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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마비 환자를 약물로 죽인 순간... 전쟁의 끔찍한 민낯

[리뷰] 영화 <빈폴> 전쟁은 삶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등록|2020.02.17 10:29 수정|2020.02.17 10:29

▲ <빈폴> 포스터 ⓒ (주)팝엔터테인먼트


201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소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남성의 전유물이라 여겨졌던 전쟁 속에서 여성의 서사를 찾고자 했다. 그녀가 찾은 전쟁의 얼굴은 영웅담도 반전(反戰)의 메시지도 아니었다. 처절하게 외면 받고 상처만이 남은 얼굴이 전부였다. 한 마디로 전쟁은 단 한 순간도 삶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이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영화 <빈폴>은 두 명의 여성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조명한다.

<빈폴>은 작품의 제목(러시아명 'Dylda', 영어 'BEANPOLE' 둘 다 몸이 마르고 키가 큰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로 러시아명의 경우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기자 주)처럼 큰 키에 깡마른 체형을 지닌 이야(빅토리아 미로시니첸코)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2차 대전에 참전한 이야는 뇌진탕 증후군으로 전장을 떠나 레닌그라드에서 간호 업무를 한다.
  

▲ <빈폴> 스틸컷 ⓒ (주)팝엔터테인먼트


뇌진탕 증후군으로 갑자기 몸이 굳어버리는 증상을 앓고 있는 이야는 힘겨운 나날 속에서도 귀여운 아들 파슈카(티모시 그라스코프)와 함께 행복이 존재하는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중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고 이야는 그 무게감을 감당하기 힘들어 한다. 그런 그녀 앞에 함께 전장을 누비던 동료 마샤(바실리사 페렐리지나)가 돌아온다.

마샤의 등장으로 이야는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그녀가 겪은 비극적인 사건은 마샤와 연관되어 있으며 마샤는 그 사건에 대한 보상을 이야가 해주길 원한다. 주된 이야기가 되는 마샤와 이야 사이의 보상 문제는 사실상 이 작품이 보여주고자 하는 전체적인 주제의식을 생각했을 때 부분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그보다 더 진하게 작품의 근저에 깔려있는 정서는 전쟁의 참혹함과 잔인함이다.

이런 잔인함이 잘 드러나는 장면은 이야가 전신마비가 온 환자를 약물로 죽이는 장면이다. 그 환자는 평소 이야에게 친근하게 대했고 뒤늦게 부인을 만났다. 하지만 목 아래로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결국 죽음을 택하고 그 집행관으로 이야가 선택된다. 밤중 몰래 약물을 주사하러 온 이야는 투약 중 옆에 누워있던 환자의 아내와 눈이 마주치게 된다. 이 장면은 왜 전쟁이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보여준다.
  

▲ <빈폴> 스틸컷 ⓒ (주)팝엔터테인먼트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참전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이 책의 이야기 중 하나에는 전쟁 중 만난 남자와의 로맨스가 있다. 여자는 승전이 다가오자 더 이상 그 남자와 사랑할 수 없다는 걸 직감했다고 말한다. 전쟁에 참전한 남성과 여성은 같다. 전쟁 때문에 육체적·정신적으로 트라우마를 겪고 힘겨운 나날들을 보낸다.

마샤가 부유층 아들인 사샤(이고르 시로코프)의 구애에 관심을 보일수록 이야는 더 슬퍼하고 마샤에게 집착을 보안다. 이야는 자신의 슬픔을 안아줄 수 있는 존재는 같은 아픔을 품었으면서 자신에게 따뜻한 마음을 바라지 않는 마샤 밖에 없다고 여긴다. 그래서 마샤를 자신의 테두리 안에 가두고 싶어 한다. 반면 마샤는 그 사랑을 남성에게서 찾고자 한다. 특히 전장에 나가본 적 없는 연약하지만 부드럽고 사려 깊은 사샤는 마샤의 마음을 달래주고 어루만져줄 힘을 지니고 있다.
 

▲ <빈폴> 스틸컷 ⓒ (주)팝엔터테인먼트


작품은 2차 대전 당시 레닌그라드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해내며 회색의 색감을 살려낸다. 검은색처럼 완전한 어둠과 같은 지옥은 아니지만 밝은 희망이 보이지 않고 어둡고 암울한 분위기가 도시 전체를 뒤덮는다. 그 안에서 이야와 마샤는 서로를 향한 연대와 의지, 위로와 소통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에게 위안이 될 수 없다는 걸, 행복을 위한 답이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빈폴>은 왜 '전쟁'이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는지를 참혹하게 보여준다. 감정을 격화시키는 장면 없이 느린 전개를 통해 두 주인공에게 희망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진 레닌그라드의 모습을 조명한다. 전쟁에서 돌아온 남성은 영웅이 되지만 여성은 기피의 대상이 된다. 삶의 얼굴을 하지 않은 전쟁 속에서 따스함의 온기를 잃어버린 여성을 품어줄 존재는 없다. 여성의 목소리가 아닌 절규를 품은 이 영화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통해 두 눈 가득 슬픔이 맺히게 만든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김준모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브런치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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