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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뭐 먹고 산다냐?" 엄마 말에 대학 대신 직장으로

[창간 20주년 공모 - 나의 스무살] 잃어버린 스무 살의 꿈

등록|2020.02.29 19:19 수정|2020.02.29 19:19

▲ 모시는 가족의 생계였고 어머니의 솜씨였다. ⓒ 이복희


"엄마, 나 대학가도 돼?
"그…럼… 우린 뭐 먹고 산다냐…"


엄마의 커다란 눈은 소리 없이 방바닥으로 내려갔고 걸레질하던 손이 멈추었다. 짜증이 올라왔다. 내 나이 스물세 살, 힘들게 고민하다 한 말인데. 발악하듯 소리를 내지르고 싶었지만 목울음이 먼저 차고 올라왔다. 엄마보다 더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한숨도 감히 쉬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하얀 모시를 싼 보자기를 머리에 이고 무명 저고리 한복에 허리 질끈 동여맨 엄마는 동구 밖 신작로로 나가면서 손사래를 쳤다.

"금방 올게. 어여 들어가."

서천 장까지 십리 길, 뙤약볕이 내리쬐기 전에 얼른 갔다 와야 하는 엄마의 분주한 발걸음을 주저하게 했다. 막무가내 엄마를 따라가겠다고 할머니 손을 뿌리치고 달려가다 넘어져 풀썩 주저앉아 억울하게 울었다. 내 몸과 내복은 흙을 먹어버렸다.

딸만 여섯을 낳고 두 딸을 홍역과 영양실조로 하늘로 보낸 엄마는 스스로 딸만 낳은 죄인으로 살았다. 시아버지의 허세로 가세는 기울고 그 아들은 못 배운 한을 풀기 위해 방랑을 했단다. 덕분에 할머니와 엄마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동네 품팔이를 해야 했고 엄마의 솜씨는 집안의 자랑이었다. 엄마가 짠 모시는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모시를 팔아 생필품을 사기 위해 새벽길을 나서던 엄마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알사탕을 사 주머니에 넣고 오다 그날도 오징어 다리 파는 곳에서 한참을 머물다 오셨단다.

"너 임신했을 때 그 오징어 다리가 너무 먹고 싶었단다. 그러면 입덧이 사라질 것 같았지. 그런데 그걸 하나 못 사 먹고 왔단다. 내 입을 즐겁게 할 수가 없었어…"

첫 월급은 4만 5000원

중학생 때까지 몸이 약한 나는 새벽이면 자주 잠을 깼다. 체해서 잠을 못 이루면 엄마는 시아버지에게 배운 침으로 사관(四關, 손과 발) 자리에 침을 놓아 주곤 하셨다. 배를 따스하게 쓰다듬어 주면서 "내가 너 배 속에 있을 때 너무 못 먹어서 니가 이리 약한가벼"하며 천장을 바라보셨다.

모든 순간, 모든 일상을 책임지고 사시던 엄마는 누구 탓을 할 줄 모르셨다. 오직 자신이 바다인줄 착각하며 사는 사람 같았다.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여고 3학년, 열아홉 살 뜨거운 8월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언니 둘은 출가한 외인이 되었고 엄마는 쉴 틈 없이 남은 자식 먹여 살리려고 한산모시를 받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팔러 다니셨다.

입에 쓴 내가 나도록 발품을 팔다가 낯선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갈 용기가 없어 물 한 모금도 먹지 못했던 날들, 배가 고파 쓰러질 것 같은 순간들도 많았단다. 그 뒤 엄마는 우리 집 대문을 스쳐 지나가는 행상들이나 걸인을 보면 툇마루에 앉혀놓고 물을 마시게 하거나 밥상을 차려주곤 하셨다.

초록이 조금씩 녹색으로 변해가는 여름날, 매미 울음소리처럼 목소리를 내고 싶었던 스무 살, 녹음이 짙어갈 푸르른 날처럼 찬란해야 할 스무 살 여자아이 가슴에 빨간 비가 내리는 날이 많았다. 견디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견디어 가고 있던 스무 살 나는 어느 날 파란 하늘을 보고 싶어 고개를 들었는데 빨간 눈물이 자꾸만 흘렀다. 고개를 저으며 흐르는 것도 감추어야 했다. 왜냐하면 나름 예쁘고 싶었으니까.

하늘거리는 푸르른 스커트를 입고 살랑거리는 바람을 맞으며 친구들과 들로 산으로 바다로 떠나고 싶은 스무 살, 엄마 친정 옆집에 사는 지인의 도움으로 직장을 다니게 되었다. 가장이라는 훈장이 달그락거리며 주홍글씨처럼 가슴에 새겨졌다. 첫 월급은 4만 5000원, 이렇게 나는 스무 살 청춘으로 평생 가족을 먹여 살린 엄마에게 밥줄이 되었다.

철이 너무 빨리 들어 무거워진 머리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바람 잘 날 없다는 진리가 어느 날 천둥번개처럼 내 스무 살을 또 한 번 통째로 흔들었다. 아버지가 유일하게 남기고 간 집 한 채가 문제가 되었다. 뒷집에서 새집을 건축하면서 우리 집 뒷담이 그 집 땅이라 헐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법정투쟁이 시작되었다. 가난이란 쓰나미를 넘어 아버지의 부재와 아들 없는 모녀의 서러움은 조선 시대가 끝나고 세기가 바뀌어가도 변함이 없었다. 직장에서 조퇴하고 틈틈이 법원으로 시청으로 찾아다니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약속만으로 끝나는 게 부지기수였다. 겨우 만난 담당자는 확인한다.

"아버지나 오빠가 안 오고 왜 딸이?"

서류를 살펴보고 난 뒤 표정이 바뀐다. 그 뒤로 만날 수가 없었다. 다른 직원들이 속삭이듯이 들려주는 말은 "민사소송하면 오래 걸리고 더 어려워지니 잘 합의해보라"는 언질만 줄 뿐이었다. 뒷집은 법대로 한다고 난리고 시청 담당자는 번번이 바쁘다고 자리에 없었다. 한 직원이 사정이 딱해 보였는지 진지하게 듣더니 뒷집이 억지를 쓰는 것 같다며 담당 과장을 만나게 해주겠다고 약속시간을 잡아주었다.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과장 사무실에서 뒷집 사람이 거들먹거리며 나오고 있었다. 약속 시간이 되어도 문이 열리지 않더니 급한 볼일이 있다며 과장이 나갔다. 직원이 음료수를 내밀었다. "도와주지 못해 미안해요"라며 고개를 숙인 채 자리로 갔다. 돈 없고 빽 없고 집안에 남자가 없으면 무시당해야 하는 걸까.

여름날 해만큼이나 내 가슴도 시뻘건 게 타들어 갔다. 뒷담은 헐리고 그 집은 새 건물로 지어지고 뒷집 처마를 통해 흘러들어오는 모든 빗물은 우리 집 차지가 되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좌절감을 밖으로 표현조차 할 수 없는 내향적인 성향으로 꼭꼭 숨어버렸다. 철이 너무 빨리 들어차 무거워진 머리는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아도 땅으로 떨어졌다.

늦었지만 지금이 시작이다
 

▲ 글쓰기와 독서모임. ⓒ 이복희


글쓰기를 좋아했고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던 소녀의 꿈은 여고 선생님이었다. 돈이 들어가는 것이라면 그 무엇도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찾았다. 도서관을 찾아 책을 읽고 살아내기 위한 글쓰기였다. 꿈을 잃어버린 스무 살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때는 그랬다. 용기 없는 자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독서와 글쓰기는 숨을 쉬게 하는 선물이기도 했다.

결혼 후 삼십대에는 자녀 양육에 최선을 다하는 게 당연했던 엄마인 나, 장남 며느리이면서 남편의 빚을 갚기 위해 맞벌이를 해야 했던 나, 청년 가장으로 이십대를 함께 보낸 딸만 넷인 친정어머니를 차마 홀로 지내게 할 수 없어 결혼 후에도 같이 살았다. 덕분에 맞벌이를 할 수 있었다.

불혹이 되고 중년의 위기라는 태산을 넘으면 어느 순간 잃어버린 나를 찾아 떠나는 애벌레가 되고 싶어 하는 꿈틀거림이 용트림치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바닥을 치는 순간 빙산의 일각처럼 깊이 박혀있던 꿈 하나가 거침없이 솟아 올라왔다. 대학 가는 거였다. 만학도가 되어 세월만큼 길어진 나이를 가방에 넣었다.

여고생을 가르치는 선생이 될 수 없는 나이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사회복지사가 되었고 상담 공부를 시작했다. 아픈 사람, 고통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쓰다듬어주고 공감해주는 일은 흐뭇한 기쁨을 남긴다,

이십대, 대학 가고 싶다던 딸의 말에 고개조차 들지 못했던 엄마의 한숨 속에 담겨진 깊이만큼 살아오면서 나를 존재하게 한 엄마의 바다 같은 침묵은 스무 살 아이에겐 살아갈 힘을 잃어버리게도 했지만 오늘까지 살아내게 하는 힘이기도 했다. 언제나 엄마는 나의 거름이셨다.
   
세상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자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신기루에 현혹되었다. 젊은 날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순간들의 꿈 조각을 모으기 시작했다. 글쓰기모임, 독서모임, 캘리그라피, 인터넷 활용하기, 블로그 꾸미기를 배우고 이야기 할머니로 봉사하면서 더 나은 노년을 희망하며 간다. 늦었지만 지금이 시작이다.

글쓰기, 독서 모임의 배움을 통한 만남 덕분에 책 한 권 없지만 시인이 되었다. 가난했던 스무 살이 선택한 독서와 낙서가 반석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애벌레처럼 때를 기다린다. 껍질을 깨고 날아오르는 나비가 될 것을 말이다. 책을 한 권 내겠다고 굼벵이처럼 기어간다. 혹시 아는가? 재주를 넘을지, 이순(耳順)에 잃어버린 스무살의 꿈을 다시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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