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아나운서 딸의 부모 이야기, 이제 그만 씁니다

[나를 붙잡은 말들] 마지막회, ‘자식’의 마음으로 부모님께 쓰는 편지

등록|2020.05.08 07:04 수정|2020.05.08 07:04
연재 '나를 붙잡은 말들'은 프리랜스 아나운서 임희정씨가 쓰는 '노동으로 나를 길러내신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말과 글을 업으로 하며 살고 있지만 정작 부모님께는 살가운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했고, 마음이 담긴 편지 한 장 쓰지 못했다. 가난했고 무지했던 부모를 평생 원망하며 살았고, 부끄럽다 생각했다.

어른이 되고 돈을 벌고 꿈을 이루고 여유가 조금 생기자 태어나 35년 만에 '반성문'을 쓰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건설 현장에서 일꾼으로 50년 넘게 일해온 아버지의 노동을, 언제나 변함없이 50년 넘게 가족들 뒷바라지를 해온 어머니의 가사노동을 나는 왜 부끄러워했는가.

글을 쓰며 부모의 애씀을 알게 됐고, 내 마음을 정리했고, 무엇보다 그 위대한 생을 이해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2017년 11월 15일 <오마이뉴스>에 처음 썼던 글은 세상에 흔적을 남기며 차곡차곡 쌓여 책이 되었다.

이제 나는 부모의 글을 그만 쓰고 싶다. 언제나 글이 쓰였던 순간은 기쁘고 좋을 때가 아닌 부모를 생각하며 눈물짓고, 화나고, 한탄스러울 때였다.

지난 생의 한숨들을 글로 다 토해내고 나니 이제 후련하다. 아나운서도 작가도 아닌 온전한 자식의 마음으로 마지막 편지를 부모님께 쓰며 연재를 마친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가슴 깊이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임희정 아나운서의 '나를 붙잡은 말들' 연재 기사 읽기 http://omn.kr/1k276]
 

▲ 부모님과 함께. ⓒ 임희정


엄마에게

나의 조순덕 여사님. 나는 엄마의 이름이 순덕이라 좋은데, 엄마는 그 이름을 참 싫어했지.

세상에서 딸내미가 제일 중요한 우리 엄마. 내가 엄마를 오랫동안 창피해해서 많이 미안해. 어렸을 때 엄마가 제일 하고 싶어 했던 일은 내 손을 잡고 시장에 장을 보러 가는 일이었는데, 나는 그게 왜 이렇게 싫었을까? 내가 맨날 싫다고 싫다고 해도 엄마는 맨날 가자고 가자고 했지.

항상 양손 무겁게 식구들 먹일 장을 보고 낑낑대며 집에 돌아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따라가지 않았지. 사실 나는 그게 조금 창피해서 그랬나 봐. 자꾸 천 원만, 오백 원만 더 깎아달라고 하는 엄마의 말이, 조금 더 달라고 하는 엄마의 애원이 부끄러웠나 봐. 철없는 나는 어린 마음에 그게 어딜 가나 가난을 티 내는 것만 같아서 엄마를 자꾸만 멀리했어.

지금도 엄마는 내 손을 잡고 시장에 가는 걸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지. 내가 엄마 앞에서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면 그거 보는 것도 제일 좋아하고. 오랜만에 내 얼굴을 보면 엄마는 손을 하늘 끝까지 뻗어 올리고 나를 와락 껴안지. '아이고, 우리 딸!' 그 한 마디에 나는 맨날 눈물이 나. 엄마가 나를 안고 등을 토닥여 줄 때 나는 손으로 눈물을 재빨리 닦아.

맨날 나보고 불쌍하다고 했던 엄마. 나는 전혀 불쌍하지 않아. 누구보다 따뜻한 밥을 많이 먹고 자랐고, 누구보다 따뜻한 사랑을 받고 자랐잖아. 그래서 나도 엄마가 불쌍하다 생각하지 않을래. 나도 엄마를 많이 사랑하니까.

엄마는 밥을 먹을 때 반찬을 손으로 잘 집어 먹잖아.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 얼굴에 잘 묻히고 먹고, 그 묻은 것도 손으로 맨날 슥슥 닦고. 엄마는 뭐든 손으로 하잖아. 음식 만들 때도, 음식 치울 때도 다 맨손으로 하지. 그 손으로 내 얼굴도 쓰다듬고 내 등도 쓰다듬어 주고.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반찬, 내가 좋아하는 음식, 다 잘 아는데, 나는 엄마에 대해 아는 게 없어. 엄마는 꿈이 뭐였는지, 뭘 좋아하는지, 어딜 가고 싶은지, 엄마는 항상 엄마보다 내가 먼저였으니까. 미안해. 내가 엄마보다 먼저가 되어서.

엄마는 나랑 목욕탕 가는 것도 좋아하지. 내가 등 밀어주는 것도 좋아하고. 생활비는 천 원 한 장 허투루 안 쓰면서 목욕탕 안에서는 나한테 먹고 싶은 거 다 먹으라고 맨날 말하지.

그러고 보니 엄마는 나랑 어딜 가는 걸 제일 좋아하는구나. 미안해. 같이 많이 못 가서. 엄마는 나밖에 없다고 속삭이듯 얘기하지. 미안해. 나는 엄마 말고도 다른 것도 많아서.

나는 언제까지 엄마 밥을 먹을 수 있을까. 엄마는 언제까지 밥을 해야 할까. 밥, 밥, 밥... 엄마 많이 지겹지? 얼마나 지겨울까. 지겹다고 하면서도 엄마는 오늘도 차리지.

엄마, 다시 태어나면 머릿결 좋은 그 생머리 길게 길러서 찰랑거리며 다녀. 그랬으면 좋겠어. 염색도 하고 파마도 마음껏 하고. 미용실에서 무조건 제일 싸고 오래가는 거로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다시 태어나면 또각또각 구두 신고 예쁜 옷 입고 다녀. 밥하지 말고 먹고 싶은 거 마음껏 사 먹어. 나는 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로 태어나고 싶지만 나 때문에 엄마가 희생하고 포기한 것들을 생각하면 나는 엄마가, 엄마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밥, 그게 뭐라고 엄만 평생을 차렸을까. 엄마는 때우고 나는 채워준 밥, 그게 뭐라고.

엄마, 우리 같이 밥 먹자. 이제 내가 엄마 먹고 싶은 거로 거하게 한 상 차려줄게. 고마워. 난 항상 엄마 덕분에 배불렀어.
 

▲ 부모님이 쓰신 글씨 ⓒ 임희정


아빠에게
   
아빠, 나는 이 단어를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부르면 눈물부터 나. 왜 그럴까. 아빠는 진짜 얼마나 많이 힘들었을까. 하루하루가 얼마나 고역이었을까.

아빠는 도대체 왜 막노동을 하게 된 거야? 누가 시켰어? 왜 그 일을 했어?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정말 아빠를 말리고 싶어. 너무 힘들잖아. 아빠 너무 말랐잖아. 아빠 몸에 상처 너무 많잖아. 아빠 맨날 쓰러져 잠들잖아. 나는 아빠를 생각하면 너무 많이 울어. 그래서 아빠 생각하기가 싫어.

아빠는 지금도 술에 취하면 나 대학교 등록금 못 내준 거 너무 미안하다고 얘기하지. 어렸을 때 학원 한 번 안 다니고도 그림도 잘 그리고 피아노도 잘 쳤는데, 아빠가 아무것도 뒷바라지 못 해줘서 미안하다고 얘기하지.

아니야. 아빠는 누구보다 든든하게 날 평생 보살펴 줬어. 그런데 아빠, 나는 평생 아빠 일 다른 사람들한테 거짓말하고 살았어. 너무 미안해. 아빠의 노동을 외면해서 미안해. 아빠는 맨날 나를 자랑하고 다녔는데 나는 아빠를 맨날 숨기고 다녔어.

아빠는 항상 가만히 나를 기다리지. 전화해서도 가만히 듣고 있고, 내가 집에 간다고 하면 집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근데 나는 아빠를 못 기다려줘서 미안해. 전화할 때도 답답해서 먼저 소리치고 아빠랑 같이 있을 때도 짜증 내며 먼저 가 버리고. 항상 그러고 나서 뒤돌아 많이 울었어.

아빠, 다시 태어나면 꼭 사무실에서 하는 일 했으면 좋겠어. 비 맞지 말고. 더위에, 추위에, 거리 한복판에, 그런 데서 말고 의자에 앉아서 일했으면 좋겠어. 주말은 꼬박꼬박 쉬고, 시간 지나면 경력 인정받아 호봉도 오르고 그랬으면 좋겠어.

그리고 살도 좀 통통했으면 좋겠어. 아빠가 좀 느릿느릿했으면 좋겠어. 아빠는 너무 빠르잖아. 빨리 일하고, 빨리 밥 먹고, 빨리 자야 했으니까. 나는 그 속도가 너무 슬퍼. 천천히 숨도 고르고 여유 있게 살았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아빠 이제 좀 쉬어. 몸 쓰지 말고 마음도 쓰지 말고 아무것도. 50년 넘게 일했잖아. 그것도 공사장에서 노동을 50년 넘게 했잖아. 너무 많이 했어. 미안해, 너무 오래 노동하게 해서. 딸내미가 호강 못 시켜줘서. 다 내가 미안해.

아빠, 아프지 마. 아빠 아프면 내가 무너져.

우리 같이 밥 먹자. 아빠 삼겹살 좋아하잖아. 내가 맛있는 삼겹살 사 들고 갈게. 아빠가 월급 받으면 항상 사 왔던 삼겹살, 이제 많이 사줄게. 고마워. 이제 나 오랫동안 아빠를 자랑스러워하며 살게. 나는 자랑스러운 노동자 아버지를 둔 아나운서 딸이야. 나는 임동명의 딸 임희정이야.
 

▲ 딸이 낸 책을 들고 환하게 웃으시는 부모님 ⓒ 임희정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