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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 창간에 참여

[김삼웅의 '한글운동의 선구자 한힌샘 주시경선생' / 8회] "독립신문이 창간되자 기자로 입사하여 편집과 교정을 담당하였다."

등록|2020.03.06 16:57 수정|2020.03.06 16:57
 

▲ 독립신문 ⓒ 이상기

서재필은 조선 정부로부터 10년간 중추원 고문으로 일해달라는 조건을 수락하고 1895년 12월 귀국하였다. 귀국한 서재필은 신문 발행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하였다.

부패무능하고 반동적인  수구세력을 견제하고, 백성을 계몽하여 내외의 정세를 알리고, 굶주린 승냥이처럼 몰려와 국가의 각종 이권을 침탈하는 외세를 견제ㆍ비판하기 위해서는 신문만한 역할이 다시 없다고 믿었다. 미국에서 잘 지켜보았던 터이다.

다행히 새 내각의 수장이 된 박정양은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의 선진문물을 시찰하고, 미국특파 전권대사로 미국사회를 돌아보았기 때문에 근대적 신문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 서재필과 독립문 ⓒ 이홍로


서재필은 미국 감리교 선교사들이 발행하는 영어잡지 『코리안 리포지토리』 1896년 3월호에 「한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일」이라는 시론을 기고하였다. 신문 발간의 동기와 목적을 밝히는 최초의 글이다.

정부는 국민의 실정을 알아야 하고 국민은 정부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 정부와 국민 상호간의 이해가 있도록 하기 위해서 쌍방에 대한 교육이 있을 뿐이다.…교육 없이는 국민들이 정부의 좋은 의도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교육 없이는 정부관리들이 결코 좋은 법률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주석 1)


서재필의 신문 발행에는 걸림돌이 많았다. 먼저 일본인이 발행하는 『한성신보』에 서재필이 새 신문 창간을 준비중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서재필 씨는 근자에  서양으로부터 귀국하였기 때문에 감개무량함을 참지 못하는 점이 많아,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워야겠다고 하는 중에 위선 제일착으로 영한문의 신문을 창간할 생각이라고. 목적은 사회개량의 지도에 두고 또한 조선의 현상을 서양 각국에 알려야 되겠다고 한다. (주석 2)
 

윤치호는 1911년 105인 사건후 1915년 2월 13일에 출감하여 변절한 후 적극적 친일에 앞장서 일제로부터 귀족 칭호를 받는 대표적 친일파였다.윤치호는 1911년 105인 사건후 1915년 2월 13일에 출감하여 변절한 후 적극적 친일에 앞장서 일제로부터 귀족 칭호를 받는 대표적 친일파였다. ⓒ


서재필의 신문 창간에 가장 민감하게 대응한 것은 일본 공사관이었다. 일본은 서울에서 『한성신보』를 발행하면서 한국내의 반일감정을 무마시키고 친일세력을 비호하면서 여론을 독점하다시피하고 있었다. 서재필에 의해 신문이 창간되면 반일적인 논지가 될 것으로 내다보면서 창간작업을 방해하였다.

갑신정변 때의 동지로서 미국 망명 후 귀국하여 총리대신 비서관을 거쳐 1895년 학부협판이었던 윤치호의 일기에 일본의 방해공작 사실이 소상하게 담겨 있다.

서재필이 만나자고 하여 오후 4시에 그를 방문하였다. 그는 "일본인들이 가만두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조선은 2개의 신문이 유지될 정도로 발전되지 못했고 그들의 『한성신보』는 계속 간행되어야 하므로 경쟁지를 만들려는 어떠한 시도도 분쇄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일본의 호의에 반하는 일을 하는 자는 누구든 죽이겠다는 것을 넌지시 암시하였다. 언젠가 내가 조선의 몇몇 기술자들을 상대로 석유를 미국으로부터 직수입하면 가격이 싸서 소비자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 그들은 나를 대단히 싫어한다. 여기에는 나 혼자이다. 미국 정부는 나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조선 정부나 국민은 일본인의 암살로부터 나를 보호할 능력도 의사도 없다. 나는 혼자이고 보호도 받지 못한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말하였다. (주석 3)

일본의 치열한 방해공작에도 서재필이 신문을 발행할 수 있었던 것은 아관파천으로 러시아세력이 득세하고 일본세력이 추락하는 정세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재필은 일본측의 방해를 극복하면서 신문 창간을 서둘렀다. 정부는 정동에 있는 정부 소유의 건물을 신문사 사옥으로 쓰도록 하고, 신문창간 비용으로 3,000원, 서재필 주거 구매비로 1,400원을 지원하였다. 서재필은 귀국 직후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어 10년간 월 300원의 급여를 받기로 정부와 계약을 하였다. 미국에서 월 100달러(원화와 동일) 수준에서 크게 많아진 급여이다.
  

1898년 3월 22일자 <독립신문>.1898년 3월 22일자 <독립신문>. ⓒ 김종성


창간 당시 신문의 제호는 『독닙신문』으로 썼다가, 5월 2일자 제12호부터는 『독립신문』으로 바꾸고 '독립'과 '신문' 사이에 태극기가 들어가는 모습의 제호가 되었다. 종간호까지 이런 제호를 사용하였다. 서재필은 오사카에서 인쇄기와 신문 제작에 필요한 활자 등을 들여왔다.

『독립신문』은 가로 22cm, 세로 33cm 크기의 4면으로 발행하고, 3면까지는 순한글 국문판, 4면은 영문판으로, 화ㆍ목ㆍ토 주 3회 발행의 격일간이었다. 1898년 7월 1일 제76호부터는 일간으로 바뀌었다. 영문판 기사와 논설은 서재필이 직접 작성하고 주시경이 논설과 국문판 편집ㆍ제작을 맡았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의 사장 겸 주필을 맡아 창간사를 썼다. 신문은 당초 예정보다 한 달 쯤 늦은 1896년 4월 7일 창간호를 발행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민간신문이 창간되기에 이르렀다.
 

순한글과 영어로 찍어낸 독립신문, 중국으로 벗어나려는 의식이 보인다. 그러나 서구에 대한 독립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순한글과 영어로 찍어낸 독립신문, 중국으로 벗어나려는 의식이 보인다. 그러나 서구에 대한 독립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


『독립신문』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둘러싸고 그동안 학계에서는 논란이 일었다. 서재필 중심이라는 통설에 대한 이론이 제기되었다. 순한글로 창간한 것도 '서재필 주체'의 반론에 소제가 되었다.

『독립신문』을 연구한 채백 교수는 여러가지 정황을 소개하면서 "『독립신문』의 창간계획은 서재필 보다는 당시 김홍집 내각의 내무대신으로 있던 유길준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주석 4) 라고 주장하였다.

한국언론사 연구가인 정진석 교수는 "독립신문의 창간은 서재필 한 사람의 개인적인 업적이 아니라, 국내 개화파와 서재필의 합작이며, 특히 국내 개화파 중에서 갑오경장을 추진했던 온건 개화파가 서재필의 명석한 두뇌와 지식을 빌어쓰기 위해서 창간하게 된 신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주석 5) 고 하였다.
 

서재필독립신문 ⓒ 송유미


『독립신문』의 큰 기여 중에는 한글전용이 포함되었다. 과연 누구의 발안으로 순한글 신문을 만들게 되었는가. 채백 교수의 주장이다.

"그의 성장과 교육과정을 볼 때 그가 한글에 대해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기회는 거의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특히 윤치호는 1893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 서재필을 방문하였는데, 당시의 일기에서 그는 '서재필은 모국의 말이나 글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서재필은 한글을 잘 몰랐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며 그렇다면 『독립신문』에 순한글을 사용하기로 한 것도 그의 결정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순 한글로 창간된 『독립신문』이 서재필에 의해 창간되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가는 해석이다." (주석 6)

주시경은 배재학당의 강사이기도 했던 서재필의 권유에 따라 회계 겸 교보원(校補員)으로 신문사에 입사하였다. 한글연구와 운동의 본격적인 출발점이 된 것이다. 교보원은 오늘의 교정원(校正員)을 뜻한다. 북한 자료에는 "독립신문이 창간되자 기자로 입사하여 편집과 교정을 담당하였다." (주석 7)
고 쓰고 있다.


주석
1>  김승태, 『서재필』, 75~76쪽, 독립기념관, 2011.
2> 『한성신보』, 1896년 1월 20일치, 잡보란.
3> 『윤치호 일기』, 1896년 1월 31일치.
4> 채백, 『독립신문 연구』, 69쪽, 한나래, 2006.
5> 정진석, 『한국 언론사』, 160쪽, 나남, 1992.
6> 채백, 앞의 책, 70쪽.
7> 신구현, 「주시경선생의 생애와 활동」, 『주시경 학보』제2집, 271쪽, 1988.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한글운동의 선구자 한힌샘 주시경선생‘]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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