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암으로 고통받는 사람까지 고문한 이근안
[김성수의 한국 현대사] 전두환 정권에서 고문 받다 옥사한 이재문
▲ <동아일보> 1979년 11월 13일 자 기사 "남민전 관련 23명 추가 검거"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이재문은 1934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북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영남일보와 대구일보 기자로 재직했다. 1960년 4·19 직후 민족일보 정치부 기자로 일하며 '통일민주청년동맹'과 '사회당' 활동을 했다. 1964년 '1차 인혁당사건'으로 구속된 그는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석방 후인 1967년 대선을 앞두고 '반독재 재야민주세력 단일후보추진위원회' 활동을 했다.
1969년 여당인 공화당이 박정희의 3선을 가능하게 하려고 추진했던 '3선개헌'이 이루어진 후 그는 대구에서 '민주수호협의회' 대변인 활동을 했다. 그러나 1972년 박정희의 유신 선포 후에는 민주수호협의회가 해체되어 대변인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유신 이후 이재문은 대구에서 <참소리>라는 지하신문을 만들고 유신반대운동을 확산시켰다.
이재문은 도예종 등의 죽음을 보고 박정희에게 분노한다. 그리고 박정희가 죽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절박한 상황에서 도피 중이던 1976년 2월 29일 유신정권에 맞설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아래 남민전)'를 결성한다. 1975년 5월 13일 박정희가 선포한 '긴급조치 9호'로 모든 반독재민주화 운동이 불법이 된 상황에서 이재문 등이 결성한 비밀정치조직이 남민전이었다.
이근안의 물고문, 전기고문, 성고문
1979년 10월에서 11월 사이, 이재문을 비롯한 이재오(전 새누리당 국회의원), 이학영(민주당 국회의원), 임헌영(민족문제연구소장) 등 남민전 조직원 84명이 구속된다. 이재문은 1979년 10월 4일 체포·구속되어 조사과정에서 남영동 대공수사단 소속 경찰관들로부터 극심한 고문을 당한다. 특히 악명 높은 '고문기술자' 이근안으로 부터 무차별 구타, 물고문, 전기고문뿐만 아니라 '볼펜 고문'(남성 성기인 요도에 볼펜심을 쑤셔 넣는 고문)도 당한다.
필자가 노무현 정부 시절 몸담았던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아래 의문사위)는 2002년과 2004년 각각 '이재문 사건'을 조사했다. 의문사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재문은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는 사실을 법정에서 수차례 진술한다. 하지만 귀 기울여 주는 판사는 아무도 없었다. 또한 조카 이아무개는 구치소로 삼촌인 이재문을 면회 갔을 때도 "입회 교도관 몰래 삼촌이 내게 고문 당했다는 동작을 취했다"고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남민전 관련자 김○삼은 이근안이 당시 자신을 고문하며 말했던 상황을 의문사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너 이 새끼야, 너희 수괴 이재문이도 나한테 죽다 살았어, 인마. (이재문이) 골병 많이 들었을 거야.' (이근안이) 나를 패대기친 이후에 나중에 깨어나니까 (이근안은 내게) '이재문이도 개구락지(개구리) 여러 번 됐어'라고 말했다."
김○술은 "서울구치소에서 이재문이 나에게 '(이근안으로부터) 못 견딜 만큼 당했다'는 말을 했었다"고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김○옥은 "남영동 대공수사단에서 조사를 받을 당시 경찰관들이 모여서 '5층에서 무술경찰관들이 이재문을 마치 개구리를 집어던지는 것처럼 집어던지면서 고문을 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박○옥은 "'칠성판'이 있는 남영동 조사실에서 이근안이 내게 '얼마 전까지 너희들 수괴 이재문이 여기서 당했는데, 너도 당해 봐라'는 식으로 말하면서 '나(이근안)는 고문이 전문이어서 여기서 모셔왔다'며 이야기했다"고 진술했다.
나○수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을 때 내 담당 경찰관이 '이재문이 (이근안에게) 그 정도 당했으면 골병이 들어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를 했다"고 진술했다.
당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사건수사를 직접 총괄했던 유○방은 "(이근안에게) 고문을 당했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이 거짓은 아닐 것"이라고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의문사위는 위와 같은 여러 관련자들의 증언을 종합해 볼 때 "이재문이 이근안에게 고문을 당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재문을 비롯한 남민전 사건 관련자들의 고통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만 끝나지 않았다. 심지어 검찰과 사법부 '최후의 보루'라는 법정도 남영동 대공분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남민전 조직원이었던 차○환은 "검찰 조사시 혐의사실을 부인하는 경우 검사가 직접 주먹으로 온몸을 때리거나 구둣발로 차고, 심지어는 슬리퍼를 벗어 따귀를 때리기도 하며 폭력을 휘둘렀다"고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중정의 하수인, 경찰-검찰-법원
▲ 1980년 2월 3일 공판 중 이재문(앞줄 일어선 사람) ⓒ 의문사위 자료사진
당시 재판부 상황에 대해서도 남민전 관계자 김○권은 "재판이 전혀 공정하게 진행되지 않았고 재판부의 독자성도 전혀 없었다. 경찰이든 검찰이든 다 중앙정보부의 통제 하에서 하수인 역할만 했다. 피의자들이 검찰 공소내용을 부인해도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안기관이 작성한 내용이 그대로 인정되는 재판이었다"고 진술했다.
한편, 남영동에서 고문조사를 마치고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이재문은 1980년 5월 18일경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소식을 듣는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이재문은 전두환의 광주민중학살과 계엄군의 시민탄압에 항거해 단식투쟁을 한다. 이 과정에서 고문후유증이 더해져 그의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러나 의문사위 조사결과 구치소 측은 이재문의 건강 악화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당시 서울구치소 의사는 처우가 좋지 않아 개인 영업을 병행하면서, 일주일에 세 번 정도만 구치소에 왔다. 전문적인 의료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간호사나 약사 역할을 했는데, 이들이 이재문에게 직접 피하주사, 근육주사를 놓고 약도 주었다. 구치소 병사에는 침대도 없어서 이재문을 포함한 입원 환자들은 그냥 바닥에 누워야 했다. 당시 구치소 의무과장은 훗날 의문사위에서 의료행정이 "가혹했다. 의료기기는 청진기와 혈압기가 전부였고 약은 소화제, 해열제 정도뿐이었다"고 진술했다.
그런 구치소 병사의 가혹한 조건 속에서 이재문의 위 질환은 1981년 8월부터 급격히 악화되어 갔다. 이재문 가족의 지속적인 요구가 마침내 받아들여져 9월 4일 외부의사가 서울구치소를 방문해 진찰한 결과 이재문이 '위궤양'을 앓고 있음이 확인됐다. 의사는 병의 경과, 문진, 촉진 등으로 위암 발병 가능성이 있으므로 엑스레이 검사와 위내시경 검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구치소장에게 제시했다.
그러나 이런 의사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이재문에 대한 정밀진료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이재문의 가족들은 수차례에 걸쳐 구치소장에게 진정서·탄원서 등을 제출했으나 전혀 수용되지 않았다.
결국 구치소 안에서 이재문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식사 시간에 토하는 일이 잦아지고 영양상태가 더욱 나빠졌다. 가족들의 거듭된 요구로 이재문은 1981년 10월 27일 경찰병원에 이송되어 정밀 검사를 받았고, 그 결과 병명이 '위유문부협착증(초기위암)'으로 확인되고 수술 권고가 내려졌다.
아울러 경찰병원 측은 이재문에 대한 방사선 촬영을 했으며, 그 결과 "위암일 가능성도 있으니 위내시경 검사를 해야 한다"고 권유하고, 약 3개월간의 입원 치료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구치소장에게 제시했다.
국가는 중요한 범죄피의자라 하더라도 본인과 가족들에게 발병 사실 고지와 적극적인 치료 의무가 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이런 이재문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서서히 감옥에서 죽어간 이재문
▲ 이재문의 묘지 ⓒ 의문사위 자료사진
구치소는 이재문을 입병사시켜 치료를 하면서 알부민 등의 영양제를 주사하고(비용은 가족 부담), 죽과 사과 몇 조각 등을 먹이는 데 그쳤다. 이렇게 외부병원 치료를 거부 당한 후 이재문의 건강은 더 이상 회복될 수 없을 만큼 악화되었다. 서울구치소 의무과 의사 김아무개가 1981년 11월 19일 이재문을 진료했을 때, 심한 구토 때문에 음식물을 전혀 섭취할 수 없어 영양실조 상태였으며 전신이 쇠약해져 의욕상실증을 보이고 정신마저 혼미한 실정이었다.
의사 김아무개는 당시 이재문에게 혈관주사를 통해 영양을 공급하기보다, 그를 종합병원에 입원 치료시킴이 적절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서울구치소 측은 이재문에 대한 외부병원 치료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사흘 후인 22일 이재문은 위암으로 차디찬 감옥 안에서 옥사했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의문사위는 이재문의 의료기록을 찾아내어 그의 사망원인을 4가지로 확인할 수 있었다. ① 검거·수사 당시 당한 고문의 후유증, ② 구치소 내의 가혹행위 또는 비인도적인 진료거부행위, ③ 사망 당시 수사기관의 추가적인 조사나 고문, ④ 수형생활로 인한 자연사 등의 복합적 작용.
이재문이 사망한 다음날인 23일 형 이재훈이 서울구치소를 방문해 그의 사체를 인도받았고, 곧바로 인천 송현동 성당으로 가서 장례식을 하려 했다. 그러나 공안기관 관련자가 찾아와 장례식을 할 수 없다고 해, 결국 가족들은 인천 교회 묘지에 이재문의 사체를 매장해야 했다.
그 후 안기부 요원들이 이재문의 처 김재원과 형 이재훈의 거주지 주변에서 유족에 대한 감시활동을 벌인 것으로 의문사위는 판단했다. 하지만 국정원의 비협조로 의문사위는 이에 대한 구체적 증거를 확보하지는 못했다.
이재문의 처 김재원은 이재문 사망 2~3개월쯤 후에 자신이 기거하던 인천 송현동성당으로 이재문과 같이 수감생활을 하던 학생들이 찾아와서 당시 있었던 일을 전해 주었다고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그들에 따르면 안기부가 이재문을 전담관리 했고 이상한 주사를 놨으며 고의로 죽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진위에 대해 의문사위는 여러 제약과 한계로 진실을 규명할 수 없었다.
지난 2004년 의문사위는 남민전이, 당시 검찰과 경찰의 주장처럼 북한 정권과 직접 연계하고 그들로부터 지령을 받아 행동했는지에 대해서 과거 검찰과 경찰의 수사를 통해서도 확증된 바가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생전의 이재문도 검찰의 그 같은 공소사실을 시종일관 부인했고, 다른 남민전 관련자들도 오늘날까지 동일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위암에 걸려도 고문받았다
▲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도피시절 현상수배 포스터. 민가협은 1989년 2월 18일부터 '이근안 현상수배' 캠페인을 10년 동안 전개하기도 했다. ⓒ 의문사위 자료사진
의문사위는 경찰이 이재문을 서울구치소에서 남영동 대공분실로 이송해 계속 조사했으며, 고문기술자 이근안을 비롯한 대공분실 수사관들은 이미 이재문이 위암에 걸려 오래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계속적으로 고문 등 가혹행위를 했다고 밝혔다.
이어서 의문사위는 "이재문은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위암이 악화되었고, 외부의사들이 외부진료가 필요함을 구치소 측에 건의하였음에도 이를 외면하여 적정한 치료를 하지 못하여 사망에 이른 점을 인정할 수 있다. 따라서 이재문은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하여 사망하였음을 인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의문사위는 이재문 사건이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발생한 것인지 여부에 관해서는 '명백히 밝히지 못한 경우'에 해당한다"며 '진상규명불능'으로 판단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2006년 3월,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는 남민전 사건 관련자 29명을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했다. 하지만 이재문, 신향식, 이해경에 대해서는 검토미필로 심의를 보류했다.
한편, 홍세화는 '남민전 사건'이 알려지기 전인 1979년 3월 무역회사의 해외파견 직원으로 프랑스에 갔다가 '남민전 사건'이 알려진 뒤 아예 그곳에 망명했다. 홍세화가 겪은 남민전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는 1995년 그가 망명 중에 쓴 베스트셀러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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