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군'이라 부르던 장택상, 둘의 기묘한 인연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 (22)] 제5-9대 대통령 박정희 ⑦
▲ 구미 금오산 ⓒ 박도
"사람 팔자 알 수 없다"
현재 구미시는 이전의 선산군 9개 면(面)과 이웃 칠곡 일부까지 편입한 대도시다. 하지만 내가 자랄 때 구미는 선산군에 배속된 면소재지로 인구 1만 명 안팎의 조그마한 시골이었다.
그 무렵은 비교적 개방된 사회라 이웃간 쌀뒤주 사정까지 알고 지냈다. 1946년 10. 1항쟁으로 가장을 잃은 셋째 형 박상희 댁은 참 어려웠다. 그런 가운데도 그의 부인 조귀분 여사는 천성이 낙천적이었다. 산에 땔감 나무를 하러 가서도 "노세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못 노나니"와 같은 노래를 부르면서 고단한 세상살이 시름을 잊고 살았다.
나는 그분을 보고 "사람 팔자 알 수 없다"는 속담을 실감했다. 어느 날 대한민국에서 가장 끗발 좋은 대통령 형수에 국무총리 장모로 서울 효창동 마나님이 되는 걸 봤기 때문이다.
몇 해 전, 귀향길에 아래 구미 상모동 대통령 박정희 생가, 철길 건너 임은동 13도 창의군 군사장 왕산 허위 선생 생가, 오태동 국무총리 장택상 생가 등지를 두루 둘러봤다. 이들 세 집안은 금오산 남쪽 산기슭에 일 킬로미터 쯤 솥발처럼 세모꼴로 떨어져 있었다.
세 집안은 선대부터 세교가 있었던 바, 거기에 얽힌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 기사에서는 현대사의 우뚝한 두 인물 박정희와 장택상 얘기만 전한다.
박정희와 장택상
▲ 박정희 상모동 생가 ⓒ 박도
박정희와 장택상 두 생가는 경부선 철길 하나 사이로 부르면 대답할 수 있을 정도의 이웃마을이다. 해방 무렵까지만 해도 장택상 전 총리 집안은 영남 제일의 대부호 만석꾼으로 고향 일대에서 남의 땅을 밟지 않고 다닐 정도였다.
장택상은 초등학교 때부터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구치(山口)현에서 소학교를 다녔고, 도쿄 와세다(早稻田) 대학에서 공부하다가 영국 에딘버러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온갖 부귀영화는 다 누렸다.
해방 후 수도경찰청장, 초대 외무부장관,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고향 칠곡에 출마해 이후 5대까지 내리 네 차례나 당선해 국회부의장, 제3대 국무총리 등 대통령직만 빼놓고는 대한민국 정부의 요직은 거의 다 누렸다.
이와 달리 박정희는 출생부터 한 편의 비극 드라마처럼 참담했다. 그 무렵에는 조혼으로 나이 마흔만 넘으면 며느리나 사위를 보고 긴 담뱃대를 물고 노인행세를 하던 때였다. 박정희 어머니 약목 댁은 꽉 찬 나이에 아이를 가져 눈앞이 캄캄했다.
우선 시집간 딸과 함께 해산을 하자니 식구들에게 체통이 서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동네사람들에게 남사스러웠고 더욱이 그때까지 육남매로 여덟 식구가 외가 위토(位土, 묘지에 딸린 논밭) 여덟 마지기 농사를 지어가며 근근이 살아가는데 또 한 입을 더 보탠다는 게 아찔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임신 사실을 안 때부터 뱃속의 아이를 지우고자 온갖 민간요법을 다 써봤다고 전해진다.
박정희 아버지 박성빈은 처가의 위토만으로 도저히 생활이 안 돼 장 직각(장택상 아버지 벼슬이름)댁 땅 다섯 마지기를 소작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소년 박정희는 가을 추수가 끝나면 둘째 무희 형이 지게에다 도지(賭地, 논밭을 빌린 삯)와 마름에게 줄 뇌물 씨암탉을 지고 장 직각 댁으로 가는 것을 보고 자랐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어릴 때 제대로 먹지고 못해 체구도 작은 소작인의 막내아들은 국가최고회의 의장이 되고, 곧 대통령이 됐다. 장택상씨가 볼 때는 천지개벽할 정도로 놀랄 일이었다. 마름의 아들도 아닌, 대면조차 하지 않았던 천한 소작인 아들이 당신이 그렇게 하고 싶던 이 나라 대통령이 됐다니.
장택상의 분노
▲ 장택상 생가 내실 ⓒ 박도
그래서 장택상 씨는 5.16 쿠데타 이후 군정연장반대투위 고문,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의장 등 반(反) 박정희 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당시의 '박정희 의장'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공식 칭호를 붙이지 않았다. '박정희씨' '박정희군'이라고 낮춰 부르며 당신 특유의 독설을 늘어놨다.
이 말을 전해들은 박정희 대통령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세상이 변한 줄도 모른 채, 아직도 자신을 소작의 아들로 여기면서 깔본다고.
1963년 11월 26일, 제6대 국회의원 선거 때 장택상씨가 고향 칠곡에서 입후보하자 박 대통령이 총재로 있었던 민주공화당은 30대 정치 신인을 후보로 내세웠다. 당시 경북 칠곡 선거구는 장택상씨가 네 차례나 70% 이상의 유효 득표율로 당선된, 그의 '텃밭'이었다. 그래서 당시 대부분 언론과 유권자들은 그의 당선을 낙관했다.
하지만 그런 예상을 깨고 장택상 씨는 무명의 정치 신인에게 참패를 당했다. 선거 결과 민주공화당 송한철 후보 3만1446표에 자유당 장택상 후보 2만3647표였다.
그 선거에 패한 가장 큰 까닭은 '무장경찰' 때문으로 읽힌다. 당시 칠곡경찰서에서 장택상 후보를 특별히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무장경찰 네댓을 앞뒤로 호위시켰다. 그러자 지역 유권자들이 무장경찰을 두려워한 나머지 장택상 유세장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참패한 뒤에도 장택상씨는 계속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번 선거는 장택상이가 진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패한 것이다."
그러다가 그만 병이 들었다. 마침 미국에 있는 딸의 초청으로 신병을 치료하고자 장택상씨가 수속을 밟는데, 외무부에서 여권이 나오지 않았다. 그제야 장택상은 냉엄한 현실을 깨닫고 마침내 '박정희 대통령 각하 전상서'라는 사실상 항복 편지를 청와대로 보냈다.
▲ 장택상 국무총리, 수도경찰창장 재임 때. ⓒ 박도
장택상의 항복 편지
"각하의 건승하심을 축복합니다. 각설 소생은 금년 1월경에 신병으로 의사의 권유에 의하여 미국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기로 결심하고 외무부로부터 회수여권을 발급받아 미국에 가서 치료를 마치고 금년 초에 귀국한즉, 의외에도 비행장에서 여권을 압수당하고 1주일 후에 다시 외무부에 가서 압수된 여권의 반환을 요청하였더니, 외무부 측은 본인의 여권은 취소되었으니 반환할 수 없다고 거절을 당하였습니다.
지금 소생은 자양(滋養, 몸의 영양을 좋게 함)할 여유도 없거니와 일체 비용은 미국에 거주하는 소생의 여식이 부담하므로 외화 유출의 과오를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소생이 비록 부덕하와 국가에 공로는 없을망정 그렇다고 해서 국가에 해를 끼친 일도 없습니다. 일제 36년간 여권으로 굶주림을 받다가 건국 후 제1대 외무부 책임자(외무부장관)로 이 나라 여권을 창조한 바가 있는 소생에게 회수여권 한 장 허용할 아량이 없대서야 참으로 가혹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각하의 처단이라면 소생은 다시 개구(開口, 입을 열다)할 여지조차 없지만 만일 그렇지 않고 한 하부의 처사라면 각하의 재결(裁決, 판단)이 있으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소생은 금후도 병세 여하에 따라 미국에 가야만 하는 처지에 서 있습니다. 소생의 신상관계로 각하의 염려를 번뇌케 하여 드려 죄스러움을 미리 사과 올립니다." - 장택상 자서전 <대한민국 건국과 나> 288~289쪽
▲ 박정희 전 대통령 ⓒ 박도
삶이란 한 조각의 구름
지난날 대지주의 아들이 소작인 아들에게 꼬리를 납작이 내리고 땅에 엎드려 쓴 글이다. 이 편지가 청와대에 접수된 뒤, 장택상씨는 외무부로부터 여권을 받고 미국에 가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였다. 구미에서 직선으로 칠곡에 가려면 오태동 장택상 생가를 지나야 했다. 장택상은 차마 자기 생가가 고속도로에 편입되는 것을 막고자 또다시 청와대에 탄원을 한 모양이다. 그러자 박정희는 이를 들어줬다. 그때문에 지금도 그 부분 고속도로는 직선이 아니고 곡선이다. 이른바, '장택상 커브길'이 된 것이다.
두 생가 현장을 답사하자 지난날 으리으리하던 장택상 전 총리의 구미 오태동 생가는 이미 오래 전에 남의 손으로 넘어갔다. 한때는 절이 됐다가 지금은 한식집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 시절 다 쓰러져가던 초가삼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상모동 생가는 말끔히 단장돼 경상북도 지정기념물 제86호가 됐다. 방문객이 줄을 잇고 있었다.
고향의 한 호사가는 인동 장씨는 왕손의 명당을 찾아 인동에서 금오산 기슭 오태동을 찾아왔다. 하지만 정작 왕손의 명당자리는 박정희 아버지 박성빈씨가 약목에서 먹고 살 수가 없어 처가 수원 백씨(박정희 대통령 외가)의 묘답을 부쳐 먹고자 괴나리봇짐을 지고 찾아온 그에게 돌아갔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풍수지리설에 따른 재미난 이야기도 있지만 생략한다. 나는 좁은 대한민국 땅에다가 '내 땅이네' 하면서 아무데나 묘지를 쓰고 석물을 갖다놓는 것은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로 우리가 과감히 버려야 할 적폐로 보기 때문이다.
전 국무총리 장택상도, 전 대통령 박정희도 세상을 뜬 지 오래다. 그들이 사라진 훈기 잃은 생가를 고향 출신의 한 문사는 '구름에 달 가듯이' 지나면서 시비곡절을 따지고 싶지 않았다. 다만 인생무상, 세무십년으로, 불가의 선시 한 수를 읊조렸다.
生也一片 浮雲起(생야일편 부운기)
死也一片 浮雲滅(사야일편 부운멸)
浮雲自體 本無實(부운자체 본무실)
生死去來 亦如然(생사거래 역여연)
삶이란 한 조각의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의 구름이 사라짐이라.
뜬 구름 자체가 본래 아무것도 없듯이
삶과 죽음의 오고감 또한 그러하리라.
지주도, 소작인도 없는 저승에서 두 사람은 화해 술잔을 나누면서 조국 '대한민국'과 후손들의 안녕을 기도해 주시기 바란다. 요즘 나라가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매우 어지럽다.
(* 다음 회에 계속)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장병혜, 장병초 편 <창랑 장택상 자서전, 대한민국 건국과 나> / 박도 지음 <그 소년은 왜 대통령이 되었을까> / 조갑제 지음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 등과 동시대에 살았던 여러 고향사람들의 증언으로 쓴 기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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