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지 더 사겠다고 싸우는 사람들... 캐나다도 덮친 '코로나 공포'
[코로나19 속 캐나다] 며칠 사이 확 달라진 분위기... 다문화 사회에서 한번도 보지 못한 상황들
▲ 텅 빈 식료품점의 모습. ⓒ 최봉진
'코로나19 비상사태 조치가 시행된 첫 주말, 런던 대부분의 공공장소와 거리는 썰렁한 모습이었다. 그 어디에도 교통체증은 없었다. 물론, 토요일에도 코스트코와 식료품 가게 등은 이 유례 없는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휴지 등 생필품을 구입하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16일(현지시각) 캐나다 런던지역 일간지 <The London Free Press>에 실린 'Coronavirus: Feisty signs of life in a weekend London shutdown'이라는 기사의 일부다.
실제로 그랬다. 지난 주말, 캐나다 온타리오주 남동부 도시인 런던의 풍경은 여느날과 달라보였다. 거리는 한산했고, 도로에는 차들이 별로 없었다. 전 세계가 팬데믹 공황 상태에 빠져 있을 때도 크게 동요하지 않고 사태를 예의주시하던 캐나다였지만, 지난 주말을 기점으로 분위기가 180도 달라졌다. 기사의 내용을 조금 더 소개해본다.
웨스턴 페어(Western Fair) 구역에 있는 스포츠플렉스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땀에 젖은 장비가 든 무거운 하키 가방을 끌고 다니는 아이들, 하키 게임을 보려는 엄마 아빠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일요일 아침 성당에서는 종소리가 울리지 않았다. 폴 대성당은 영국 성공회 후론 교구의 공공 예배 중단 방침에 따라 문을 걸어 잠갔고 문 밖에는 이를 설명하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로마 가톨릭 런던 교구는 교회를 열어 놓았지만 일요일 미사를 취소했다. 그곳에는 촛불도, 사제도, 음악도 없었다.
런던 다운타운 동쪽에 위치한 웨스턴 페어에는 카지노와 경마장이 있고, 하키 게임이 펼쳐지는 스포츠센터가 있다. 주말마다 주자창은 카지노를 즐기려는 사람들과 하키 토너먼트에 참가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하키가 국기인 캐나다에서는 평일이든 주말이든 가릴 것 없이 게임이 있는 날이면 지역 스포츠 커뮤니티 센터 주차장이 발 딛을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 가득찬다. 그러나 코로나19 비상사태 조치는 이같은 캐내디언의 평범한 일상마저 뒤흔들어 놓았다.
예배도 마찬가지. 런던 시내 곳곳에 위치한 성당과 교회들이 주일 미사와 예배를 취소하고 있다. 주말이면 항상 붐비던 대형 쇼핑몰과 극장 역시 비상 사태의 여파로 한적하기만 하다. 사람이 몰리는 곳은 주로 생필품을 파는 대형 식료품점과 LCBO, Beer Store 등 주류를 판매하는 곳 등이다. (참고로 온타리오주는 술을 정부가 지정하는 LCBO, Beer Store 등에서만 구입할 수 있다).
주말 사이 180도 달라진 캐나다 분위기
2주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평상시와 다를 바 없어 보였고, 코로나19 사태도 남의 나라 일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듯했다. 언론을 통해 사태가 악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보도가 간간이 흘러나오기는 했지만, 정부와 보건당국은 캐나다의 위험도를 낮은 단계라고 발표했다.
그런데 한인 커뮤니티에서 느끼는 분위기는 그와는 많이 달랐다. 정부 발표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 실제 많은 한인들이 확진자 통계에 의구심을 표하고 있고, 정부의 상황 인식과 대처에 깊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체계적인 대응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한국과 달리 캐나다에서는 아직까지 제대로 된 검진과 방역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탓이다.
열흘 전 쯤 막내 딸이 고열이 나고 기침을 하길래 혹시나 해서 패밀리 닥터에게 갔다. 그런데 의사는 통상적인 검진을 마친 뒤 단순한 감기라며 그냥 돌려보냈다. 의아스러웠다. 이 시국에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검진을 안 하니 누가 얼마나 걸렸는지 어떻게 알겠어". 지인들과 담소를 나누면서도 마음 한쪽에서는 불편함이 밀려들었다.
▲ 코로나19 대책 기자회견 하는 캐나다 총리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오른쪽)가 11일(현지시간) 오타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트뤼도 총리는 이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처를 위한 10억 캐나다달러(약 8천700억원) 규모의 재정 대책을 발표했다. ⓒ 오타와 AP=연합뉴스
그런데 며칠 전부터 평온해 보이던 캐나다 상황이 확연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12일 캐나다 총리실은 저스틴 트뤼도 연방총리의 부인 소피 그레고어가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았다며 부부가 관저에서 14일 동안 자가 격리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같은 날, 초·중·고등학교의 봄 방학(March Break) 기간이 끝나더라도 2주간 더 휴교에 들어갈 것이라는 온타리오 교육부 장관의 공식 브리핑이 나왔다. 이틀 뒤인 14일에는 트뤼도 총리가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한 비상사태 조치를 선포하는 대국민 연설을 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국민들을 위해 구제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것과 해외 입국자를 받아들이는 공항 수를 제한하고, 국적과 상관없이 모든 입국자에게 14일간 자가 격리를 실시하며 크루즈 등의 캐나다 입항을 오는 7월까지 중지하는 것 등을 포함하는 내용이다.
관련해 연방보건당국은 실생활에서 지켜야 할 수칙 등을 발표했다. 가급적 모임이나 사람들이 많이 붐비는 공공 장소 등을 피할 것과 악수나 허그를 하지 말 것, 타인과 접촉할 경우 2미터 이상 거리를 유지할 것 등의 사회적 거리를 가져야 한다는 지침이었다.
런던시 당국 역시 이날 코로나19 비상 조치의 일환으로 모든 도시 내 운영 프로그램을 취소하고 관련 시설을 폐쇄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조치로 16일부터 커뮤니티 센터, 경기장, 수영장, 레크리에이션 및 스포츠 프로그램, 지역사회 대여소의 모든 시설과 프로그램이 추후 통지가 있을 때까지 폐쇄된다.
며칠 사이 연방정부와 주정부, 런던시가 잇달아 코로나19 관련 비상 조치를 발표하자 지역사회는 크게 요동치고 있다. 대형 마트는 물론이고 심지어 편의점까지 휴지, 생수, 냉동식품, 캔 등의 생필품이 바닥이 났다.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물건을 먼저 사기 위해 상점이 문을 열기 전부터 줄을 선다.
16일에도 지역 사회는 한바탕 소동을 겪었다. 이날 오후 1시 트뤼도 총리가 중대 발표를 할 것이라는 소식에 사람들이 크게 동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도시내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 '셧다운(Shut Down)'이 있을거란 루머가 돌면서 지역내 LCBO와 Beer Store는 술을 사려는 사람들로 아침부터 장사진을 이뤘다.
이곳에서 일하는 나로서는 이 풍경이 아주 생경했다. 캐나다에서 15년째 살고 있지만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재기의 실체를 바로 눈앞에서 목격한 탓이다. 원래 월요일은 일주일 중 가장 한가한 날인데 끝없이 몰려드는 사람들과 매장 오픈 여부를 묻는 전화가 빗발치는 통에 오후까지 정신이 없었다.
"어제(15일) 아침 오픈하기 30분 전쯤 식료품점(Grocery Store)에 갔는데 사람들이 벌써 줄을 길게 서 있었어. 그런데 맨 앞에서 어떤 사람과 직원이 언쟁을 벌이고 있더라. 1인당 2묶음씩만 살 수 있는 화장지를 더 사겠다고 누군가 목소리를 높이더라고. 다들 미친 것 같아.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인지."
셧다운 루머가 해프닝으로 밝혀진 그날 오후 매장을 방문한 캐내디언 친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저렇게 말했다. 평생을 캐나다에서 살아온 그 친구에게도 지금 런던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습이 어색하고 이상하게 비친 듯했다. (한편 트뤼도 총리는 현지시간 16일 오후 1시 30분 열린 기자회견을 통해 오는 18일부터 캐나다 국경을 폐쇄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조치로 캐나다 시민권자와 영주권자, 미국 시민권자를 제외한 외국인들의 캐나다 입국이 제한된다).
코로나19의 공포, 처음 보는 캐나다의 모습
캐나다는 여러 인종이 섞여있는 다문화 사회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캐내디언이 이민자에게 친절하고 관대하며 호의적이다. 그렇지만 포용과 다양성, 존중을 중시하는 캐나다 사회에조차 이기심과 불신, 차별의 바이러스가 뿌려지고 있는 것 같다.
캐나다 공중보건 최고 책임자인 테리사 탐은 지난 1월 30일 자신의 트위터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와 관련해 중국인들과 아시아인들에 대한 인종차별 및 소셜미디어에서의 수치심을 주는 발언에 대한 보고가 증가해 우려스럽다"고 적었다. 소셜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중국인과 아시안에 대한 인종차별과 비난의 목소리가 늘어가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현한 것이다.
최근에는 아시안이 운영하는 상점을 기피한다는 소식도, 불편한 시선을 느꼈다는 지인의 하소연도 종종 듣게 된다. 침착하고 평온하던 사람들이 공포와 불안, 두려움 속에 물건을 사재기하고, 남들보다 물건을 더 많이 더 빨리 사기 위해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는다. 타인에 대한 불신과 차별을 공공연히 드러내기도 한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이런 모습들은 내가 경험했던 캐나다와는 참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저 멀리 아시아에서나 벌어지는 일인 줄만 알았던 바이러스의 위협이 직접적인 현실로 다가오자 감추어져 있던 인간의 본성이 자연스레 발현되는 것일 터다. 바이러스에 무너지는 건 육체가 아니라 어쩌면 마음이 먼저가 아닐까.
17일 오전 9시 현재(현지시간) 캐나다의 코로나19 확진자는 총 424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온타리오주가 177명으로 가장 많고, 브리티시 콜롬비아(103명)와 앨버타(74명), 퀘벡(50명) 등도 빠르게 증가하는 추세다. 그러나 검진과 방역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인 사회의 우려는 점점 깊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래저래 뒤숭숭할 수밖에 없는 시기, 표현하지는 않아도 모두들 두려움 속에 갇혀 지낸다. 그나마 다행스럽고 위로가 되는 건 바다 건너 한국에서 들려오는 훈훈한 소식이다. 유럽을 비롯해 미국과 캐나다 등 전 세계가 팬데믹에 빠져있는 가운데 한국은 확진자의 증가세가 꺾이면서 조금씩 안정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정부와 방역당국의 민주적이고 적극적인 대응은 단연 화제가 되고 있다. 대다수 외신이 한국의 코로나19 대처법을 조명하는 기사를 앞다퉈 내보내고 있는 중이다. 그들은 신속하게 진행되는 진단의 속도와 압도적인 검사량 등을 주목하며 한국의 공격적 대응법을 세계가 배워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더욱 반가운 것은 생사가 걸린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한국인 특유의 배려와 나눔의 미담들이 사회 곳곳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손을 돕기 위해 현장으로 달려가는 의료진과 자원봉사자들, 그들을 위해 기꺼이 잠자리를 제공해주는 사람들, 임대료를 자발적으로 인하해주는 건물주들, 고사리 손으로 한푼 두푼 모은 돈을 기부하는 아이들, 생명줄 같은 마스크를 양보하는 사람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위해 각종 밑반찬을 전해주는 이들... 콧잔등을 시큰하게 만드는 행렬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충격과 공포 속에 휩싸여 있다. 이곳 역시 마찬가지다. 여전히 불안하고 걱정이 앞선다. 그러나 어디에도 희망은 있다. 지난 11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는 '한국은 민주주의가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항해 성공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는 칼럼을 통해 "한국 정부의 조치는 대중교육, 투명성 제고, 시민사회 참여에 집중돼있다"면서 "한국 시민사회가 코로나19 대응에 자발적으로 동참하고 있다"고 전했다.
칼럼은 한국이 세계가 본받아야 할 모범국이라 평가 받는 이유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코로나19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던 한국은 정부 당국의 민주적이고 공격적인 대응과,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도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들의 분투가 더해지면서 빠르게 회복해나가는 중이다.
나는 한국이 전 세계가 직면해있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이러스를 물리치는 힘은 백신이 아니라 투명하고 건강한 정부의 의지와 능력, 그리고 아픔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적 헌신과 사랑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지금 바로 그것을 전 세계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캐나다 온타리오주에 위치한 런던은 토론토에서 남서쪽으로 두시간 거리에 있는 도시입니다. 공식적인 인구는 38만 4000명이며 그중 한인은 약 3000명 가량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기자의 블로그 '바람 부는 언덕에서 세상을 만나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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