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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간 방치된 주조장의 변신, 이래도 되나

지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담양 해동문화예술촌

등록|2020.05.09 19:15 수정|2020.05.09 19:15

▲ 옛 주조장의 상징이었던 짐발이 자전거. 담양 해동문화예술촌에서 떠올려주는 옛 추억이다. ⓒ 이돈삼


요즘 도시재생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 도시재생에서 앞서가는 곳 가운데 하나가 전라남도 담양이다. 양곡창고도, 정미소도, 주조장도, 공판장도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담양의 도시재생을 대표하는 곳이 담빛예술창고다. 담양읍내 관방천변에 있는 전시관 겸 카페다. 1968년에 정부양곡 보관창고로 지어진 남송창고였다. 2004년에 정부의 수매제도가 없어지면서 쓸모가 없어진 창고였다. 이후 10년 가까이 방치됐다.

2014년부터 2년 동안 담양군과 지역의 작가들이 머리를 맞댔다. 창고에 예술의 옷을 입혀 문화전시공간으로 만들었다. 복합전시실, 문예카페, 문화체험실로 꾸며져 있다. 미술작품 전시도 보고, 대나무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는 카페에서 차도 마실 수 있다.

창고가 양곡보관창고의 높이를 그대로 살린, 큰 건물이어서 독특하다. 미술관과 카페가 ㄱ자로 이어져 있다. 팬더 조형물이 세워져 있는 잔디마당을 기준으로 왼편이 전시장, 오른편이 카페로 꾸며졌다. 옛 모습을 그대로 살린 겉모습과 달리, 내부는 현대적인 감각으로 멋스럽다. 젊은층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으면서 담양의 새로운 명소가 됐다.
  

▲ 정부양곡 보관창고에서 변신한 담양 담빛예술창고. 방치됐던 양곡창고가 문화예술공간으로 재탄생했다. ⓒ 이돈삼

  

▲ 담빛예술창고를 찾은 사람들이 대나무 파이프 오르간 연주를 감상하고 있다. 대나무 파이프 오르간은 담빛예술창고의 상징이 됐다. ⓒ 이돈삼


담빛예술창고와 함께 담양에서 도시재생의 본보기로 자리잡은 곳이 해동문화예술촌이다. 해동문화예술촌은 항아리에서 뽀글뽀글 술이 익어가는, 발효되는 소리가 들리던 술공장이었다. 담양읍내에 있던 해동주조장이다. 오래되고 낡아서 안 쓰던 산업시설이 예술공간으로 부활했다. 부지가 6600㎡에 이른다. 모두 전시문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전시 공간은 주(主).조(造).장(場) 3개 테마로 꾸며져 있다. 갤러리와 아카이브실, 교육실도 갖추고 있다. '내 조국 내 향토를 지키는 우리 자유와 반공의 선봉에 서자...'로 시작되는 '향토방위의 노래'가 있다. 일하며 싸우고, 싸우며 일하자는 이 노래가 흘러나오는 전시관에 들어가면 해동주조장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술과 우리나라의 지역별 대표 막걸리도 살필 수 있다. 술 익어가는 소리를 영상과 음향으로 재현해 놓은 공간도 있다. 역사와 문학 속에 나오는 막걸리와 술 이야기도 볼 수 있다. 매번 다양한 전시가 열리는 예술이 함께 하는 주조장, 상상력을 맘껏 펼칠 수 있는 해동문화예술촌이다.
  

▲ 담양 해동문화예술촌 전경. 담양군이 도시재생사업의 하나로 옛 주조장을 개조해 만들었다. ⓒ 이돈삼

   

▲ 옛 해동주조장의 역사와 막걸리 이야기를 보여주는 해동문화예술촌의 전시공간. 방문자들에게 술에 얽힌 추억을 들려준다. ⓒ 이돈삼


막걸리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세 가지가 쌀과 누룩, 물이다. 막걸리의 맛과 향은 숙성된 주정을 거르고, 물을 넣어 도수를 낮춘 다음 병에 담아 포장하는 과정에서 첨가하는 재료에 따라 달라진다. 호박을 첨가하면 호박막걸리, 유자를 넣으면 유자막걸리, 딸기를 넣으면 딸기막걸리가 된다.

술 이야기도 재밌다. 중장년층은 막걸리에 얽힌 추억 몇 가지씩은 다 갖고 있다. 막걸리를 받아오라는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한 말짜리 막걸리통이나 다섯 되짜리 큰 주전자를 들고 주조장으로 갔다. 막걸리를 사오면서 홀짝홀짝 마셨던 기억이다. 집에 닿을 때쯤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취하기까지 했다.

그 추억을 떠올려주는 곳이 해동문화예술촌이다. 둥그런 막걸리통을 여러 개 싣고 배달 다녔던, 추억 속의 짐발이 자전거도 추억을 소환해준다.
  

▲ 담양읍내에서 가장 큰 산업시설이었던 옛 해동주조장 전경. 막걸리가 호황을 누리던 시절, 해동주조장의 위상이 대단했다. ⓒ 해동문화예술촌

   

▲ 해동문화예술촌의 전시공간. 옛 해동주조장의 뼈대를 살려 전시공간으로 꾸몄다. ⓒ 이돈삼


해동주조장은 1960년 전후에 생겼다. 그때부터 70년대까지 막걸리가 최대 호황을 누리던 시절이다. 해동주조장의 위상도 대단했다. 읍내 곳곳을 누비던 배달원을 합해 종업원이 수십 명이나 되는, 담양읍내에서 가장 큰 산업현장이었다.

해동주조장의 역사 50년은 우리나라 근현대 주류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해동주조장의 성쇠가 우리 막걸리의 굴곡진 역사와 닮았다. 정부는 1948년 10월 양곡관리법을 제정했다. 더 이상 쌀로 막걸리를 만들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식량이 부족한 탓이었다. 당시는 밥을 지어 먹을 쌀이 부족해 혼분식을 장려하던 때였다.

정부는 대안으로 일본식 개량 누룩 사용을 권장했다. 누룩곰팡이와 효모가 공존하는 한국누룩과 달리 일본 누룩에는 효모가 없어 주조시간이 짧았다. 쌀 이외의 다른 곡식으로 술을 빚어도 좀처럼 실패하지 않았다. 이때가 막걸리의 전성기였다. 1960년대 술 소비량의 80%가 막걸리였다. 경제개발시대 막걸리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수요를 감당하기 벅찼다. 그때 나온 것이 카바이드 막걸리다. 카바이드는 가스용접에 주로 쓰던 화학물질인데, 물과 만나면 열을 일으킨다. 막걸리의 발효 기간을 줄이려고, 공업용 화학물질을 쓴 것이다. 당연히 부작용이 따랐다. 막걸리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고, 숙취도 지독했다. 막걸리의 이미지가 실추되기 시작하더니, 서민의 술이라는 위상도 한꺼번에 무너졌다.

막걸리가 내리막길을 걷고, 소주와 맥주가 부상했다.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을 거치면서 맥주와 소주 소비량이 막걸리를 넘어섰다. 막걸리의 추락은, 막걸리를 빚는 주조장의 경영난으로 이어졌다. 해동주조장도 예외일 수 없었다. 2010년에 공식 폐업을 했다.
  

▲ 해동문화예술촌 풍경. 주조장이 성업이던 그때 그 시절의 우물을 고스란히 살려 만들었다. ⓒ 이돈삼

   

▲ 해동문화예술촌의 전시공간. 예술촌의 크고 작은 전시공간에선 갖가지 전시가 이어진다. ⓒ 이돈삼


해동문화예술촌은 담양의 산업화를 이끌어 온 해동주조장의 변신이다. 2016년부터 담양군과 문화체육관광부가 재생사업을 추진하면서다. 담양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고, 담양사람과 외지인의 사이를 잇는 통로로 만들었다.

해동주조장의 문화예술촌 조성사업은 올해 말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당시 주인이 사용하던 안채와 마당을 방문객들의 휴식공간으로 꾸미고 있다. 주조장 앞의 한옥은 인문학당과 해외작가들의 공간으로, 그 옆의 교회 건물은 클래식 음악을 공연하고 영화를 상영하는 문화공간으로 만든다.
  

▲ 옛 주인이 쓰던 안채와 마당 정비사업이 한창이다. 해동문화예술촌 조성사업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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