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협치같은 소리 말고 독재세력 청산하라
[주장] 21대 국회는 과거사법 제정해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잔재 일소하라
집단학살과 인권유린은 필자가 우리 현대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이승만은 한국전쟁 전후 자국민을 상대로 무차별적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박정희는 수많은 국민을 빨갱이나 간첩으로 조작해 인권을 유린하고 인생을 파괴했다. 1979년 12·12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은 이승만의 민간인학살과 박정희의 인권유린을 둘 다 완성한 진정한 독재자의 후예였다.
이어서 21세기에 등장한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이승만을 '국부'로 받들고, 박정희를 '민족중흥의 영웅'으로 숭상했고, 전두환은 '과단성 있는 지도자'로 추켜세웠다.
[이승만] 왕조 시대 왕처럼
해방 후 제헌국회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을 살상·박해한 자 등을 처벌하는 목적으로 진실화해위원회(아래 진실위)의 원조격인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설치했다. 그러나 반민특위가 청산하고자 했던 친일파들이 오히려 이승만의 지지로 반민특위를 청산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해방 후 친일경찰을 대거 기용했던 이승만의 방해로 반민특위는 결국 1949년 6월 강제해산 당했다. 이승만의 비호를 받은 친일경찰들은 반민특위를 습격해 친일증거문서를 태우고 독립운동가들을 오히려 빨갱이로 몰아 감옥에 넣어서 고문하거나 학살했다.
이승만 정권의 탄압에 살아남은 독립운동가들은 김원봉처럼 월북을 하거나 김구나 여운형처럼 남한 사회에서 철저히 제거되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친일정권으로부터 계속 핍박을 받으며 빈곤에 허덕였다. 반면 친일파 후손들은 권력을 쥐고 호의호식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을 비참하게 말려 죽였다.
세종의 큰형 양녕대군의 후손이었던 이승만이 대한민국 '박사 1호'로 초대 대통령이 된 것은 어떻게 보면 해방 후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큰 불행의 시작이었다. 이른바 왕족 이승만의 의식 속에 대한민국은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조상이 다스리던 조선 왕조의 연장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이승만에게 국민은 결코 나라의 주인이 아니었고 조선 시대 왕의 명을 따르고 무조건 복종하는 한 줌 백성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이승만은 한국전쟁 전후 적게는 수십 만 명에서 많게는 약 백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고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한국전쟁 초기 '서울을 사수한다'라고 대국민사기극을 벌이며 한강 다리를 끊고 도망갔던 이승만은 9.28 서울 수복 후 자신의 말을 믿고 서울에 잔류했던 국민에게 사죄하기는커녕 오히려 '부역자'로 처벌하고 학살하고도 이를 당연하게 여겼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도 소개된 보도연맹사건은 6.25전쟁 전후 우리나라 군·경찰·극우조직이 자국민인 보도연맹원과 양심수 등 몇 십만 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1990년대 말 전국에서 보도연맹원 학살 피해자들의 유골이 발굴되면서 보도연맹사건의 실제가 확인됐다. 그리고 2008년 필자가 몸담았던 노무현정부 진실위는 국가기관으로는 처음으로 민간인이 학살되었다는 것을 공식으로 확인했다.
필자의 한 지인도 자신의 할아버지가 6.25 전쟁 중 국군에게 학살당한 것을 이때 처음 알았다고 눈물을 흘리며 알려왔다. 그 지인의 아버지는 평생 그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려고 반세기가 넘도록 딸에게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진실위 진실 규명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딸에게 눈물을 쏟으며 '가문의 비밀'을 털어놓은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 우리나라의 수구언론은 이승만을 일컬어 '국부' 또는 '거대한 생애'로 칭송하고 있다.
[박정희] 남의 인생을 소모품처럼
박정희도 마찬가지였다. 군에서 평생을 몸담은 장군 출신인 그에게 민주주의는 생소한 개념이었고 민주공화국의 국민은 나라의 주인이 아니라 군대의 사병에 불과했다. 말 잘 안 듣는 국민은 그에게 군기 빠진 졸병 정도로 보였을 것이다. 장군이 명령하는데 감히 '제 생각은 다른데요' 라고 이의를 제기하는 야당이나 국민은 명령 불복종 죄로 처벌해야 할 대상이었을 뿐이다.
박정희는 장군인 자신을 위해서 희생양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을 간첩으로 조작해 사형을 시키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1973년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가 중앙정보부(아래 중정)에서 참혹하게 맞아죽은 사건은 박정희가 얼마나 인권감수성이 둔감한지 보여주는 비극적인 예다. 당시 최종길 교수의 동생 최종선은 '끗발' 좋은 중정 감찰실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종길 교수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최종선이나 최 교수의 서울법대 지인 또는 가족도 박정희 정권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당시 최종선은 절규했다.
박정희는 자신의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세력과 국민을 겁주려는 공포의 수단으로 수많은 간첩사건을 조작했다. 박정희에게 수많은 간첩조작 사건은 야당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많은 국민을 제압하기 위한 군사작전과도 같았다. 그래서 중정요원을 동생으로 둔 서울법대 교수도 박정희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한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는 정권의 위기가 올 때마다 공안정국이 필요할 때마다 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어부나 모국을 찾아온 순진한 재일동포를 간첩으로 조작해 고문하고 인생을 파괴했다. 박정희에게 그들의 인생은 마치 적과 싸우는데 필요한 총알과 같은 소모품에 불과했다.
이러한 박정희의 간첩조작 사건은 이명박 정권 들어서도 재현되었다. 이명박 정부 당시 진실위 직원들이 납북귀환어부사건과 재일동포간첩사건을 조사했던 이야기를 하던 중 "이제는 탈북자를 가장해 간첩으로 침투했다고 하는 것만 남았다"고 농담한 적이 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씨가 탈북자를 가장해 침투한 간첩이라는 발표를 듣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나중에 국정원이 조작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것은 이명박의 세계관이 박정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반영하는 일례라 할 수 있다.
1975년 박정희 정권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은 장준하 사건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축약해서 보여준다. 1974년 4월 반 유신운동의 지도자격인 장준하는 박정희가 선포한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구속되고 15년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당시 장준하는 감옥에서 이런 탄식을 한다.
지병으로 1974년 12월 석방된 장준하는 1975년 8월 20일 제2의 100만인 개헌서명운동이라는 거사를 추진하던 중 거사예정일을 불과 3일 앞둔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주검으로 발견된다.
필자가 몸담았던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장준하 사건을 조사했다. 하지만 심증과 상황 증거만 있고 물증이 없는 상태에서 지난 2004년 의문사위는 장준하 사건에 대해 진상규명 불능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기무사의 비협조와 국정원이 814쪽에 달하는 장준하 사건 관련 추가존안자료를 은폐하고 있다가 의문사위 조사활동종료를 한 달 앞둔 2004년 5월 1일에 이르러서야 의문사위에 제출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국정원이 제출한 추가존안자료와 관련조사가 의문사위 조사기간 만료로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다.
[전두환] 국민 보기를 졸병처럼
전두환은 1979년 12.12쿠데타와 1980년 광주학살로 피를 묻히고 집권했다. 그는 선배 박정희보다 한층 더 잔인하고 첨예하게 준비된 독재자였다.
전두환은 광주학살을 '작전상' 필요한 '통치행위'로 보았기에 광주시민들에게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비판하는 조비오 신부를 오히려 악마라고 비난한다. 하기야 민간인 백만 명을 학살한 이승만이 '국부'로 추앙받는 대한민국에서 겨우 민간인 몇 백 명(혹은 몇 천 명)을 학살한 '난세의 지도자'인 자신을 왜 졸병에 불과한 '우매한 국민들'이 비난하는지 전두환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군기빠진 사병을 군기교육대에 보내듯이 군기빠진 국민(졸병)을 삼청교육대에 보내는 것은 전두환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광주학살, 삼청교육대뿐 아니라 '녹화사업'으로 정의감 있고 똑똑한 대학생들의 목숨을 앗아갔고 이들의 인간성을 파괴했다. 녹화사업은 '붉게 물들어' 사상이 불온하다고 판단한 대학생들을 강제 징집해 특별교육으로 푸르게 변화시킨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1981년에서 1983년 사이 이 녹화사업으로 유시민 노무현재단이사장을 포함해 대학생 5천 명이 강제징집 되었고 그 중에서 6명의 젊은이들이 군대에서 목숨을 잃었다.
가해자들 끝까지 찾아서 처벌해야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해방 후 우리 현대사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에 의해 민간인학살과 인권유린으로 점철된 야만의 시대, 광기의 시대였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죄 없는 사람들이 생명을 잃고 가정이 파괴되었고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겼다. 그들과 그 후손들은 얼마나 억울하고, 서럽고, 고통스러웠고, 무서웠을까.
오늘 우리는 그때 수많은 누군가의 말 못할 희생으로 민주주의와 언론자유를 만끽하면서 지금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에게는 그 분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기록할 최소한의 의무가 있다. 그러나 지금도 집단학살과 인권유린의 가해자는 떵떵거리고 잘 살고 여전히 피해자는 고통 속에서 생존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당시 학살 사건과 인권유린 사건의 지휘관, 수사관, 책임자, 공안검사, 판사 등을 조사하고 그들의 실명을 밝혀야 한다. 또한 반인륜 범죄는 공소시효를 없애고 가해자들을 끝까지 찾아서 처벌해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바로 선다.
이제라도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고 일벌백계 하여 다음 세대에 부끄럽지 않은 미래를 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아직도 '박정희 정신을 배우자', '그 시절이 좋았다'라는 자들이 통합당 대표를 맡았고 국회의원을 하고 있다. 악의적 공권력을 행사하고도 대우받는 사회는 과거를 잊은 사회로 언제나 재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과거의 국가범죄가 철저하게 청산되어야 미래가 있다. 가해자의 재산을 몰수하고 희생자나 그 유가족이 그나마 경제적인 어려움이라도 없게 국가가 충분히 배상해야 한다.
이번 4.15 총선 결과를 놓고 여당인 민주당은 깊이 성찰해야 한다. 지난 노무현 정부 시절 열린우리당이 왜 망했나? 협치니 대연정이니 하며 야당인 한나라당과 시간만 끌다가 결국 정권을 내준 것이다. 그리고 불과 1년 후 그들은 노무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이번 21대 국회에서 여당인 민주당은 반드시 과거사법과 반인륜범죄처벌법을 제정하고, 사법개혁과 언론개혁 등을 과감하게 밀고나가야 한다. 그렇게 하라고 국민들이 180석이나 밀어준 것을 꼭 명심하길 바란다. 역사는 반드시 반복된다.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는 나라의 미래는 없다.
이승만은 한국전쟁 전후 자국민을 상대로 무차별적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박정희는 수많은 국민을 빨갱이나 간첩으로 조작해 인권을 유린하고 인생을 파괴했다. 1979년 12·12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은 이승만의 민간인학살과 박정희의 인권유린을 둘 다 완성한 진정한 독재자의 후예였다.
[이승만] 왕조 시대 왕처럼
▲ 제헌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1948. 7. 20.) ⓒ 눈빛출판사
해방 후 제헌국회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을 살상·박해한 자 등을 처벌하는 목적으로 진실화해위원회(아래 진실위)의 원조격인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설치했다. 그러나 반민특위가 청산하고자 했던 친일파들이 오히려 이승만의 지지로 반민특위를 청산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해방 후 친일경찰을 대거 기용했던 이승만의 방해로 반민특위는 결국 1949년 6월 강제해산 당했다. 이승만의 비호를 받은 친일경찰들은 반민특위를 습격해 친일증거문서를 태우고 독립운동가들을 오히려 빨갱이로 몰아 감옥에 넣어서 고문하거나 학살했다.
이승만 정권의 탄압에 살아남은 독립운동가들은 김원봉처럼 월북을 하거나 김구나 여운형처럼 남한 사회에서 철저히 제거되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친일정권으로부터 계속 핍박을 받으며 빈곤에 허덕였다. 반면 친일파 후손들은 권력을 쥐고 호의호식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을 비참하게 말려 죽였다.
세종의 큰형 양녕대군의 후손이었던 이승만이 대한민국 '박사 1호'로 초대 대통령이 된 것은 어떻게 보면 해방 후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큰 불행의 시작이었다. 이른바 왕족 이승만의 의식 속에 대한민국은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조상이 다스리던 조선 왕조의 연장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이승만에게 국민은 결코 나라의 주인이 아니었고 조선 시대 왕의 명을 따르고 무조건 복종하는 한 줌 백성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이승만은 한국전쟁 전후 적게는 수십 만 명에서 많게는 약 백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고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한국전쟁 초기 '서울을 사수한다'라고 대국민사기극을 벌이며 한강 다리를 끊고 도망갔던 이승만은 9.28 서울 수복 후 자신의 말을 믿고 서울에 잔류했던 국민에게 사죄하기는커녕 오히려 '부역자'로 처벌하고 학살하고도 이를 당연하게 여겼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도 소개된 보도연맹사건은 6.25전쟁 전후 우리나라 군·경찰·극우조직이 자국민인 보도연맹원과 양심수 등 몇 십만 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1990년대 말 전국에서 보도연맹원 학살 피해자들의 유골이 발굴되면서 보도연맹사건의 실제가 확인됐다. 그리고 2008년 필자가 몸담았던 노무현정부 진실위는 국가기관으로는 처음으로 민간인이 학살되었다는 것을 공식으로 확인했다.
필자의 한 지인도 자신의 할아버지가 6.25 전쟁 중 국군에게 학살당한 것을 이때 처음 알았다고 눈물을 흘리며 알려왔다. 그 지인의 아버지는 평생 그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려고 반세기가 넘도록 딸에게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진실위 진실 규명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딸에게 눈물을 쏟으며 '가문의 비밀'을 털어놓은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 우리나라의 수구언론은 이승만을 일컬어 '국부' 또는 '거대한 생애'로 칭송하고 있다.
[박정희] 남의 인생을 소모품처럼
▲ 전역사를 낭독하는 박정희 대장(1963. 8. 30.). ⓒ 자료사진
박정희도 마찬가지였다. 군에서 평생을 몸담은 장군 출신인 그에게 민주주의는 생소한 개념이었고 민주공화국의 국민은 나라의 주인이 아니라 군대의 사병에 불과했다. 말 잘 안 듣는 국민은 그에게 군기 빠진 졸병 정도로 보였을 것이다. 장군이 명령하는데 감히 '제 생각은 다른데요' 라고 이의를 제기하는 야당이나 국민은 명령 불복종 죄로 처벌해야 할 대상이었을 뿐이다.
박정희는 장군인 자신을 위해서 희생양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을 간첩으로 조작해 사형을 시키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1973년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가 중앙정보부(아래 중정)에서 참혹하게 맞아죽은 사건은 박정희가 얼마나 인권감수성이 둔감한지 보여주는 비극적인 예다. 당시 최종길 교수의 동생 최종선은 '끗발' 좋은 중정 감찰실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종길 교수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최종선이나 최 교수의 서울법대 지인 또는 가족도 박정희 정권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당시 최종선은 절규했다.
"저명한 교수의 현실이, 정보부원의 현실이 이 정도인데 하물며 평범한 시민의 경우에서이랴!"
박정희는 자신의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세력과 국민을 겁주려는 공포의 수단으로 수많은 간첩사건을 조작했다. 박정희에게 수많은 간첩조작 사건은 야당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많은 국민을 제압하기 위한 군사작전과도 같았다. 그래서 중정요원을 동생으로 둔 서울법대 교수도 박정희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한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는 정권의 위기가 올 때마다 공안정국이 필요할 때마다 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어부나 모국을 찾아온 순진한 재일동포를 간첩으로 조작해 고문하고 인생을 파괴했다. 박정희에게 그들의 인생은 마치 적과 싸우는데 필요한 총알과 같은 소모품에 불과했다.
이러한 박정희의 간첩조작 사건은 이명박 정권 들어서도 재현되었다. 이명박 정부 당시 진실위 직원들이 납북귀환어부사건과 재일동포간첩사건을 조사했던 이야기를 하던 중 "이제는 탈북자를 가장해 간첩으로 침투했다고 하는 것만 남았다"고 농담한 적이 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씨가 탈북자를 가장해 침투한 간첩이라는 발표를 듣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나중에 국정원이 조작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것은 이명박의 세계관이 박정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반영하는 일례라 할 수 있다.
1975년 박정희 정권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은 장준하 사건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축약해서 보여준다. 1974년 4월 반 유신운동의 지도자격인 장준하는 박정희가 선포한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구속되고 15년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당시 장준하는 감옥에서 이런 탄식을 한다.
"나라는 독립했다는데 독립운동 한 백범은 암살당하고, 광복군장교 출신인 나는 감옥에 있고, 일본군장교 출신 박정희는 대통령을 하고 있다."
지병으로 1974년 12월 석방된 장준하는 1975년 8월 20일 제2의 100만인 개헌서명운동이라는 거사를 추진하던 중 거사예정일을 불과 3일 앞둔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주검으로 발견된다.
필자가 몸담았던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장준하 사건을 조사했다. 하지만 심증과 상황 증거만 있고 물증이 없는 상태에서 지난 2004년 의문사위는 장준하 사건에 대해 진상규명 불능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기무사의 비협조와 국정원이 814쪽에 달하는 장준하 사건 관련 추가존안자료를 은폐하고 있다가 의문사위 조사활동종료를 한 달 앞둔 2004년 5월 1일에 이르러서야 의문사위에 제출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국정원이 제출한 추가존안자료와 관련조사가 의문사위 조사기간 만료로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다.
[전두환] 국민 보기를 졸병처럼
▲ 최규하 대통령이 국보위 상임위원장 전두환에게 육군대장 계급장을 달아준 뒤 악수하고 있다(1980. 8.). ⓒ 국가기록원
전두환은 1979년 12.12쿠데타와 1980년 광주학살로 피를 묻히고 집권했다. 그는 선배 박정희보다 한층 더 잔인하고 첨예하게 준비된 독재자였다.
전두환은 광주학살을 '작전상' 필요한 '통치행위'로 보았기에 광주시민들에게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비판하는 조비오 신부를 오히려 악마라고 비난한다. 하기야 민간인 백만 명을 학살한 이승만이 '국부'로 추앙받는 대한민국에서 겨우 민간인 몇 백 명(혹은 몇 천 명)을 학살한 '난세의 지도자'인 자신을 왜 졸병에 불과한 '우매한 국민들'이 비난하는지 전두환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군기빠진 사병을 군기교육대에 보내듯이 군기빠진 국민(졸병)을 삼청교육대에 보내는 것은 전두환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광주학살, 삼청교육대뿐 아니라 '녹화사업'으로 정의감 있고 똑똑한 대학생들의 목숨을 앗아갔고 이들의 인간성을 파괴했다. 녹화사업은 '붉게 물들어' 사상이 불온하다고 판단한 대학생들을 강제 징집해 특별교육으로 푸르게 변화시킨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1981년에서 1983년 사이 이 녹화사업으로 유시민 노무현재단이사장을 포함해 대학생 5천 명이 강제징집 되었고 그 중에서 6명의 젊은이들이 군대에서 목숨을 잃었다.
가해자들 끝까지 찾아서 처벌해야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해방 후 우리 현대사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에 의해 민간인학살과 인권유린으로 점철된 야만의 시대, 광기의 시대였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죄 없는 사람들이 생명을 잃고 가정이 파괴되었고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겼다. 그들과 그 후손들은 얼마나 억울하고, 서럽고, 고통스러웠고, 무서웠을까.
오늘 우리는 그때 수많은 누군가의 말 못할 희생으로 민주주의와 언론자유를 만끽하면서 지금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에게는 그 분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기록할 최소한의 의무가 있다. 그러나 지금도 집단학살과 인권유린의 가해자는 떵떵거리고 잘 살고 여전히 피해자는 고통 속에서 생존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당시 학살 사건과 인권유린 사건의 지휘관, 수사관, 책임자, 공안검사, 판사 등을 조사하고 그들의 실명을 밝혀야 한다. 또한 반인륜 범죄는 공소시효를 없애고 가해자들을 끝까지 찾아서 처벌해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바로 선다.
이제라도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고 일벌백계 하여 다음 세대에 부끄럽지 않은 미래를 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아직도 '박정희 정신을 배우자', '그 시절이 좋았다'라는 자들이 통합당 대표를 맡았고 국회의원을 하고 있다. 악의적 공권력을 행사하고도 대우받는 사회는 과거를 잊은 사회로 언제나 재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과거의 국가범죄가 철저하게 청산되어야 미래가 있다. 가해자의 재산을 몰수하고 희생자나 그 유가족이 그나마 경제적인 어려움이라도 없게 국가가 충분히 배상해야 한다.
▲ 이승만 동상에 고개 숙인 황교안4.15총선 종로 출마를 선언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이화동 이승만대통령기념관(이화장)을 방문해 이승만 동상을 향해 묵념하고 있다. 2020.2.11 ⓒ 권우성
이번 4.15 총선 결과를 놓고 여당인 민주당은 깊이 성찰해야 한다. 지난 노무현 정부 시절 열린우리당이 왜 망했나? 협치니 대연정이니 하며 야당인 한나라당과 시간만 끌다가 결국 정권을 내준 것이다. 그리고 불과 1년 후 그들은 노무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이번 21대 국회에서 여당인 민주당은 반드시 과거사법과 반인륜범죄처벌법을 제정하고, 사법개혁과 언론개혁 등을 과감하게 밀고나가야 한다. 그렇게 하라고 국민들이 180석이나 밀어준 것을 꼭 명심하길 바란다. 역사는 반드시 반복된다.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는 나라의 미래는 없다.
청산되지 않은 역사는 독이 되어 돌아온다 |
청산되지 않은 역사는 독이 되어서 현실로 돌아온다는 교훈을 필자는 몸으로 체험한 적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임명했던 2기 진실위 안병욱 위원장은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한 3기 진실위 이영조 위원장이 배포를 금지했던 진실위 영문보고서에서 반민특위 해체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이승만 정권은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했고 끝내 해체했다. 그로 인해 일제침략에 협조했던 친일파들은 처벌받기보다는 이승만 정권뿐만이 아니라 그 후 군사정권하에서도 권력을 가지고 큰 영향을 행사했다." 반면,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한 이영조 위원장의 반민특위 해체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달랐다. "이승만이 평생 독립운동 지도자로 살아왔다는 점과 철두철미한 반일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친일파들에 대해 개인적으로 경멸하고 있었다는 점 등을 미루어볼 때,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해체한 것은 어떤 공모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국가기반건설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즉, 반민특위 해체의 '정당성'을 주장한 이승만의 역사관이 이영조를 통해 이명박 정권시절까지 계승되고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말이 있듯이 정치만 생물인 것이 아니라 역사도 생물인 것이다. 사례는 또 있다. 지난 2010년 11월 5일 미국에서 열린 '한국 과거사정리의 성과와 의의'라는 주제의 국제심포지엄에서 이영조 진실위 위원장은 광주학살에 대해 정부공식용어인 광주민주화운동을 쓰지 않고 광주에서 발생한 '민중반란'이라고 표현했다. 또 제주4·3도 '공산주의세력이 주도한 폭동'으로 표현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민중반란', 4·3항쟁을 '4·3폭동'이라고 표현하는 사람은 일베나 전두환 신군부를 지지하는 세력 혹은 일부 극우인사다. 당시 이영조는 개인 자격이 아니라 국가기관 진실위의 공식 수장인 공무원 신분으로 이 글을 썼다. 그럼에도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쓰는 표현을 존중하지 않았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처럼 필자는 이영조의 역사관은 그를 임명한 이명박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확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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