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세계'에 '막장' 딱지 붙일 수 없는 결정적 이유
[TV 리뷰] 인간 군상 욕망과 부부라는 관계 이면에 집중... 개연성도 '미덕'
▲ <부부의 세계>의 한 장면 ⓒ JTBC
"여자라고 바람 피울 줄 몰라서 안 피우는 게 아냐. 다만, 부부로서 신의를 지키며 사는 게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제하는 거지. 제혁씨도 이제 이런 짓 그만하는 게 좋을 거야."
절박한 순간에도 선우(김희애)는 우아함을 잃지 않았다. 삶을 구성했던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렸지만, 선우는 휩쓸리지 않았다.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는 그 언덕에 홀로 서 있었지만,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고독의 슬픔이 똬리를 틀고 온몸을 휘감아 왔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선우는 주저하지 않았다. 머뭇거리지 않았다.
"바람은 왜 피우는 거야?"
"세상에는 두 종류의 남자가 있어. 바람을 피우는 남자와 그걸 들키는 남자, 본능을 못 이기거든."
제혁이 초대한 저녁식사 자리에 나간 선우는 남자들이 바람을 피우는 심리에 대해 물었다. 제혁은 태연하게 세상에는 바람을 피우는 남자와 그걸 들키는 남자, 두 종류의 남자만 있다고 대답했다. '(그것이 남자의) 본능'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 행위에 일말의 죄책감도 없다는 의미였다. 선우는 "본능은 남자한테만 있는 게 아니야"라고 맞받아쳤다. 그리고 선우는 호텔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혁과 하룻밤을 보낸 선우는 돌연 태도를 바꿨다. 예림(박선영)에게 이 사실을 밝히겠다며 제혁을 으르기 시작했다. 선우의 조건은 태오의 회사 법인자금 내역 및 개인 계좌 현황을 조사해서 넘기라는 것이었다. 모든 재산을 자신의 법인으로 옮겨놓은 태오를 응징하기 위해선 회계를 담당하고 있는 제혁의 협조가 필요했다. 선우로선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셈이다. 이로써 복수의 서막이 올랐다.
과연 <부부의 세계>는 막장 드라마일까?
▲ <부부의 세계>의 한 장면 ⓒ JTBC
JTBC <부부의 세계>는 파격적이다. 선우가 제혁을 협박하기 위해 잠자리를 갖는다는 설정(과 묘사)은 매우 과감하다. 선우는 주도적일 뿐더러 관계에 있어 우위를 잃지 않는다. 혹자는 선우가 다른 남자와 섹스를 했다는 이유를 들어 선우 역시 태오와 똑같은 것 아니냐고 비난하기도 한다. 선우가 (알량한) 도덕적 우위를 잃었다는 것일까. 양비론이 고개를 든다. 그러면서 <부부의 세계>를 '막장 드라마'라고 손가락질한다.
과연 <부부의 세계>는 막장 드라마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물론 <부부의 세계>는 막장드라마의 요소(불륜과 그로 인한 임신 등)를 갖고 있다. 불륜에서 복수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흐름도 새로울 게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를까? 그건 <부부의 세계>가 '불륜' 그 자체보다 그 이면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질질 끌지 않고 초반에 사건의 전말을 공개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그 남자를 만든 건 나예요. 재력, 배경, 하다못해 성격까지. 이혼으로 지난 세월 동안 쏟아부은 내 정성을 허공에 날리긴 싫어요."
"지나온 세월로 남은 시간을 용서할 수 있겠어요?"
<부부의 세계>는 불륜의 과정을 나열하는 진부한 막장 드라마의 방식을 채택하지 않고, 인간 군상들의 욕망과 부부라는 관계의 이면을 들춰내는 쪽에 집중하고 있다. 실제로 <부부의 세계>에는 여러 부부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모두 각자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제혁과 예림은 쇼윈도 부부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부부라는 관계와 사랑이라는 감정의 '본질'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얻게 된다.
가령, 최 회장 아내(서이숙)는 남편의 불륜 사실을 알고도 이를 덮는다. 물론 시원하게 따귀를 올려붙이지만 거기에서 멈춘다. 그는 "이혼으로 지난 세월 동안 쏟아부은 내 정성을 허공에 날리긴 싫"다며 불륜을 눈감고 빌딩 한 채를 받는다. 그에게 남자들의 섹스는 '배설'일 뿐이니까. 반면, 선우에게 남편과의 사랑 혹은 신뢰는 부부 생활의 근간이다. 그것이 무너지면 결혼을 유지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부부의 세계>의 미덕은 개연성
▲ <부부의 세계>의 한 장면 ⓒ JTBC
<부부의 세계>의 미덕은 개연성이다. 인물이 어떤 선택을 하는 데 있어 그리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들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선우의 선택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철석같이 믿었던 남편의 불륜과 친구들의 배신은 그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갔다. 게다가 아들 준영(전진서)이 진실을 알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선우는 결단해야만 했다. 그가 지켜야 할 것은 분명했고, 그러기 위해선 무엇이든 해야 했으니 말이다.
"내 아들, 내 집, 내 인생, 뭐가 됐든 내 거 중에 그 어떤 것도 절대 손해볼 수 없어요. 이태오, 그 자식만 내 인생에서 깨끗이 도려낼 겁니다"
이야기의 큰 줄기가 '선우는 복수에 성공할 수 있을까?'에 맞춰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가급적 가장 짜릿하고 통쾌한 복수가 되길 응원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러나 그와 함께 각각의 인물들의 사정(과 감정)도 흥미롭게 펼쳐질 것이다. <부부의 세계>는 섣불리 인물들의 선악을 판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가 태오의 내연녀인 다경(한소희)의 감정 변화를 섬세하게 짚어내고 있는 건 그래서이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건 역시 배우들의 연기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김희애를 비롯해 모든 배우들이 몰입도 넘치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극중 인물들의 복잡하고 다양한 심리가 다채롭게 표현되면서 드라마의 수준은 한층 올라갔다. 극본을 쓴 주현 작가와 연출을 맡은 모완일 PD는 <부부의 세계>가 '불륜'을 소재로 한 드라마라 할지라도 웰메이드가 될 수 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시청률 14.0%(4회, 닐슨코리아)은 결코 막장의 결과물이 아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종성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버락킴' 그리고 '너의길을가라'(https://wanderingpoet.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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