음껏 읽을 수 있도록 서점이나 했으면 하는 작은 소망도 가져 본 날도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꿈은 뒤로하고 내 이십 대 청춘은 슬프고 아프게 지나가고 말았다. 대학을 어떻게든 가야지 하는 꿈은 접은 채.
가만히 앉아 있어도 세월은 간다고 결혼 적령기 스물여섯이 되었다. 나는 삶에 지치고 사는 게 힘이 들게 되고 결혼하라는 주변의 권유에 마음이 기울게 되면서 사촌 오빠의 중매로 설렘도 모르는 체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남편은 책임감과 생활력이 강하고 성실했다. 결혼 후 딸을 네 명 낳고 기르면서 가정에 온 마음을 다해 열심히 살았다. 아이들 교육도 최선을 다했다. 딸들은 모두 서울로 대학을 가게 되고 결혼해서 내 곁을 떠났다.
이제 이십 대에 가슴에 묻어둔 내 꿈을 위한 삶을 살기로 했다. 동양화도 그리고 자수도 독학해서 수강생을 모아 봉사도 했다. 공부할 수 있는 곳은 어느 곳이든 찾아다녔다. 차 공부도 오랫동안 하면서 허허로운 마음을 채울 수 있었고 더 넓은 세상과 멋진 삶도 만났다. 지역에서 공부하는 평생교육원도 빼놓지 않고 다녔다. 나의 성장을 위한 노력을 쉴 새없이 했다.
지금 내 나이가 딱 좋다
딸 네 명 중에 유난히 둘째 딸은 몸이 약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다닐 때다. 딸은 "엄마 나 공부 더 하고 싶으니 유학 보내 주세요"라고 했다. 우리는 큰딸 유학 보낸 상황에서 경제적인 부담으로 또 보낼 수 없었다. 둘째 딸은 희생을 했다. 나는 "결혼하면 대학원은 보내주마, 그리고 애 낳으면 도와줄게"라고 약속했다. 둘째 딸은 대학원을 다녔고 직장을 다니면서 아들을 낳았다. 남편을 두고 서울에 가서 살 형편은 아니라서 어쩔 수 없이 우리 집에 데려와 키우기로 했다.
나는 집에서 아이만 키우는 시간이 너무 허망했다. 애만 키우고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내 삶의 일부가 소멸된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원대 온라인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집에서 컴퓨터로 강의 듣고 리포트 쓰고 가끔씩이면 오프라인 수업을 한다. 딸에게서 손자 보육비를 받아서 등록금과 학비를 냈다.
내 나이 57세 되던 해이다. 공부는 재미있었고 늦은 나이에 학생으로 할머니로 정신없이 살았다. 그렇게 해서 4년을 공부해서 졸업하고 학사모도 썼다. 대학원도 2년 코스까지 마쳤다. 내가 그렇게도 꿈꾸던 공부를 해내고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고 사유할 수 있고 꿈을 이루었다. 손주는 7년을 키워서 초등학교 입학 때 서울 딸에게 보냈다.
어쩌면 내 어린 시절 가난은 부모님이 내게 준 선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었던 젊은 날들이 역경을 이겨내는 인내와 성실과 도전정신이었던 거다.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교훈을 얻어내고 인생을 후회 없이 사는 원동력을 만들었다. 참 많이 노력한 삶의 긴 여정이다. 지금은 다 저세상 사람이 되신 부모님이 때때로 그립다. 내가 이제는 부모님 나이가 되어 부모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70세가 넘었다. 부모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고 아프게 했던 일들이 죄송스럽다.
20년 전 내가 길렀던 손자가 이번에 대학에 들어가게 되고 스무 살이 됐다. 내 스무 살 때 꽃피우지 못한 대학 공부를 손자를 키우면서 바라던 꿈을 이루었다. 나는 지금도 열정을 가지고 나이를 잊고 더 많이 도전하고 싶다. 책도 보며 공부하며 여유를 즐긴다. 미숙하지만 글도 쓴다. 언론에 내 글이 올라왔을 때, 혼자서 가슴이 벅차 눈물을 훔친 적도 있다. 옛적 문학을 꿈꾸고 책을 좋아했던 소녀는 이제 책과 글 속에서 노년이 되었다. 다시 젊은 날로 돌아가라고 하면 사양하고 싶다. 나는 내 삶을 치열하게 살아 냈다.
나는 지금 내 나이가 딱 좋다. 내 젊은 날 아픈 이십 대, 풋풋한 꿈은 아름다운 날로만 기억하련다. 가난은 젊은 날 부모님이 내게 준 선물이었다. 인생은 무한하다. 삶은 오로지 본인의 선택으로 달라진다.
덧붙이는 글
길고간 나의 삶을 기록했다. 아픈 나의 삶을 민낯으로 보여주는 상황이 조금은 쑥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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