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인생을 응원해 줄 수 있는 사장님과 알바라니
[창간 20주년 공모 - 나의 스무살] 알바는 나의 힘
▲ 20대 꾸준히 해 온 알바 경험을 살려 블로그에 담았다. ⓒ 남여원
아파트 실거래가를 알아보는 앱인 '호갱노노'를 켠다. 네이버 실거래가를 들여다본다. 아파트 시세에 관심 많은 30대 아줌마가 되었다.
나의 스무 살, 미성년자를 탈출해 드디어 부모님 의견과 상관없이 합법적으로 돈을 벌 수 있게 되었다. 모바일보다는 데스크톱으로 알바 관련 구직사이트를 들락거렸다. '알바몬'이나 '알바천국'이다. 여전히 둘은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이들에게 제법 인기다.
가난한 20대를 안다. '어쨌든 스스로' 살아내야 할 20대를 보냈다. 그런 이유로 화려한 알바경력을 보유하게 된다. 나름의 경력을 살려 한동안 운영하던 블로그에 '어느 알바의 필담'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연재하기도 했다. 아르바이트에 대한 경험을 공유하는 차원에서다.
시급 2500원, 2002년 한과공장
시급 2800원, 2004년 레스토랑 홀서빙
시급 3100원, 2005년 PC방
시급 3700원, 2006년 패밀리레스토랑 주방
시급 6600원, 2012년 요가원 안내데스크
시급 8300원, 2014년 어학원 차량보조
시급 8000원, 2015년 헬스클럽 등 블로그 관리 재택근무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2년 이상 했던 일들. 단기적으로 했거나 여러 사유로 업체와 맞지 않아 하루에서 한 주 했던 일들을 제하고도 꽤 된다.
돌아보니 좋은 사람들
스무 살, 첫 알바는 PC방이었다. 스물다섯 살 이후로는 이곳에 가 본 일이 없다. PC방에서 8~9개월 일했는데 아마 평생 갈 PC방은 이때 다 간 기분이랄까. 편입을 결심하고 많은 돈이 필요해 야간 근무까지 하게 돼서다. 서울 어느 터미널 근처 주거지역과 밀접한 곳이었다.
대부분의 알바가 그렇듯 이 일도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회원제 PC방으로 손님들이 가게에 돈을 지불한 순위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가게가 생긴 지 6개월이 되기도 전에 PC방에서 수백만 원을 소비한 손님 직업을 유추하는 재미가 있었다. 손님은 밤늦게 찾아와 오전까지 게임하고 아침이면 출근하는 듯했다. 이상하게도 게임을 하면 힘이 솟는지 초췌하다거나 피곤한 기색은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고 단정하고 말투가 늘 침착했다.
손님들은 주로 무리를 지어 드나든다. 가게를 지나치게 더럽게 사용하거나 게임을 할 때 유독 시끄러웠던 그들, 본업을 마치고 PC방을 찾는 헬멧 부대다. 그들을 '하이바 패밀리'라 불렀다. 주로 오토바이를 타고 중국집 배달 등을 했었다. 시끄럽고 가끔은 바닥에 침을 뱉고 엘리베이터에서 담배를 피우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나, 세상이 참 따뜻하고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라 생각하게 하던 이들도 그들이다.
오후 10시부터 오전 9시까지 11시간 이상의 노동시간. 길고 긴 밤 나도 모르게 잠깐씩 졸 때면 연장자인 그들은 세상 측은하다는 표정으로 계산하기 위해 카운터 주변을 빙 둘러서서 카드를 들고 막연히 기다리고 있었다. "피곤하시죠?"라는 한 마디를 건네기도 했다.
야간 알바를 장기적으로 할 수 없어 일정 부분 이상의 학원비를 벌어들이고 그곳을 떠났다. 그들의 "피곤하시죠?" 한마디는 나에게 제법 괜찮은 기억으로 남았다. 식품 재고를 확인하면서 전산과 실제가 맞지 않을 때면 "너 허락 없이 라면 먹었니?"라고 아르바이트생들을 차례로 의심하던 사장에 대한 기억은 좀 구리지만, 의외의 추억은 이런 곳에 숨어 있달까.
무슨 오기였는지, 고시원에서 아등바등 생활비를 벌어대며 어렵사리 편입하게 된 나. 취직하면 앞으로 알바인생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잠시 잊고 있었다. 아직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했고, 평생 업으로 삼을 일은 여전히 깜깜한 상태. 게다가 부모님의 의견과 나의 의견이 한 번도 일치해본 일이 없었음을. 이번에는 전공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공부를 하기 위해 대학원 입시를 준비한다.
몇 안 되는 좋은 고용주
모 요가원 안내데스크. 안내데스크와 나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그럭저럭 1년 정도 하게 되었다. 근무시간 안에 개인 시간이 확보되는 아르바이트를 찾기가 어렵다 보니 일을 찾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그곳은 프랜차이즈 형식으로 관리되는 센터 중 하나였다. 처음에 일을 할 때는 잘 모르기도 했고, 전산상 이상한 부분이 있더라도 오후 매니저가 더 오래된 사람이라 웬만한 일들은 믿고 넘어가려 했다.
그러다 한두 달 일한 뒤 본사 직영점이던 가게가 개인 자영업자에게 팔리게 되었다. 사장이 바뀌고, 사장은 알바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애매한 상황. 그즈음 일이 손에 익어가고 전산 시스템의 거의 모든 부분을 이해하게 되자 의심했던 부분들이 하나둘씩 톱니바퀴 맞추듯 드러났다.
새로운 수입으로 기록된 적이 없는 회원이 아침에 와서 운동하고 있다든지, 무료로 운동복 지급을 약속한 적 없는 회원인데 "저 돈 냈어요"라며 운동복을 사용하기 시작한 회원 등. 그 이후 가게 적자에 숨어 있던 비밀을 파헤치는데 몰두해 전산망에 있는 모든 손님을 샅샅이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월 수십만 원 이상, 많게는 100~200만 원 사이로 돈이 빠져나가고 있음을 알게 됐다.
오후 데스크를 보던 여자가 회원 유치 상담 뒤 현금으로 등록을 권유하고 본인이 가져가 이득을 취해 왔던 것이다. 돈이 나올만한 모든 곳을 샅샅이 조사하자 개인 사물함, 카드 재발급, 운동복 등에서 나온 많은 돈이 모두 여자 주머니를 향해 들어가고 있었다. 여자가 출근하기 전, 사장에게 자세히 알리고 나 또한 퇴사하고자 한다 했다.
그러나 사장님의 만류로 급여도 올려받고 저녁 알바도 좋은 사람으로 채용하게 되었다. 1~2년 전 사장님 카톡 프로필 사진을 보니 아직 요가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겪어본 고용주 중 몇 안 되는 좋은 고용주다. 어려울 때 도울 수 있었고, 각자의 인생을 응원해 줄 수 있는 사장님과 알바라니.
나는 그들에게 어떤 사람이었나
▲ 자료사진 ⓒ 변창기
스무 살의 추억은 아니지만, 고등학교 때 아는 분 소개로 한과공장에서 일을 했었다. 중학교 때 돈을 벌어보겠다고 종일 전단을 돌려 5000원을 손에 쥐어본 이후 최초다. 고된 노동의 연속이었다. 아침 일찍 9시 전에 출근해서 밤 10시 가까이 일했다. 근로자의 휴식에 대한 기준이나 명절, 휴일에 출근할 때 급여의 차이 같은 것을 몰랐다. 아는 분 소개로 왔으니 열심히 일했다. 마침 명절 전이라 일손이 부족했고 부지런히 도왔다.
한쪽에서는 유과를 정성스럽게 튀겨내 새하얀 튀밥이 담긴 소쿠리에 던졌다. 유과에 튀밥 옷이 잘 입혀지면 돗자리 위에 던졌다. 넓게 깔린 돗자리에 새하얀 유과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고무장갑, 작업 장화, 앞치마를 착용하고 작업용 쓰레받기나 바구니로 한과를 퍼담았다. 큰 봉지에 한꺼번에 담거나 소분용으로 모아두는 바구니에 쉼 없이 나누어 담았다. 튀밥 가루 옷을 입은 한과는 계속해서 돗자리 위로 던져졌고, 17살 고등학생은 부지런히 퍼날랐다.
공장은 재미난 곳이었다. 한과 공장의 노동은 쉼 없이 반죽하고 튀겨내고 퍼나르는 육체노동(대근육)과 작은 방에 앉아 백화점 납품용 한과를 꾸미는 꼬물꼬물 손노동(소근육)으로 분류된다.
방 안에 도란도란 모여 앉아 대추, 잣, 깨로 상자 위 한과들을 꾸밀 때면 몽골에서 온 노동자 언니는 현지에서 유행하던 노래를 흥얼거렸다. 할머니들은 각자 앉은자리에서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방바닥은 따끈했다. 명절 대목 전에는 매일 같이 꼬박 10시간을 일했다. 이렇게 2주 정도 일했던 것 같다. 받은 돈은 2주 15만 원이 조금 더 됐거나 안 됐다.
"거기 네롱 좀 줘봐?"
할머니가 말씀하시는 네롱을 열심히 찾았지만, 결국 그것이 뭔지 알 수 없었다. 할머니가 찾던 건 바로 멜론맛 한과였다. 연두색.
결국 아르바이트하면서 남은 건 사람들과의 추억이다. 인생을 잘 모른다 여겨지는 그때부터 쭉 함께 해온 이것. 회사에 다닌 기간보다 아르바이트로 살아낸 기간이 더 길다. 그래서 20대 중반까지는 스스로를 알바몬이라 부르기도 했다. 30대로 접어들기 직전까지 나의 스물은 사람들과 함께, 일상을 이어 나갈 힘이 되어 주는 일과 함께했다.
그럴듯한 학력도, 항상 부족하다고 여기던 돈도, 두 손에 아무것도 없는 그저 그런 스무 살. 돌아보면 아르바이트는 단순한 돈벌이 수단만은 아니었다. 오늘도 막연했지만 내일도 여전히 막연할 수밖에 없는 나를 든든하게 붙잡아주는 일상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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