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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때문에... 세월호 추모 방식도 바뀌었다

[동행취재] 안산에서 광화문까지 '차량 추모행진' 벌인 세월호 유가족들

등록|2020.04.11 19:41 수정|2020.04.11 19:44

▲ 세월호 참사 6주기를 앞둔 1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노량차량행진에 참가 차량들이 깃발과 피켓을 차량에 부착하고 행진에 참가하고 있다. ⓒ 이희훈

▲ 세월호 참사 6주기를 앞둔 1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노량차량행진에 참가 차량들이 깃발과 피켓을 차량에 부착하고 행진에 참가하고 있다. ⓒ 이희훈

▲ 세월호 참사 6주기를 앞둔 1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노량차량행진에 참가 차량들이 깃발과 피켓을 차량에 부착하고 행진에 참가하고 있다. ⓒ 이희훈

▲ 세월호 참사 6주기를 앞둔 1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노량차량행진에 참가 차량들이 깃발과 피켓을 차량에 부착하고 행진에 참가하고 있다. ⓒ 이희훈

"국회쯤이야 이제는 눈 감고도 가죠."

윤경희씨(44)는 장담하듯 말하면서 핸들을 꺾었다. 2014년 4월 16일 이전까지는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는 올 일이 전혀 없었던 그다. 세월호 참사는 윤씨를 국회나 청와대에 수시로 들락거리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제가 안산에서 태어나서 안산에서만 살았거든요. 안산 토박이예요. 전라도 자체도 (팽목항에 갈 때) 처음 가봤어요. 그런데 2014년에 유가족들이 국회에서 노숙했잖아요. 그 이후로 국회에는 수없이 왔죠. 청와대나 국회는 이제 네비(지도) 없이도 와요."

윤경희씨는 2014년 당시 경기 안산 단원고 2학년 3반 김시연 학생의 어머니다. 그가 세월호 참사 6주기 전 주말을 맞아 안산에서 청와대로 향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 일반 시민들 차량 100여 대와 함께였다. 윤경희씨의 차에 동승해 세월호 6주기를 맞는 심정과 이야기를 들었다.

코로나 때문에... 바뀐 세월호 추모 방식
 

▲ 세월호 참사 6주기를 앞둔 11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노량차량행진에 참가 차량들이 깃발과 피켓을 차량에 부착하고 광장 둘레를 돌며 행진에 참가하고 있다. ⓒ 이희훈

▲ 세월호 참사 6주기를 앞둔 11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노량차량행진에 참가 차량들이 깃발과 피켓을 차량에 부착하고 광장 둘레를 돌며 행진에 참가하고 있다. ⓒ 이희훈

▲ 세월호 참사 6주기를 앞둔 11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노량차량행진에 참가 차량들이 깃발과 피켓을 차량에 부착하고 광장 둘레를 돌며 행진에 참가하고 있다. ⓒ 이희훈

▲ 세월호 참사 6주기를 앞둔 11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노량차량행진에 참가 차량들이 깃발과 피켓을 차량에 부착하고 광장 둘레를 돌며 행진에 참가하고 있다. ⓒ 이희훈

▲ 세월호 참사 6주기를 앞둔 11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노량차량행진에 참가 차량들이 깃발과 피켓을 차량에 부착하고 광장 둘레를 돌며 행진에 참가하고 있다. ⓒ 이희훈

4월이 되고 세월호 참사 6주기는 다가오는데 코로나19 확진자가 점점 늘어나자 유가족들은 고민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정부에서 정한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에 사람들이 대면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시민들이 각자의 차를 갖고 안산 화랑유원지에 모여 국회 또는 검찰청을 경유해 광화문까지 가는 계획을 세웠다. '비대면 방식의 행진'이다.

대신 유가족들은 차에 세월호 참사를 상징하는 노란색 깃발을 세우고 차량 보닛과 차량 옆문에 피켓을 붙여 일반 시민들에게 세월호 참사 6주기를 알리기로 했다.

11일 오후 12시 30분이 되면서 시민들이 탄 차들이 속속 화랑유원지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차에 탄 사람들은 전원 자원봉사자들의 발열 체크를 거친 뒤에 화랑유원지 주차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운전해서 화랑유원지까지 온 유가족들도 모두 발열 체크를 마치고 화랑유원지 주차장에 들어섰다.

일반 시민들이 탄 차량 약 100대가 안산에서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 출발했다. 가족 단위로 용인시에서 노란차량행진에 참석하기 위해 온 김유라(50)씨는 "코로나19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지만 이번 행진에 참여하기로 했다. 다시금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온 가족들이 참여했다"라고 밝혔다.

김유라씨(50)의 아들 최시환씨(13)는 "안산까지 오면서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 이름을 모두 불러주는 노래를 들었는데 희생자들이 너무 많았다"고 소감을 말했다.

1시가 되자 차들이 차례로 화랑유원지를 벗어나 여의도 국회 혹은 서초동 검찰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윤씨를 비롯한 유가족들은 국회를 거쳐서 광화문으로 가기로 했다. 하지만 일렬로 나란히 차를 운전해 일사불란하게 광화문까지 가려던 생각은 출발하면서부터 모두 깨졌다. 도로 교통 상황이 그리 녹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간에 차선을 바꾸지 못해 이탈하는 차들도 속속 생겼다. 대신 200명이 넘게 들어가 있는 텔레그램 '노란차량행진 소통방'에서 시민들은 계속 자신의 차량 상황을 알렸다. 동시에 각자 자신의 사진을 올리고 "세월호 참사를 잊지 말자"는 등 6주기를 맞이하는 소감을 적었다.

"원래 서울시랑 항상 광화문에서 세월호 참사 전주 토요일에 추모제를 했거든요. 그런데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못 하게 됐어요. 4월은 원래 정신없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모임을 할 때인데 들어온 행사마저 취소하고 있어요. 그래도 뭔가 해야 하잖아요. 시민들과 함께 세월호 참사를 추모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노란차량행진을 하게 됐습니다." 

딸에게 받은 마지막 생일선물은 '속옷'
 

▲ 세월호 참사 6주기를 앞둔 11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노량차량행진에 참가 차량들이 깃발과 피켓을 차량에 부착하고 광장 둘레를 돌며 행진에 참가하고 있다. ⓒ 이희훈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은 4월만 되면 바빠진다. 이날 안산에서 광화문까지 3시간 좀 넘게 윤씨의 차를 타고 가는 동안에 그의 전화는 쉴 새 없이 울렸다. 어느 지역에 와서 발언을 해줄 수 없겠느냐는 제안 등이 오갔다. 차는 종종 막혔고 인터뷰는 자주 걸려오는 전화에 의해 끊겼다.

윤경희씨를 비롯한 세월호 유가족들은 이날 안산에서 광화문까지 차를 운전해서 갔다가 바로 안산으로 온다. 그리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12일 오전 2시가 되면 목포로 출발한다. 목포에 도착해서 아침을 먹고 배를 타고 세월호 사고 해역으로 나간다.

윤경희씨의 생일은 4월 12일이다. 그는 생일의 절반을 서울에서 목포를 오가는 데 쓸 계획이다.

"우리 식구들이 생일 챙기는 걸 너무 좋아해요. 시연이가 수학여행을 (4월) 15일에 갔으니까 가기 바로 3일 전이 제 생일이었어요. 그날 속옷을 사서 오더라고요. 엄마도 속옷을 예쁘게 위아래 세트로 입었으면 좋겠다고요. 왜 세트로 입지 않냐고 뭐라고 하면서요. 속옷 한 벌하고 스카프를 사서 생일 선물로 줬거든요. 그래서 생일이 되면 그 속옷을 꺼내입어요. 생일에만 입어요. 혹시 (속옷이) 닳을까 봐요."

- 올해는 가족들이 생일을 챙겨주시나요?
"이따가 저녁 때 노란차량행진 끝나고 집에 가면 작은애가 준비해놓고 있을 거예요. 방금 미역국 끓인다고 카톡이 왔네요. 매년 생일이 되면 마지막으로 시연이랑 같이 밥 먹었던 기억이 많이 나요. 시연이가 자기 친구들에게도 제 엄마 생일이라고 말해서 시연이 친구들이 생일 문자도 보내주고 그러거든요. 시연이 친구들이랑 제가 워낙 친해요. 애들이 저더러 '이모'라면서 아직도 문자를 보내줘요."

- 바쁘셔서 총선 투표에 참여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요.
"투표는 어제(10일) 미리 했어요. 작은딸이 생애 처음으로 투표하는 날이었거든요. 같이 가서 했어요. 그런데 투표 끝나자마자 다른 일정을 소화하느라 집에는 저녁 늦게 들어왔어요. 저희가 보이지 않게 하는 일이 되게 많거든요. 코로나19 때문에 관련 활동을 못 하니까 안산 시민들에게 마스크 3000장을 나눠주자고 해서 가족들끼리 모여서 마스크 포장을 했어요. 4월 16일 아침 7시 30분부터 8시 30분까지 출근길에 안산에 있는 역에서 마스크를 나눠줄 계획이에요."

그가 보조석에 있던 마스크를 기자에게 건네주었다. 남색 천 마스크에는 노란색 실로 리본 모양과 함께 'Remember 0416'(리멤버 0416)라고 수놓아져 있었다.

- 4·16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에서 '막말'로 물의를 빚은 차명진 미래통합당 후보에 대해서 사과를 요구하셨잖아요.
"그가 말한 게 사실도 아닐 뿐더러 '일베들'이 떠드는 소리를 국회의원 후보자가 이야기한다는 게 말도 안 되죠. 미래통합당이 처음에는 제명을 시킨다고 했다가 하루만에 번복한 것도 나쁘고요. 그런데 문제는 세월호 유가족이 연예인도 아니고 공인도 아닌데 이런 일이 생기면 싸잡아서 욕을 먹어요.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고요. 제일 화가 나는 건, 우리는 진상규명한다고 사회생활을 하지 않고 있지만 남아있는 형제·자매들과 생존자들은 사회생활하고 있거든요. 슬퍼도 뭐라고 못하고 돌덩어리를 하나씩 마음 속에 품고 있어요. 저는 이 말이 부모들만이 아니라 형제·자매들에게 상처를 준다고 생각해요. 가족협의회에서 같이 논의해 대응하고 있어요."

"실감 나지 않아요. 6년이라는 시간이"
 

▲ 세월호 참사 6주기를 앞둔 11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노량차량행진에 참가 차량들이 깃발과 피켓을 차량에 부착하고 광장 둘레를 돌며 행진에 참가하고 있다. ⓒ 이희훈

▲ 세월호 참사 6주기를 앞둔 11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노량차량행진에 참가 차량들이 깃발과 피켓을 차량에 부착하고 광장 둘레를 돌며 행진에 참가하고 있다. ⓒ 이희훈

▲ 세월호 참사 6주기를 앞둔 11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노량차량행진에 참가 차량들이 깃발과 피켓을 차량에 부착하고 광장 둘레를 돌며 행진에 참가하고 있다. ⓒ 이희훈

노란차량행진은 차가 없는 사람도 참여할 수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여의도 국회에서부터 광화문까지 따라온 시민들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노란차량행진의 도착 지점인 광화문에 들어서자 시민들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준수하면서 각자 간격을 넓혀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광화문 광장을 빙 둘러싸고 마스크를 쓰고 피켓을 들고 있던 시민들은 차들을 보면서 인사를 하고 손을 흔들었다. 윤씨는 차 창문 밖의 한 시민을 보고 반갑게 웃으면서 인사를 했다. 윤씨는 그를 두고 2014년부터 꾸준하게 노란리본공작소에 계셨던 분이라고 소개했다. 그가 윤씨에게 "안산에서 몇 시에 출발했냐"고 물었다.

"생각보다 빨리 오더라고요. 국회까지 별로 차가 안 막혔어요. 그런데 고속도로 들어가니까 다른 차가 많아서 차를 움직일 수가 없더라고요. 몇 시부터 서 계셨어요?"

그는 손사래 치면서 한 시간 전에 왔다고 말했다. 초록 불로 바뀌어 윤씨는 그와 인사를 하고 기어를 옮겼다.

"저는 아직 실감이 안 나거든요. 6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지났다는 것이요. 여전히 아이들에게 미안해요. 이렇게 오래 갈 줄 몰랐거든요. 그럼에도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엄마가 열심히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 세월호 참사 6주기를 앞둔 11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노량차량행진에 참가 차량들이 깃발과 피켓을 차량에 부착하고 광장 둘레를 돌며 행진에 참가하고 있다. ⓒ 이희훈

▲ 세월호 참사 6주기를 앞둔 11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노량차량행진에 참가 차량들이 깃발과 피켓을 차량에 부착하고 광장 둘레를 돌며 행진에 참가하고 있다. ⓒ 이희훈

▲ 세월호 참사 6주기를 앞둔 11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노량차량행진에 참가 차량들이 깃발과 피켓을 차량에 부착하고 광장 둘레를 돌며 행진에 참가하고 있다. ⓒ 이희훈

청와대는 노란차량행진의 진입을 막아섰다. 청와대까지 갈 수 없었던 이들은 대신 광화문 광장을 빙글빙글 돌다가 4월 16일을 상징하는 4시 16분이 되자 5초 동안 경적을 울렸다. 그리고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노래를 불렀다.

마땅히 주차해서 이야기를 나눌만한 공간도 없었기에 노란차량행진에 참석한 사람들은 서로 인사를 나눌 새도 없었다. 이들은 텔레그램방을 통해 "고생하셨습니다"라고 인사를 나눈 이후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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