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사건' 만든 국회의원들
[取중眞담] 50대·남성 대변하는 '아재국회'에서 여기자가 사는 법
[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롭게 쓰는 코너입니다.[편집자말]
▲ 여의도 국회의사당. ⓒ 권우성
2017년 초 정치부 기자로 처음 찾은 국회의 모습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복 차림의 50대 남성이었고, 그들은 아무 문제의식 없이 성차별적 발언을 내뱉었다. 한 남성 국회의원이 여성 기자에게 "그 언론사는 기자들 몸매 보고 뽑느냐"는 말을 했다고 해 놀란 것도 잠시, 나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의원으로부터 황당한 일을 당했다.
그해 어느 여름날 저녁, 한 원내정당 공보실에서 마련한 출입기자들과 의원들 간 '치맥(치킨·맥주)' 자리였다. 검찰 출신 남성 의원이 불콰해진 얼굴로 뒤늦게 도착해선 '폭탄주'를 말아 기자들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할 일이 남아있어 술을 자제하던 내게 그는 혀 꼬인 발음으로 '왜 안 마시느냐'고 물었다. 그 의원은 손수 만든 폭탄주가 담긴 500mL 맥주잔을 들고 선 채로, 앞으로 다가오며 나를 밀어붙였다.
사과를 받기는 했다. 고민 끝에 정식 사과를 요청한 내게 그는 며칠 뒤 전화해 "그럴 뜻은 없었다", "본의가 아니었다", "오랜만에 술을 마셔서 그랬으니 봐달라"는 말로 변명했다.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고 뭘 잘못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만약 내가 남자였어도 그랬을까? 하필 그날 나는 부모님이 처음 맞춰준 하얀색 정장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혹시 그 옷이 문제였나? 오랫동안 그 순간을 곱씹어야 했다. 앞뒤 상황을 복기하며 자기 검열에 시달렸다. 그 자리에서 바로 한마디 쏘아붙이지 못한 스스로를 오래 자책했다.
"본의 아니게" 여성 기자 허벅지·뺨 만졌다는 의원들
그래도 나는 직접적 '터치'가 없었으니 다행이었을까. "본의 아니게" 여성 기자 뺨을 두 번 건드렸다는 의원. 여성 비서가 있는 단체 카톡방에서 '그 야동 구해줄까' 물었다던 의원 보좌진들. '만취한 탓에' 여기자 허벅지를 실수로 짚었다던 의원. "여성이 상의만 탈의하는 곳이지 스트립쇼는 안 봤다"고 해명한 의원. 여성 신체를 본뜬 19금 성인용품 '리얼돌'을 국정감사장에 데려와 앉힌 의원… 공교롭게도 모두 남성들이었다.
주로 남성들이 여성 미성년자 등을 성적으로 착취해 금전적 이익을 본 'n번방 사건'은, 여성에 대한 차별과 대상화에서 기인한다. 그들은 상대를 자신과 같은 인간이 아니라 성적 욕망을 해소할 '몸뚱이'로 봤다. 국회는 어떤가. 지인 능욕 등 얼굴·신체 합성음란물을 두고 "청원한다고 법 다 만드냐"(미래통합당 김도읍), "나 혼자 즐기는 것까지 (처벌)할 거냐"(미래통합당 정점식), "일기장에 그림 그리는 것"(더불어민주당 송기헌)이라 한 법사위원들은 책임이 없을까. 어쩌면 모두가 'n번방 사건'의 공범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입법부 정치인들의 낮은 성인지 감수성은 결국 가해자들이 빠져나갈 구멍이 되고는 한다.
▲ 손솔 민중당 청년 비례대표 후보가 지난 23일 국회의원회관 송기헌·정점식·김도읍 의원실 등을 항의 방문했다. 해당 의원들은 국회 법사위에서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두고 한 '딥페이크' 관련 일부 발언이 논란이 됐다. ⓒ 민중당
2017년 8월 <미디어오늘>이 진행한 국회 출입기자 성희롱 실태조사에 따르면, 답변 중 국회의원에게서 성폭력을 경험했다는 응답이 75%로 가장 많았다. '상대가 억지로 성관계를 시도했다'는 응답도 1명 있었다(관련기사: "남자 기자·취재원만 있던 술자리, 나는 '꽃순이'였다").
이러한 결과는 20대 국회의 구성과 무관치 않다. 다수 의원이 50, 60대(전체 의원 중 86%), 남성(83%)이다. 현재 여성의원은 약 17%, 30대 나이 청년의원도 3명 뿐이다(관련기사 보기).
앞서 논란이 된 법사위 소위원회에서 딥페이크 기술 이용 음란물 '소지'만으로도 처벌하자고 의견을 낸 의원이 백혜련 의원(민주당)과 채이배 의원(민생당)이라는 점도 주목해 봐야 한다. '아재국회'가 왜 바뀌어야 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n번방 사건' 방지법 총선 뒤로 미루는 20대 국회
3주도 채 남지 않은 4월 15일 총선, 이번에 새롭게 뽑힐 '국민의 대변자'들은 다를까. 슬프게도 그렇지 않을 것 같다. 민주당은 당헌에도 명시된 '지역구 여성 30% 공천' 약속을 이번에도 역시 지키지 못했다. 미래통합당은 '체육계 미투 1호'라며 영입했던 김은희 전 코치를 당선권 밖인 미래한국당 23번에 배치했다.
26일 한국여성단체연합 등이 원내 4개 정당 대상으로 분석·발표한 성평등 공약 결과에 따르면, 폭행·협박이 있어야 하는 현행 강간죄 구성요건을 동의 여부로 바꾸자는 '비동의 간음죄' 도입을 공약한 건 정의당·국민의당뿐이었다. 민주당은 검토해보겠다고만 두루뭉술 답했고, 미래통합당은 아예 관련 공약조차 없었다(아래 파일 첨부).
국회청원 시작 하루 만에 10만 명이 동의한, 국민적 공분을 산 'n번방' 방지 입법조차 국회는 총선 뒤로 미루고 있다. "선거운동을 하루 쉬더라도 총선 전 법안을 처리하자"는 건 정의당뿐이다. 일부 남성 정치인들이 그랬듯, '안티 페미(니스트)' 전략으로 성별 갈등을 부추겨 20대 남성 표를 끌어오겠단 얄팍한 수가 또 나타날지 모른다.
그래도 계속 말하고 외치고 설치련다. 그들의 치부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 또한 의미 있다고 믿기에. 그러다 보면 언젠가 이 견고한 아재국회 또한 바뀌리라 믿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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