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연말이었다. 출판사 <북치는소년> 대표인 이민호 시인에게서 전화가 한 통 왔다. 내년에 전태일 사거死去 50주기가 되는데 이를 기념하여 '너는 나다'라는 주제로 전국의 열 한 개 출판사가 함께 <공동 출판 프로젝트>를 기획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기획중 하나로 역대 전태일 문학상 수상자들을 대상으로 창작 소설집을 출간할 계획이라고 했다.

나도 이번 출판프로젝트에 참여할 것을 제안 받았다. 참여 제안을 받고 무척 영광스럽고 기뻤다. 하지만 한편으로 고민도 깊었다. 2004년 전태일문학상 소설 부문에서 우수상을 받았지만 이후 소설을 발표한 지 오래 되었고 연말이라 센터에서 밀린 일들을 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소설을 발표하진 못했지만 창작을 향한 열망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카페나 도서관에서 틈틈이 소설을 쓰긴 했다. 그렇게 완성한 단편소설 일곱 편을 묶어서 출판사에 투고도 하고 창작기금에 응모도 했다. 하지만 내 소설집을 출간 해주겠다는 출판사는 없었다.

창작기금 공모전에도 도전했지만 매번 선정자 명단에 내 이름 석자는 없었다. 그럴수록 소설 쓰기는 멀어졌고 작가로서의 자존감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이번 전태일 50주기 출판 기획은 상당히 의미있는 일이었다. 기존에 써 놓았던 단편 중 전태일 이름 앞에 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소설 한 편을 골라서 틈틈이 퇴고를 했다.

왜 하필 책의 제목이 <팬덤클럽>이었을까? 
 
나를 포함해서 역대 전태일문학상 수상자 여섯 명이 공동출판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출판사에 초고를 보낸 후 메일을 주고 받으며 교정을 봤다. 그리고 올해 4월 15일 마침내 기다리던 책이 나왔다.

<JTI 팬덤클럽> 책의 제목이 조금 낯설었다. 저자 증정본으로 책을 받고서 든 생각이었다. 전태일과는 어울리지 않는 제목 같았다. 책을 받은 지인과 동료도 제목이 낯설다고 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두 전태일의 '팬클럽 회원'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그동안 전태일을 너무 무겁고 숭고하게만 생각했던 게 아닐까? 화려한 가수나 배우, 아이돌과는 다른 전태일이라는 '숭고한 팬덤'이 아니었을까?

이 책의 첫 번째 소설인 나의 <네 번의 짧은 노크>는 우리 사회의 가난과 부의 대물림의 아이러니를 상반된 두 계층의 삶을 통해서 고발한다.

빈부의 격차는 인류의 영원한 숙제지만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난제일까?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은 여전히 유효할까? 최근 '전국민 고용보험'과 '기본소득'이 논의 되면서 이 소설을 읽는 시간이 남다르다.

소설은 서민과 중산층을 대변하는 두 가정이 경제적 빈곤과 가정 파탄에 이르는 과정을 세밀하고 선득하게 묘사한다.
 

기껏해야 다섯평 남짓이던, 세 모녀의 삶의 공간이, 단단하고 차가운 벽들이 그녀들을 향해서 서서히 조여온다. 세상을 의식하던 순간부터 세 모녀가 편안한 공간은 그 정도였다. 물리적 공간뿐만아니라 심리적 공간도 그 언저리였다. - 32p

그들이 각자의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자신과 타인을 파괴하는 행위에 우리는 그리고 사회와 국가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가를 섬뜩하게 묻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상황이 절망적일지라도 함께 어우러지는 공동체 속에서 작지만 희망이 있음을 보여준다.

김주욱의 단편 <클럽팬텀>은 사회적 참사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치유를 말한다. 하지만 작가는 소설 속에서 상처를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상처받은 이들의 치유를 이야기한다. 세월호를 비롯하여,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사회적 참사를 소재로 누가 누구를 치료할 수 있는가? 라며 물음표를 던진다.
 

"요즘세상에선 우는 것보다 웃는게 더 어려운 일이긴 해요."
"그렇습니까? 울기전에 크게 웃어보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살아가기 위해 웃는 연습을 하지요. 웃고 있지만 실상은 울고 있는 거지요. 뒤에서 울지언정 남들 앞에선 웃어 보이는 거예요." - 64p

우리는 크고 작은 트라우마가 끊이지 않는 사회를 살고 있다. 싫다고 마냥 외면할 수도 없다. '인간다운, 너무나 인간다운'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 사람들 앞에서 웃는 연습을 해야하는 우리들의 가련한 초상이 이 짧은 소설 속에 오롯이 담겨 있다.

​이종하의 <두 번째 서른 살>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 자신이 소설속의 한 인물이 되어 독자들을 지난한 삶 속으로 안내한다. 한쪽에서는 자본주의의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 살아가는 군상들이 있다.
 

우리들은 정말 힘든 세상을 살아왔잖아. 숨 가쁘게 달려가는 사람들과 시스템에 적응하기도 벅찬 세대였지. 그래서 소외되는 친구들이 너무 많았어. 나도 지금까지 낙오되지 않으려고 뒤에서 쫒아오느라 너무 힘들었거든. 앞으로도 그렇겠지. - 103p

또 한쪽에서는 그 평범한 삶의 지류에서 버젓이 다른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이들이 있다. 작가는 누가 옳고 그르다 할 수 없을 만큼 구차한 삶 속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하지 않는가를 묻고 있다. 그러나 그 신산스러운 삶의 길은 이 소설이 마침표를 찍어도 오리무중이다.

최경주의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하지 않았네>는 정태호라는 인물을 통해서 우리 가슴속에 생생히 살아있는 전태일을 그려낸다. 이 소설을 읽고 전태일을 아는 순간 우리는 왜 그의 '팬클럽 회원'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깨닫게 된다.
 

아이들을 모아 붕어빵을 사주면서 어떤 죄의식이 있나 살펴보곤했다. 마음의 빚이 있던가 그럴리가? 아니면 그저 순수한 마음인가? 왜 이리 마음이 무거운지? 그것이 내가 지고 가야 할 짐인가?  - 157p

작품속에 등장하는 재단사 정태호, 도망중인 용접사 김중사, 폐병 걸린 시다 아이, 그리고 봉제공장의 미싱사 누나들, 개인의 삶은 하나같이 힘들고 부박하지만 그들은 좌절하지 않고 노동이 주는 희망과 긍정을 강조한다.

최용탁의 <수진리 고개>는 광주대단지사건을 다룬다. 작가는 인간의 권리가 무참히 짓밟히던 당시의 광주대단지를 생생히 묘사한다. 소설은 화자와 나 그리고 모든이들의 공통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어머니다. 불러도 불러도 그리운 향수. 우연이었을까? 나는 이 작품의 배경인 광주대단지(성남 상대원)의 한 지역에서 이십년 넘게 살고 있다. 내가 없던 시간의 뼈아픈 역사의 상흔이 지금도 산을 깎아서 만든 비탈진 골목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가난의 속살은 끔찍했다. 겨울이면 난방시설도 갖추지 못한채 바람만 겨우 막는 천막마다 굶주린 아이들과 실업자들이 대낮에도 이불을 뒤집어쓴채 추위에 떨었고 여름이면 그늘 하나 없는 황무지 위에 겨우 햇볕만 가린 천막 안에서 파리, 모기를 물리칠 힘도 없이 쓰러져 있는 참상이 벌어졌다. - 185p

무능한 아버지 대신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화자의 어머니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위한 투쟁의 한가운데에서 결국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우연이었을까? 어쩌다 보니 이전 두 직장도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전세집도 재개발 예정지다. 골목과 담벼락에 나부끼는 팸플릿과 현수막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장맛빛 희망으로 가득 하지만 현실은 훌쩍 올라버린 임대료를 감당하기도 힘들다. 오년이나 십년 후 소설 속 나는 젠트리피케이션의 희생양이 되지 않을수 있을까?

홍명진의 <미조>는 1980년대 노동운동이 싹트던 시절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예전에 함께 일했던 동료가 새로 개업한 카페를 찾으며 한때 봉제공장에서 자기를 친동생처럼 따랐던 미조를 회상한다. 누구나 과거에 묻어버린 시간의 후회나 미련이 있다. 미조는 주인공이 묻어두고 싶었던 과거다. 주인공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가는 길목에 선 가련한 속죄양이다.
 

사고였잖아. 나도 다 잊어버린줄 알았는데 여기 오자마자 그 생각부터 나더라. 눈에서 멀어지고 환경이 달라지니까 생각이고 뭐고 안 나더니.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쿵하고 떨어질때가 있는데 너라고 왜 안그렇겠어. - 211p

숨을 죽이며 <미조>를 읽는동안 자연스레 과거 속의 한 인물을 떠올린다. 그때 나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망설임은 돌이킬 수 없는 사건과 후회 그리고 미련을 남긴다.

소설의 주인공도 수십 년이 흘렀지만, 단 한 번 망설였던 그 순간으로 인해 죄의식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소설을 통해서 작가는 묻는다. 당신은 어떤 부채를 안고 살아가고 있냐고?

어쩌다 전태일의 <팬클럽회원>이 되었을까?
 
우리는 어쩌다 전태일의 '팬덤'이 되었을까? 나는 서른 살이 되기 전까지 전태일을 잘 몰랐다. 전태일이라는 이름 석자만 알았을 뿐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몰랐다. 이십대의 나는 기계음이 가득하고 먼지 가득한 생산 현장에서, 또 그 제품들이 가득 쌓인 물류창고를 전전하며 일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찐' 노동자의 삶을 살면서도 노동자를 위해 불꽃으로 산화한 전태일을 몰랐다.

서른 무렵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도 어떤 사명감이나 치열한 투쟁 의식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오랫동안 아팠던 동생과 내가 살아온 지난한 생의 한 단면을 조각조각 쪼개고 부수어서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엮었을 뿐이다. 그것으로 나의 아픔과 상처가 조금은 보듬어지길 바랐다.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진짜 전태일을 알게 되었다. 전태일 평전을 읽으며 내가 노동자였음을 각성했고, 추운 겨울날 사비를 털어 봉제공장의 어린 시다들에게 붕어빵을 사주던 전태일의 따듯한 '인간애'를 알게 되었다.

홀로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며 이를 준수하라던 전태일의 목소리를 들었다. 신문 기사를 찾아서 읽으며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과 부조리를 깨달았다. 생각이 변하자 삶이 바뀌었다. 나는 소설 쓰는 사회복지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