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더는 바깥일 핑계 못 대게 하는 특단의 조치
[동네의사의 기본소득⑦] '엄마들'이 동등한 인간이 되기 위한 조건 (하)
'동네의사의 기본소득'이 매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동네의사'는 과거 국경없는의사회에서 활동했고, 한국 최초의 에볼라 의사이기도 합니다. '동네의사'가 진료실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에서 기본소득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풀어봅니다.[편집자말]
필자의 어머니가 경험한 '부업'과 그로 인한 갈등은 이미 수십 년 전 일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엄마들'에게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엄마들'은 그들에게 허용된 일자리가 주는 '돈 몇 푼' 때문에, 여전히 가사와 노동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여성은 취직을 아예 포기하거나, 비정규직 또는 시간제 일자리에 내몰린다.
▲ 자녀 연령별 부모의 고용률(일 가정 양립지표, 2018) ⓒ 통계청
가사와 일이라는 이중고를 기꺼이 짊어진 엄마들에게는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 201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여성 노동자의 임금은 남성 노동자 임금의 63.3%, 즉 2/3에도 못 미친다. 남녀 임금 격차 36.7%는 OECD 회원국 중 가장 크고, OECD 평균인 14.1%의 두 배가 넘는다. 하지만 '엄마들'에게 현실은 더 가혹하다.
2019년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 발표에 따르면 비혼 남성과 비혼 여성의 임금 격차는 13.4%였지만, 배우자가 있는 남녀의 임금 격차는 41.5%에 달한다. 이를 연령대별로 살펴보면, 15∼19세(4.8%), 20∼24세(7.0%), 25∼29세(10.1%)는 작았지만, 30∼34세(19.4%), 35∼39세(28.1%), 40∼44세(34.9%), 45∼49세(38.5%), 50∼54세(45.7%), 55∼59세(48.6%)로 30대부터 급격히 커졌다. 그러니까 50대 엄마들의 임금은 남편의 절반 수준밖에 안 된다.
게다가 2017년 기준으로 남성 노동자는 정규직 비율이 73.6%지만, 여성 노동자는 58.9%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어려서 손이 많이 갈 때 많은 '엄마'는 취직을 포기한다. 아이들이 커서 이제 일을 하려고 하면 임금이 낮은 비정규직이나 시간제 일자리밖에 갈 곳이 없게 된다.
'번듯한 월급'은 여성들을 가사노동에서 해방해줄까
▲ 장진희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 중앙연구원 연구위원 연령별 남녀 임금 격차 ⓒ 장진희
임금이 낮고 불안정한 일자리에 시달리기보다 전업주부를 선택한 여성들에게, 기본소득은 '일하겠다'라는 의욕을 불어넣을 수 있다. 기본소득으로 육아나 가사, 돌봄서비스를 좀 더 적극적으로 구매할 수도 있고, 여유를 가지고 취업 준비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취업에 뛰어든 여성들을 기다리는 것이 '저임금 비정규 불안정 노동'인 현실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여전히 출발점에 서 있다. 기본소득과 합쳐 '번듯한 월급'을 벌게 된 여성들은 가사노동, 돌봄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팔꿈치가 아파서 병원을 방문하는 여성들을 자주 만난다. 다친 적도 없는데 팔꿈치가 '공연히' 아픈 이 병이 유명한 '테니스 엘보'다. 물론 대부분은 테니스 구경도 못 해본 사람들이다. 테니스 엘보 역시 여성들에게 더 흔한데, 가사노동처럼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사람들에게 잘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팔꿈치뿐만 아니라 손목이나 어깨, 손가락이 함께 아프다고 호소하는 여성 환자도 많다. 필자는 환자들에게 "무슨 일 하세요?"라고 꼭 묻는다. 예전에는 "집에서 놀아요"라는 답이 많았다. 하지만 요즘에는 "식당에서 일해요", "마트에서 일해요"라고 답하는 여성들이 늘었다.
집에서나 일터에서나 그들의 팔꿈치는 쉴 틈이 없으니, 병이 안 날 턱이 없다. 그들에게 필자는 쓸모없는 권고를 해야 한다. "팔을 많이 써서 생긴 병입니다. 그러니 집안일도 좀 쉬거나 줄이셔야 해요." 여성 환자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에이,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나요." 남성인 의사가 자신의 처지를 이해할 수 없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한 중년여성이 손가락에 피를 흘리면서 진료실에 들어섰다. 식당에서 일하다가 부엌칼에 베였다고 한다. 봉합이 필요할 정도로 상처는 꽤 깊었다. 이런 경우 손가락을 움직였다가는 봉합한 상처가 벌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봉합한 다음 손가락에 부목을 대고 붕대로 칭칭 감아주었다. 그러자 환자가 물었다. "아니, 꼭 이렇게 거창하게 해야 하나요?" 필자가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자 그 중년여성의 걱정이 태산이다.
"아니 그래도 집안일은 해야 하는데..."
"이럴 때라도 남편보고 좀 해달라고 하세요."
그러자 그 환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는 듯 필자를 쳐다본다.
"집에서는 손가락도 까딱하지 않는 사람이 무슨 집안일을..."
노동시간을 줄여 일과 가사노동을 나누자
멀리 돌아왔지만, 우리는 이미 직관적으로 현실을 잘 알고 있다. 여성들의 경제활동 참여가 많은 여성에게 일과 가사노동이라는 이중부담을 줄 뿐이라는 현실 말이다. 다른 조건이 변하지 않은 채,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준다고 가정해 보자. 여성들은 '바깥일'을 지금보다 더 많이 하면서 '집안일'도 똑같이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기본소득운동은 기본소득이 결코 단순히 하나의 '정책'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기본소득운동이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세상을 바꾸는' 운동과 연결되어야, 제대로 된 기본소득이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일과 가사노동 이중부담' 문제는 그 대표적인 예다. 여성은 '가정'이라는 닫힌 방에서 나와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가사노동으로 갇힌 방에서 저임금 시간제 노동만 떠맡게 해서도 안 된다. 이 딜레마는 어떻게 풀 수 있을까? 그 조건은 무엇일까?
우리나라의 노동시간은 OECD 회원국들 가운데 최고 수준인 것으로 악명 높다. 그런데 좀 더 들여다볼 부분이 있다. 2017년 기준으로 남녀취업자의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남자가 43.9시간, 여자가 38.5시간이었다. 그런데 맞벌이 가구의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남자는 46.3시간, 여자는 40.3시간이다. 그러니까 '아버지들'의 주당 노동시간은 '엄마들'보다 6시간이 더 길다. 이는 물론 남성들이 상대적으로 소득이 높은 정규직 일자리에 많이 종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시간 단축, 그것이 딜레마를 푸는 첫 번째 조건이다. 하지만 노동자의 80% 이상이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우리나라에서, 실질적 임금 삭감 없이 노동시간의 대대적 단축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 열쇠가 바로 기본소득이다.
모두가 기본소득을 받는다면, 노동시간 단축으로 남성의 노동시간은 여성보다 더 크게 줄어든다. 주로 남성들이 차지하고 있던 정규직 일자리가 여성들에게도 돌아갈 것이다. '아버지들'이 더는 '바깥일'을 핑계로 집안일을 미룰 수 없다. 물론 조건이 바뀌었다고 남성과 여성이 저절로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을 공평히 분담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은 완전히 다른 조건 위에서 일과 가사의 공평한 분담을 주장할 수 있게 된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정상훈씨는 기본소득당 당원입니다. 기본소득당은 평균나이 27세의 당원들이 만든 정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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