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인간' 편에 서겠다는 진보정치, 어디 갔습니까
[주장] 고 문중원 기수 분향소 행정대집행 현장에서 진보정치의 책임을 묻는다
▲ 고 문중원 기수의 유가족이 고인의 곁에 있겠다며 머무는 5평 남짓한 농성장을 에워싸고 있는 경찰 병력. ⓒ 문중원 열사 대책위
어제(2월 27일) 오전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인근은 아수라장이 됐습니다. 공공기관 한국마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문중원 기수의 분향소 앞에 차려져 있던 작은 천막 하나가 행정대집행에 의해 철거됐기 때문입니다. 종로구청은 경찰과 용역을 대동해 그 자리에 있던 열사의 유족과 노동자, 시민을 폭력적으로 끌어냈고, 시설을 부쉈습니다. 아비규환 그 자체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연행되거나 병원에 후송되는 등 무자비한 공권력 행사의 후유증은 심각했습니다. 용역의 폭력에 의해 신체에 상처를 입거나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도 여럿 있었습니다. 저도 용역이 던진 손난로에 오른쪽 눈을 맞는가 하면, 경찰과 용역의 폭력에 항의하던 도중 강제로 바닥에 내던져져 극심한 통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투명인간의 편' 말한 진보정치, 볼 수 없었다
저는 어느 진보정당의 당원입니다. 2018년 10월에 입당해 지금까지 당원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운 적은 없었습니다. 때로 당 지도부를 비판하고, 때로 당 정치인의 언행에 동의하지 않은 적은 있습니다만, 진보정당의 당원이자 진보정치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을 만큼 당과 진보정치가 부끄러웠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광화문에서, 저는 진보정당의 당원이라는 사실이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지금, 진보정당은 국회의원 총선거를 눈앞에 두고 총선 승리를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당원 아닌 대규모 시민선거인단이 참여하는 비례대표 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이 한창인가 하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에 따른 위성정당의 출현에 대한 논쟁과 비판을 제기하느라 분주합니다.
진보정치의 비전과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선거는 중요한 과정이자 수단입니다. 이점을 부정하고 싶진 않습니다. 민심을 왜곡하고 의석수를 확보하려는 유령 위성정당은 반드시 심판받아야 한다는 점에도 뜻을 같이하며, 경선 과정에서 진보정치의 일꾼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한다는 점에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진보정치는 현장을 토대로 세워지고 나아왔다는 점을 힘주어 말하고 싶습니다. 현장은 진보정치의 뿌리이고 기반입니다. 진보정치에 몸담은 구성원이라면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일례로 정의당이 고 노회찬 대표의 유지를 받들어 스스로를 '6411번 버스'에 비유하며 '투명인간'들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러한 선언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대변하고 그들의 현장을 기반으로 삼겠다는 정치적 각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 현장에서 국회의원을 비롯한 진보정치의 중책을 맡고 계신 선배 정치인은 볼 수 없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에 인권감시단 파견을 요구하거나 종로구청과의 중재를 시도하는 등 진보정치가 도맡아 해야 할 적극적 역할 수행의 흔적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설령 행정대집행을 막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현장을 지키고 '투명인간'의 편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진보정치의 소명이라고 배운 저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광경이었습니다.
지금, 진보정치가 나서야 하는 이유
▲ 철거가 시작된 농성장에서 오열하는 문중원 기수의 부인 오은주 씨와 그 옆을 함께 하는 문 기수의 장인 오준식 씨. ⓒ 문중원 열사 시민대책위
물론 저는 국회의원 등의 직위가 가지는 권위와 위계에 기대어야만 국가폭력을 막을 수 있는 한국 사회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권한의 문제이기 전에 책임의 문제이기에 홀로 쓰라린 마음을 삼키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려 합니다.
민주노동당 창당 전후를 기점으로 20년 세월 진보정치 외길을 걸어오고 계신 수많은 선배 정치인들은 항상 정치를 가리켜 '책임을 지는 일'이라 강조했습니다.
감히, 그분들에게 여쭙고자 합니다. 이것이 진보정치가 '투명인간'에게 약속한 책임입니까.
막연히 선배 정치인을 탓함으로써 선을 긋거나 스스로의 정치적 부채를 탕감했다고 자위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지금껏 그래왔듯, 진보정치가 책임 있는 자세를 가지고 고 문중원 기수의 죽음을 둘러싼 한국마사회의 부조리와 노동탄압에 대한 유족과 동료 노동자, 시민의 투쟁에 함께 복무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이 진보정치가 기성정치와 구별되는 가장 명확한 지점이 아니겠습니까.
진보정치가 스스로 말하는 책임은 실천 위에 있어야만 비로소 확언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라건대, 진보정당이 어제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분향소 침탈 사건과 더불어 한국마사회에 만연해 있는 부조리와 고 문중원 기수의 억울한 죽음에 대하여 진보정치가 마땅히 감당하여야 할 사명을 부디 외면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청와대 앞 108배를 위해 길을 나선 유족과 시민대책위 구성원들이 경찰에 막혀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 있습니다. 지금, 진보정치가 이들 곁에 서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 나중은 있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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