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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꽃' 임수경 오빠 임용준의 의문의 죽음

[김성수의 한국 현대사] 시위하다가 입대... 지옥 같은 군 생활 견디다 사망

등록|2020.04.26 20:21 수정|2020.04.26 20:21
임수경(1968-)은 지난 1989년 노태우 정권의 허가를 받지 않고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로 평양에서 개최된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석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통일의 꽃'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행사를 마치고 나서 그는 한국전쟁으로 한반도 군사분계선이 가로막힌 이후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휴전선을 걸어서 남으로 넘어왔다.

임수경은 휴전선을 넘어오자마자 안기부에 구속되었다. 그때가 1989년 8월 15일이었다. 그는 1990년 6월 11일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총 3년 5개월 수감 후 1992년 12월 24일 가석방되었다. 1999년 3월 1일 사면복권 되었고 그 후 제 19대 민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었다.

임용준(1962-1984)은 임수경의 둘째 오빠다. 임수경보다 6살 많은 임용준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또 그는 어떻게 해서 그리 짧은 삶을 살다 간 것일까?

임용준은 1981년 3월 연세대학교 사회심리계열에 입학해 연세교육방송국 취재기자로 활동했고 전두환 정권에 맞서 시위에 적극 참여하는 등 학생운동을 했다. 그는 1981년 11월 25일 교내시위와 관련해 서대문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그 후 경찰기관원들은 임용준을 사찰대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임용준은 경찰에서 조사받고 훈방조치 된 후 학교당국으로부터 경고조치를 받았다. 연세대 당국은 '골치 아픈' 임용준이 학생 시위를 더는 안 하도록 그와 그의 가족에게 군입대를 권유했다. 그때는 '군대 가면 사람 된다'는 말이 돌던 시절이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군대 가면 체제순응적 인간이 된다는 말이었다. 결국 대학의 권유에 따라 임용준은 입대 휴학원을 제출한 후 1984년 4월 18일 군에 입대했다.

군대 내 가혹행위

임용준은 논산훈련소에 입영해 4주간의 신병훈련을 받은 후 그해 6월 2일 포병대대 포대로 배치되었다. 체격이 왜소하고 연세대에 재학 중이었는데도 임용준은 행정병이 되지 못하고 포대에 배치되어 주로 포 방열 훈련과 정비 등을 했다. 1980년대에는 특별한 결격사유가 없는 한 SKY대 출신들은 군대에서 행정병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필자가 몸담았던 대통령소속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아래 의문사위)는 임용준의 죽음을 조사하면서 그가 시위를 하다 군에 입대한 것이 행정병이 되지 못한 '결격사유'가 된 것으로 추정했다.

의문사위 조사결과에 따르면 당시 임용준이 복무하던 포대는 군기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고참병 10여 명이 거의 매일 졸병들을 구타했다. 특히 1주일에 1회 정도 '줄빠따'로 졸병들을 괴롭혔다. 그중에서도 임용준이 속해 있던 포반은 고참병 윤아무개와 심아무개가 졸병들을 심하게 괴롭혀 이른바 군기잡기가 가혹하기로 악명 높았다. 윤아무개와 심아무개 등 고참병 10여 명은 무엇이든 트집을 잡아 졸병들을 집합시킨 뒤 쇠파이프, 곡괭이 자루 등을 휘두르고 주먹과 발로 때리며 1시간 정도 졸병들을 구타했다.

소속대대에서는 임용준을 '보호관심사병'으로 관리했다. 보호관심사병이란 데모하다 군대에 끌려온 '말썽 많은' 대학생 출신 군인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병 임용준은 자대에 배치되자마자 고참병들로부터 '군기가 빠졌다'는 이유로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 더구나 고참병인 윤아무개, 심아무개는 임용준이 대학에 다니다가 입대해 병역 단축 혜택 대상자라는 것과 그가 대학에서 데모하다가 입대한 전력을 이유로 엎드려뻗쳐 머리박기(원산폭격) 상태에서 쇠파이프와 곡괭이 자루로 엉덩이를 때렸고, 군홧발로 허벅지를 때리고 주먹, 발, 철모로 가슴을 때리는 등 매일 가혹한 매타작을 벌였다.

윤아무개, 심아무개는 특히 맞고 있던 임용준이 고통을 참지 못해 몸을 비틀면 거의 히스테리로 보일 정도로 더 심하게 때렸다고 당시 임용준과 함께 군생활을 했던 전우 13명이 훗날 모두 의문사위에서 일치되게 진술했다. 특히 윤아무개는 처음부터 임용준에게 훈련을 제대로 못한다는 것을 트집 잡아 수시로 욕설을 퍼부으며 쇠파이프로 엉덩이를 5~6회씩 때리는 등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해 인격적인 모멸감을 느끼도록 했다. 심지어는 임용준이 면회를 다녀온 후 물품을 상납하지 않는다고 금품을 빼앗기도 했다.

체력이 약한 임용준은 이등병 시절 훈련을 무척 힘들어 했고 심지어 훈련 도중에 실신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임용준은 고참들로부터 '고문관' 취급을 받았으며 수시로 고참들에게 폭행을 당했다. 특히 윤아무개와 심아무개에게 야전삽, 소총 등으로 닥치는 대로 구타를 당해 임용준은 두 고참병 앞에서 '고양이 앞에 선 쥐처럼 덜덜 떨며' 공포에 질리곤 했다.

한편 임용준의 포대에서는 수시로 포 방열 훈련을 했다. 이때는 무엇보다도 삽으로 땅을 빨리 파서 포를 신속하게 설치해야 하는데 임용준은 체력이 약해 삽질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더욱 심한 폭행을 당했다. 게다가 고참들은 임용준이 명문대학을 다니며 학생운동에 가담했다는 데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또 대학에서 교련을 이수해 복무 기간 단축 혜택을 받는다는 사실에도 적의를 드러냈다.

고문관으로 낙인 찍힌 임용준은 이른바 '줄빠따'만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고참들이 상습적으로 괴롭히는 대상이 되었다. 연병장에 포대원들이 집합할 때 윤아무개는 동작이 느린 임용준을 계속 따라가며 군홧발로 걷어차곤 했다. 또 고참 심아무개는 임용준의 군기를 잡는다며 부대원들 앞에서 임용준을 혼자 앞으로 불러냈는데 이때 임용준은 벌벌 떨면서 나갔다고 한다.

또 1984년 10월 1일에도 고참병들이 임용준을 포함한 일병 진급자 10여 명을 신고식을 한다며 집합시킨 다음 엎드려뻗치게 한 후 쇠파이프로 엉덩이를 구타했는데, 이 때도 임용준은 주 표적이 되어 집중적으로 매를 맞았다고 전우들은 훗날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사망 당일 행적

임용준이 입대한 후 15일이 지난 1984년 5월 3일 보안부대 배경분석관 박아무개가 치안본부 정보기록실의 임용준 신원조사서를 열람한 것으로 의문사위는 밝혀냈다. 또한 당시 임용준이 복무하던 보안부대 포병반장 장아무개는 "임용준이 보안사령부의 관리대상자는 아니라도 보안부대 포병반에서 관리하는 4~5명 중에 포함되어 있었고 분기별로 보안부대에 보고를 했다"라고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의문사위는 임용준이 보안부대의 사찰 대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

임용준은 1984년 11월 2일 암호 수령을 위해 포대를 방문했다가 포대 행정반 정아무개를 만났다. 정아무개는 포대 창고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는데 임용준이 내무반인가 상황실인가에서 나오는 것을 봤고, 임용준이 방한모 하나를 줄 수 있느냐고 해서 방한모를 주었다. 그때 임용준이 "나 이제 들어가면 못 볼 것이다"라고 얘기를 했다고 훗날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그리고 임용준은 1984년 11월 2일 오후 4시~5시경 자신의 근무지인 탄약고에 복귀했으며 당시 저녁 식사시간이었는데도 혼자서 위병근무를 나갔다. 당시 임용준과 같이 탄약고에 파견근무 중이었던 문아무개는 임용준이 위병초소에 혼자 근무중이었고, 자신이 소변이 마려워 취사장 위쪽의 산으로 올라가 볼일을 보고 내려오다가 근무 중인 임용준을 보았는데, 방한모를 쓰고 우로어깨총 한 상태로 양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위병초소 바깥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봤다고 훗날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1984년 11월 2일 오후 5시 45분경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막 시작하려던 임용준의 동료병사들은 '땅'하는 단발음의 총소리를 듣고 모두 정문 초소로 달려갔다. 부대원들이 사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 철모가 벗겨지고 목에서는 피가 흐르는 임용준이 가슴을 벌렁거리며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총탄은 목 앞부분으로 들어가 목 뒤로 관통해 나갔으며, 사입구와 사출구 모두 1원짜리 동전 정도 크기였다.

동료병사가 얼굴을 몇 번 때리며 '용준아'라고 불러보았으나 임용준은 알아들을 수 없게 무어라고 입을 벙긋거리고는 곧 숨을 거두었다. 당시 임용준은 소총의 개머리판을 양다리에 끼우고 총의 몸통을 감싸안고 있었는데, 분대장이 흔들어 보았으나 기척이 없어 사망한 것으로 판단하고 내무반으로 달려가 포대본부에 알렸다.
 

▲ 경기 양주 삼성개발공원묘원에서 임용준씨 의문사를 조사하기 위해 그의 묘를 개장하기 앞서 동생 임수경씨가 제례의식을 올리고 있다. 2003.11.19 ⓒ 오마이뉴스 강이종행

  

▲ 임용진씨 의문사 조사를 위해 그의 묘를 개장하고 있다. 2003.11.19 ⓒ 오마이뉴스 강이종행


사망 원인

당시 사고현장 실지조사 결과 대공초소는 위병초소로부터 약 350m 떨어진 곳에 있어 저격가능성이 희박했다. 또한 사고 당시 대공초소 근무자도 없었으며 임용준이 단독으로 위병초소 근무를 서고 있었다. 파견분대장 외 7~8명의 동료 모두가 저녁식사를 시작하려다 총소리가 나자 일제히 위병소로 달려갔다. 그러나 위병초소 주변은 인가도 전혀 없는 곳으로 현장부근에서 수상한 사람의 인기척을 목격한 사람은 전혀 없었다. 또한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국방부과학수사연구소는 임용준의 시신을 확인한 후 "타살 혐의를 발견할 수 없었다"는 소견을 밝혔다.

지난 2003년 의문사위는 임용준 분묘 개장을 통해 시체에 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을 실시했다. 이때 목뼈 6번과 7번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파손돼 형태를 재복구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또 파손된 목뼈에서 무연화약의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으며, 흉추와 요추에는 부패에 의한 변화 외에 다른 손상으로 볼 만한 특기할 소견이 없었다. 임용준 두개골의 파손은 부패로 판단되었으며 뇌는 특별히 파손된 부분이 없었다. 결국 이러한 감정결과 임용준 경추(척추를 형성하는 뼈)의 손상은 확인되었으나, 사입구 및 사출구의 확정과 총탄발 수의 확정은 확인이 불가능했다.

결국 이러한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지난 2004년 의문사위는 임용준의 사망에 대해 아래와 같이 진상규명 불능 결정을 내렸다.
 
"사망 10여 일 전 모친과 면회한 후 입대동기에게 '사람이 죽으면 죽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을까'라고 말한 점, 사고 당일 암호를 수령하기 위해 소속대인 2포대를 방문했다가 2개월 선임병인 정아무개에게 '나 이제 들어가면 못 볼 것이다'라고 한 점을 고려하면, 임용준은 지휘관 등 간부들에 의해 묵인되는 고참병들의 비인격적인 대우 및 상습적인 구타 등으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견디기 힘든 상황에 이르게 되어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탄약고 파견 이후부터 임용준이 사망하기까지 그리고 임용준이 당일 출입한 대대 2포대와 사망 직전 탄약고에서 선임들에 의한 구타나 가혹행위가 있었는지 여부는 확정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임용준이 위법한 공권력 행사에 의해 사망했는가에 대한 인과관계를 인정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오빠가 죽은 바로 다음날 면회하기로 했는데 왜 자살하겠나?"

하지만 지난 2003년 임용준의 동생 임수경씨는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빠가 군에서 의문사 했을 때는 내가) 고2 때의 일이다. 6년 터울의 둘째 오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죽은 바로 다음날 가족이 면회를 가기로 해 오빠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군에서는 자살이라고 했다. 특히 오빠가 좋아했던 캐나다에 사는 고모도 함께 간다는 걸 알았다...당시 유서는 나오지 않았다...오빠가 죽은 바로 다음날 면회하기로 했는데 왜 자살하겠나?"
"단지 죽은 이유 만이라도 알았으면..."(http://bit.ly/6xDWK)

운동권 대학생 임용준이 군에서 자살했는지 타살 당했는지는 어떻게 보면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대학생 임용준이 시위를 하다가 군대에 끌려갔고 "물리적 폭력수단을 합법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군대에서 우주보다도 소중한 생명을 잃은 것이다. 그런데도 군대에서는 이러한 한 젊은이의 비극적 죽음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안 진다. 그것이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우리나라 군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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