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군으로 30여 년을 복무한 신태영은 해방 후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이 됐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인들은 한시바삐 제국의 신민이 되어 동아시아를 개척해야 한다. 내 첫 출진의 목표는 야스쿠니 신사(안장이)다."
'국가공인 친일파' 신태영이 1943년 11월 17일 <경성일보>에 발표한 수기 중 일부다. 당시 신태영은 학생들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임시특별지원병제도 종로익찬위원회'에 참여해 조선인의 병력 동원을 선전하고 선동하는 역할을 했다. 이후 예비역 중좌로 해주 육군병사부에 근무하며 전시체제 병력동원과 군사훈련 등 실무를 담당했다. 청년들을 전선에 내보내는 역할이었다.
신태영은 일본군으로 30여 년 간 복무했다. 그 기간 그는 철저히 일본에 부역했다. 2009년 그를 국가공인 친일파로 지정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기록을 보자.
"신태영은 191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나고야 제3사단 보병 제33연대에서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기 시작했다. 1918년 중위로 진급하고, 같은 해 시베리아 간섭전쟁(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세워진 소비에트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미·영·프·일 등이 일으킨 전쟁 – 기자 주)에 참전했다. 1924년을 전후해 (일본 내) 조선군 소속을 명받아 1933년경까지 근무했다. 그사이 대위와 소좌로 진급했다. 1938년에는 중좌로 승진했다. 그는 이후에도 계속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1942년 용산정차장 사령관(전선 및 남북만주에 걸친 수송 업무 관장-기자 주)을 역임했다."
▲ [현충원 안장 친일파] 신태영 묘지일본군으로 31년 복무한 신태영,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이 되다 친일파 신태영의 묘는 장군2묘역 가운데 자리해 있다. 장군2묘역은 임정요인과 애국지사묘역 상단에 위치한 곳으로, 그곳에서 서면 지사들의 무덤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볼 수 있다. 두 묘역 간 거리는 직선으로 50m에 불과하다. ⓒ 공명식
일본 장교로 복무했던 신태영은 해방이 되자 대한민국 군인이 됐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자진 입대 해 대령이 되었다. 일본군 중좌(중령)로 전역했던 그가 더 높은 계급을 달고 대한민국 국군의 고위 장교가 된 것이다.
입대와 동시에 육군본부 초대 행정참모부장 겸 국방부 제1국장을 맡았던 그는 이듬해 5월 육군 준장으로 승진해 별을 달았다. 준장 승진 5개월 뒤에는 별 두 개인 육군 소장이 됐다. 동시에 제3대 육군참모총장도 맡았다.
1950년 4월 당시 국방부장관인 신성모 등과 의견 충돌로 자진 퇴역 했다가, 두 달 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전북편성관구사령관에 임명됐다. 군 수뇌부와 충돌해 50년 7월에 면직되기도 했으나 얼마 안 가 다시 요직을 꿰찼다.
군 경험이 전무한 이기붕이 국방부장관이 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전란 중에 다시 신태영을 찾았다. 신태영은 1952년 1월, 별 세 개 육군 중장으로 승진했다. 그해 3월 29일엔 대한민국 4대 국방부장관이 돼 이듬해 6월까지 재임했다. 이후엔 친일파 백홍석에 이어 재향군인회 3·4대 회장직을 맡았다. 1954년 국방부가 청년단체를 해산하고 청년 중심으로 만든 민병대의 총사령관도 역임했다.
애국지사 머리맡에 잠들다
▲ 친일파 신태영, 이응준이 잠든 제2장군 묘역에서 바라본 애국지사 묘역. ⓒ 김종훈
신태영은 1959년 4월 8일 6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74년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돼, 현재 국가공인 친일파 이응준과 함께 장군2묘역에 잠들어 있다. 장군2묘역은 국립서울현충원 안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장소 중 하나다. 그 아래쪽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독립운동을 하다 희생당한 애국지사 및 순국선열들의 묘역이 자리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두 묘역 사이의 거리는 직선거리 40m 이내다.
1993년 운명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비서장 조경한 지사가 "내가 죽거든 친일파가 묻혀 있는 국립묘지가 아니라 동지들이 묻혀 있는 효창공원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떠난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 지사의 유언은 실현되지 못했다. 조 지사가 사망했을 당시 효창공원은 용산구에서 관리하는 근린시설이었다. 김구, 윤봉길, 이봉창, 차리석 등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이 묻혀있지만 더는 무덤을 조성할 공간이 없었다. 조경한 지사는 국립묘지법에 따라 현충원에 안장됐다. 그의 무덤과 친일파 묘역까지의 거리는 직선으로 75m에 불과하다.
묘비에 새겨진 극찬... 친일이력은 어디에?
국립서울현충원 신태영의 묘비에는 "개화의 선구자로 호국의 간성(干城/나라를 지키는 군인)이시었다, 강직과 청렴으로 시대의 등불이었다"라고 새겨졌다.
"개화의 선구자로 호국의 간성이었고, 강직과 청렴으로 시대의 등불이었으며, 덕과 지용으로 국군을 세워 기르셨으니 뜻의 굳으심이 눈바람에 푸르른 청송이시오. 덕의 굳으심이 뭇 봉우리 우뚝한 태산이시라. 높은 뜻 해와 함께 이 땅 위에 머무르시고 빛난 달과 함께 어둠 속의 등불 되시어 조국을 길이길이 비치오소서. 비치오소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그를 '국가공인 친일파'로 규정하면서 그 사유로 "신태영이 일본 육사 졸업 이래 30여 년간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시베리아 간섭전쟁에 참여하고, 중등학교 군사교육을 담당한 군사교관으로 재직했으며, 전시 후방 병참을 위한 용산정차장 사령관을 역임했고, 병력동원과 군사훈련을 주도한 해주 육군병사부 과장으로 복무했다"고 발표했다. 또 "신태영이 강연회 등에 참석해 조선인 병력동원 등 선전·선동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고도 했다.
▲ [현충원 안장 친일파] 신태영 묘지일본군으로 31년 복무한 신태영,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이 되다 친일파 신태영의 묘는 장군2묘역 가운데 자리해 있다. 장군2묘역은 임정요인과 애국지사묘역 상단에 위치한 곳으로, 그곳에서 서면 지사들의 무덤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볼 수 있다. 두 묘역 간 거리는 직선으로 50m에 불과하다. ⓒ 공명식
그러나 신태영은 아들 신응균과 마찬가지로 국립묘지법 제5조 1항 "장성급 장교"라는 이유로 여전히 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지난 1월 2일 김원웅 광복회장은 "천황폐하 만세를 외쳤던 친일파들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명당자리인 이곳에 잠들어 있다"면서 "이런 이들을 두고 (극우언론에서) 국민화합과 단결을 외치는데 이게 일제강점기 내선일체와 뭐가 다른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장군2묘역 입구에 2020년을 맞아 새롭게 세워진 현판에는 "6.25전쟁 중인 1952년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신태영 중장 등 6위가 모셔져 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하신 장군들의 숭고한 얼을 기리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추모해 주시기를 바란다"라고만 기록됐다. 친일행적과 관련된 내용은 어디에도 없다.
▲ 신태영 (1891~1959) - 야스쿠니에 묻히겠다던 친일파, 현충원 명당에 눕히다"조선인들은 한시바삐 제국의 신민이 되어 동아시아를 개척해야 한다. 내 첫 출진의 목표는 야스쿠니 신사(안장이)다." 일본군 육사를 졸업하고 30년간 일본군으로 복무한 신태영이 1943년 <경성일보>에 발표한 수기다. 당시 그는 학생들을 전쟁터에 동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임시특별지원제도 종로익찬위원회'에 참여해 조선인 병력동원을 선전하고 선동하는 역할을 맡았다. 해방이 되자 대한민국 군인이 되어 여순사건에 대령 계급을 달고 자진 입대했으며, 그 후 제3대 육군참모총장, 제4대 국방부장관까지 맡았다. 1959년 사망 후에는 국가공인 친일파 이응준과 함께 국립 서울현충원 장군2묘역에 잠들어 있다. 장군2묘역 아래쪽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독립운동을 하다 희생당한 애국지사 및 순국선열들의 묘역이 자리해 있다. 두 묘역 사이의 거리는 직선거리 40m 이내다.? ⓒ 오마이뉴스
☞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11인 묘지 찾기
(http://www.ohmynews.com/NWS_Web/event/snmb/index.aspx)
☞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이장 촉구' 청와대 국민청원 함께 하기(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87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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