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교민신문 '신한민보'의 보도
[김삼웅의 '한글운동의 선구자 한힌샘 주시경선생' / 48회] "침침한 국어계에 그 누가 다시 횃불을 들리요"
▲ 주시경(1876-1914) ⓒ 독립기념관
아무나 쉽게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그만큼 외롭고 고독한 외길이었다. 종(從)으로 500년에 닿고 횡(橫)으로 5.000년을 내다보는 역사의 길, 문명화의 길이기도 하였다.
사망 5일 뒤인 7월 31일 상동예배당에서 조촐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유족ㆍ종교인ㆍ교육가ㆍ학생 등 300여 명이 참례한 가운데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수색리 고택골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매일신보』가 1914년 7월 29일자에 한글 학자 주시경 선생의 부고 기사를 한문으로 상세히 보도하고, 미국 교민들이 발행하는 『신한민보』가 9월 3일자에 한글로 '내지신문 번등(翻謄)' 이라 밝히면서 이를 보도하였다.
▲ 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동의 세종대왕기념관에서 찍은 주시경 묘비. ⓒ 김종성
'내지'는 한국, '번등'이란 다른 글로 옮겨 베낀다는 뜻이다. 『내일신문』기자는 상가를 찾아 부인을 만나고 생전에 고인과 인연이 깊은 인사들을 찾아 의견을 듣고 기사를 쓴 것 같다. 다음은 『신한민보』의 기사 전문이다.
국어패왕 장서(國語覇王長逝)
한국 국어계에 패왕되는 주시경 씨는 7월 27일에 경성 서부 자택에서 허약증으로 세상을 떠나니 아아 - 국어연구계의 큰 불행이로다. 이 흉보를 듣고 그 자택으로 찾아가니 온 집안에 기색이 참담하며 학생 사오 인이 대청하여 장례를 준비하기에 심히 분망하고 미망인과 그 끼친 자녀는 눈물을 머금고 송종(送終)ㆍ염구(殮具)를 바느질하니 가히 씨의 평일 빈궁한 학자의 생활을 추측하여 알겠더라. 학생의 소개를 얻어 미망인에게 조상(弔喪)하는 뜻을 말씀하니 부인은 눈물이 얼굴에 가득하여 가로되,
"가부(家父)의 덧없이 세상을 떠남은 전혀 평일 교육에 분주하여 그 담부(擔負)가 자못 무거우나 일신의 괴로움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잠시도 쉬이지 않은 결과로 수년 이래에 신체가 허약하더니 필경 백약이 무효하여 다시 일어나지 못함이라." 하고 목이 메여 능히 말을 못하더니 다시 눈물을 씻으며 왈,
"항상 상오 7시경에 집에 돌아와서는 다시 국어와 및 다른 학술연구로 밤이 늦도록 책상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가 그 이튿날 의연히 각 학교에 교수하러 가더이다."
일찍이 들으니 씨의 집 건너편에 일인의 공창(工廠)이 있는데 매일 밤 열두시에 역사(役事)를 피하고 씨는 그 후에 비로소 침실에 나아가니 밤 열두시 후에 쉬이는 것을 가히 알지라, 그런고로 씨의 고심을 슬퍼하는 사람들이 간절히 그 몸을 보중함을 권하니 씨가 추연히 옷깃을 여미고 두눈에 눈물이 핑돌며 가로되,
"저 사람의 세력을 벗어나고저 하는 우리가 어쩌 저 사람보다 먼저 쉬이리오." 하더라.
자녀는 오남매가 있는데 맏딸은 숙명여학교를 졸업하고 그밖에 사남매는 모두 어린아이라. 씨가 평일 약소한 수입으로 겨우 처자를 살린 외에 저축함이 없는 고로 한번 눈을 감은 후에 소조(蕭條)한 책상자 속에 끼친 바 긴 물건이 없으니 차호(嗟乎)로다. 누가 그 유족을 구호할꼬. 건넌방에 근심없이 누웠는 주씨는 어찌하여 자기의 일생 대업을 완전히 성취하지 못하고 이같이 가족의 비운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황천의 먼길로 향하였는지 보는 자로 하여금 한 웅큼 동정의 눈물을 금치 못할러라.
다시 씨로 더불어 평소에 교분이 두텁던 휘문(徽文) 의숙장(義塾長)을 찾아가니 씨가 한참 맥맥히 말이 없다가 창연히 가로되,
"이제 돌연히 저를 구천에 영별하니 통석하는 점은 형언하기 어렵소, 저의 천성은 온후평화하며 연구하는 힘이 굳세고 특히 저는 수십년 전부터 그 일신을 국어연구계에 바쳐 오늘까지 이르도록 오랜 세월에 잠시도 그 뜻을 변치 않고 시종이 여일하여 조리없고 규칙없는 한국국어로 하여금 그 숨은 빛을 발하였고 또 저는 가난함을 잘 견디기에 사소한 수입으로 다솔(多率)이 지내여 가나 털끝만치도 궁곤한 빛을 나타내이지 아니하며 남의 환난절고에는 먼저 나서서 구조하며 남을 교접하는 성질은 혼연한 일단춘풍이라.
그 실증을 말하건대 금일 각 학교에 있는 저의 제자가 수천인에 달하나 거개 저를 부형(父兄)같이 양모하여 한 사람도 공경치 않는 자가 없는 것을 보면 가히 알지니 생각건대 저의 두 눈은 그 속이 환하게 넓어서 아무것도 가려운 것이 없고 다만 평생에 이상과 희망은 전혀 일반 청년의 앞길을 열어 주며 국어의 쇠운을 힘껏 잡아 돌림에 있어,
자못 이에 먹는 것도 잊고 자는 것도 폐지하여 애를 썼으며 수다한 학교를 순회 교수하니 한 주일 동안 교수 시간표는 학생의 수업시간보다 더 많았으나 하루라도 빠져 본 일이 없으며 왕래에는 결코 인력거나 말을 타지 아니하였고, 바람, 비, 눈을 무릅쓰며 큼직한 책보퉁이를 끼고 다님으로 학계에서 주보퉁이란 별명까지 있더라.
슬프다. 황천이 일찍이 어진 사람을 부르사 씨가 삼십구세에 두 손을 뿌리치고 티끌 세상을 떠나니 침침한 국어계에 그 누가 다시 횃불을 들리요." (주석 4)
주석
4> 『주시경 학보』 제1집, 273~274쪽, 재인용.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한글운동의 선구자 한힌샘 주시경선생‘]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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